개자추

 

'''개자추
介子推
'''

진문공이 면산에다가 일부러 불을 질러 나오게 하자 노모를 업고 나무를 붙들어서 타 죽는 장면이다
''''''
(介)
''''''
자추(子推)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36년
''' 고향'''
진나라 문희(聞喜)
1. 개요
2. 생애
2.1. 자신의 넓적다리를 진문공에게 먹이다
2.2. 논공행상에서 빠지고 면산에서 최후를 마치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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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 일명 개지추(介之推), 달리 개추(介推), 개자(介子)라고도 불린다. 문희(聞喜) 사람.[1] 진문공의 신하로 진헌공 대에 여희가 진나라를 어지럽힐 때 진문공과 함께 적나라로 떠났으며 함께 고생하면서 충의를 다했다.
그는 진문공을 진나라로 돌아가 진후가 되게 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에 원망하지 않고 늙은 어머니와 산으로 들어가 살았으며 진문공은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 개자추가 머무는 산을 불지르면 빠져 나올 줄 알았으나, 그는 불타는 산에서 어머니와 같이 최후를 맞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문공은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을 추념하기 위해 그날을 한식이라고 부르고 불을 피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 생애



2.1. 자신의 넓적다리를 진문공에게 먹이다


여희의 난 이후 공자 중이 즉 진문공과 함께 적나라로 도피했다. 현명한 신하 5명과 도피했는데, 그들은 호언, 호모, 조최, 선진, 개자추였다. 개자추는 19년 동안 진문공의 도피에 참여해, 각지를 떠돌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목표는 진나라로 돌아가서 국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진문공이 위나라 경계에 머무를 당시에 진문공 일행이 지닌 식량이 바닥났다. 이는 신하 중 하나인 두수(頭須)가 배신했기 때문. 두수는 머리가 좋아 계산 능력이 무척 좋아서 문공이 총애하던 신하였으나, 재빠른 머리만큼 포기하고 먹을 것과 돈을 챙겨 달아나버렸다.
이로 인해 문공과 신하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곤란해 하던 차에 개자추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였다. 그렇게 개자추가 충의를 보였기에 사관들은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진문공을 옹립했다고 평했다.

2.2. 논공행상에서 빠지고 면산에서 최후를 마치다


진문공은 진목공과 5현인들의 도움을 받아 19년의 방랑 생활 끝에 진후가 되었다. 진문공은 논공행상을 할 때 개자추를 제외한 4명 등에게는 벼슬과 상을 분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공이 높다고 일컬으면서 다투었으니 이것을 두고 탐천지공(貪天之功)이라고 했다.
하지만 개자추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2] 초연히 늙은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숨어 살았다. 이후에 진문공은 그를 잊었음을 생각해 내고[3]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이미 면산으로 간 지 오래라 진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질렀더니 어머니를 업으면서 나무를 붙들고 생을 마감했으며 산이 전소된 뒤에야 군사 중 한명이 그와 그의 모친의 소사한 시신을 발견하고 두 사람이 사망했다고 외치자, 진문공은 그 행위를 후회하면서 큰 소리로 하염없이 울었다. 이후 진 문공의 명으로 매년 그의 기일에는 소사한 그를 기리기 위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었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과 청명절의 유래다.
그리고 그가 붙든 나무로 신밭 밑바닥을 만들어 신었으며 그의 은공(恩功)을 생각할 때마다, 그 신발을 보며 말했다고 한다. "발아래있는 그대를 생각하니 슬프도다(悲乎, 足下)" 즉 문공 자신의 사람됨은 개자추의 발 아래에 있다는 말로 족하(足下)라는 호칭은 여기에서 생기게 되었다.
참 얄궂게도 어렵게 굶주림을 막아내며 주군을 살린 그는 이렇게 죽었지만, 정작 돈과 먹을 걸 챙겨 달아난 두수는 나중에 문공이 다시 돌아와 제위하자 뻔뻔스럽게 얼굴을 드러내고 궁궐에 나타났다. 문공이 분노했지만, 두수는 나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자면 저를 용서해달라했고, 문공은 그를 살려주고 후한 벼슬을 주고 등용해 천수를 누렸다는 점이다.

3. 미디어 믹스


고우영 십팔사략과 고우영 열국지에서 등장한다. 진문공을 따라다니면서 여러가지를 보고 느끼는 듯하는 모습을 보이며, 충심은 그대로이나 평소에도 원래 공명정대하고 지혜로웠던 이기에, 진문공에 대한 충심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은 거진 놓고 다니신다.[4][5] 이후에 진문공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 자신이 개국공신의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는 마치 이젠 더 이상은 할 것은 없다 라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싸면서 어머니와 함께 떠난다.[6] 이후에 진문공이 고깃국을 먹다가 개자추의 충심을 기억하고 찾을 때도,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병사들이 찾는 모습만 보여주다가[7] 불타는 산 이후에, 불타 죽었다고 언급으로 넘어가고 진문공은 그것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만 여기서도 진문공이 "그리도 섭섭했단 말인가"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독자에 따라서는 개자추가 삐쳐서 숨어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위 문단 내용은 열국지와 십팔사략의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열국지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하며 개자추 본인 또한 권력에 초탈한 모습을 보이지만, 십팔사략에서는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고 바쁜 와중에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어 개자추가 시무룩하게 낙향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캐릭터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공의 태도도 다르게 나오는데 십팔사략에서 문공은 한번 크게 안타까운 탄식을 하지만 열국지에선 말 그대로 끝도 없이 울어댄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개자추가 삐졌다는 거로 나온다. 본래는 공을 내세울 때 본인만 초연하게 공을 내세우지 않고 은거한 것인데 본방송에서는 개자추가 자기한테 상을 안 주자 화가 나서 은거했고 뒤늦게 알아차린 진문공이 그제서야 상을 주려고 하는데도 단단히 삐져서 나오지 않았다고 각색되었으며 한식은 '역대급 소심쟁이 덕에 만들어지게 되었다'라고 마무리했다.

[1] 삼국시대 때 하동군에 속하며, 동천왕 대에 고구려를 침략한 것으로 유명한 관구검의 고향이기도 하다.[2] 단, 이것이 진문공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공신들이 공로를 다툰 것에 실망하여 이런 행동을 한 것이기도 하다.[3]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동고동락하면서 자기 다리살까지 베어 주군에게 바친 충신을 잊는게 더 이상하지만. 고대의 역사기록은 일화를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개자추와 진문공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4] 오히려 진문공이 즉위하기 직전에 오랜 떠돌이 생활 중 썼던 오래된 물건들은 이제 필요없다고 버리려는데, 신하 중 한 명이 '''저희 역시 늙어서 필요없으실 듯 합니다.''' 라고 말해서 진문공이 그 물건들도 가져가는데, 되려 그것을 보고서는 '''폐하를 충성으로 따르던 이들이 늙더니 욕심 생겼구나''' 라고 속으로 한탄까지 한다.[5] 허벅지를 베어 진문공에게 먹였던 것도 기력이 쇠하고 힘들어하며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진문공에게 돈은 없고 도와드릴 수 있는게 없으니 자신의 허벅지를 깨끗이 씻어 스스로 잘라서 드린 것뿐이었고, 그걸 드리고도 심지어 그냥 말 안하고 있다가 다른 동료들이 보고 알려준 것.[6] 여기서 어머니가 나오는데 개자추가 상은 받지 않고 돌아와서 짐을 싸는 모습을 보고 뭐하냐고 물으니,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유랑이나 떠나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는데도 웃으시면서 '''역시 내 아들이다.''' 라고 말하며 함께 떠난다.[7] 이 중 한 병사가 '너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라며 인질극 작전처럼 장난을 치자 다른 병사가 딴죽을 거는 게 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