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

 


毌丘儉
(? ~ 255)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공손연의 난
2.3. 고구려와의 전쟁
2.4. 관구검의 난
2.4.1. 타임라인
2.5. 사후
3. 이름 논란
4.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하동군 문희현 출생으로, 는 중공(仲恭). 관구흥의 아들, 관구수의 형. 관씨가 아닌 관구씨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를 침공하여 동천왕을 패배시키고 수도국내성까지 함락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고구려 초기 역사는 현대까지 남은 사서가 없어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하는데,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때문에 정사 삼국지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한 줄이라도 더 늘어나게 되었다. 덕분에 중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인지도가 있다. 특히 삼국시대의 인물 중 한국사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평원후문학 관구흥의 아들로 부친 사후에는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조비가 태자였을 때부터 친했기에 후대를 받았고 조예#s-2에게도 신임을 받았으며 수경주에 따르면 조비 때 홍농태수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형주, 유주, 예주 등 각지의 지방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공손연과의 전쟁 이전에 오환의 선우인 구루돈(寇婁敦) 등과 교섭하여 국교를 맺는 성과를 거둔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구루돈이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는 각국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의전이었다.

2.2. 공손연의 난


관구검은 요동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손연에 대한 토벌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전임되었고, 237년에는 조예의 지시에 따라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공손연의 저항으로 요하를 넘지 못한 채 요수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고, 장마철이 되어 요하가 범람하자 요동에서 철수하였다.
관구검이 격퇴당한 뒤에 공손연이 연왕을 칭하고 독립하자, 238년에 위나라는 공손연 정벌을 위해 4만의 대군과 함께 사마의를 급파하였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성공적으로 공손연을 정벌하여 선비족과 고구려와 함께 요동 공손씨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안읍후로 승진하였다.

2.3.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242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나라의 서안평을 선제공격하자 쌍방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관구검은 가을 8월에 1만[1]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다.[2] 동천왕은 보병 2만 명을 동원했고 양군은 비류수가에서 맞붙었는데 첫 전투에서 관구검은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3천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양맥곡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관구검은 또다시 대패해 3천 명을 잃었다.
연승을 한 동천왕은 '''"이제 관구검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라는 호기로운 발언을 하며 계속해서 자신이 지휘하는 소수 기병으로 관구검의 군대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방심한 동천왕은 결사항전하며 펼친 위군의 방진에 막혀 패퇴한 뒤 동옥저로 달아났다.[3] 이어 펼쳐진 위군의 대반격으로 나머지 고구려군은 2만 병력 중 1만 8천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한다.
단, 중국의 위서나 진수의 정사 삼국지 등에서는 막판 역전승이 아닌 계속된 승전으로 기록[4]했으며 밀우와 유유의 암살로 인한 혼란도 나와있지 않다. 삼국사기 밀우•유유 열전에서는 죽은 장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그냥 '위나라 장수(魏將)'라고만 쓰여있으며, 정사 삼국지에서는 왕기가 현도군 태수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행적이 보이는 것을 봐서는 왕기 본인이 아니라 왕기군의 선봉장이 암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관구검은 겨울 10월에 현도태수 왕기에게 동천왕의 추격을 맡겼고, 그 자신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까지 진격하여 함락시키고는 성에 불을 질러 '견디지 못하는 성'이라는 뜻을 가진 불내성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뿐 아니라 승리를 기념해 동북쪽 숙신의 남쪽 경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우고 돌아간다.[5] 고구려의 동천왕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가 신하 밀우가 이끄는 결사대의 항전과 유유의 목숨을 건 사항계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단,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록이 다르므로, 실제로 어떠했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좌장군이 되고 이후 진남장군이 되었다.

2.4. 관구검의 난


제갈탄이 동흥 전투에서 패한 일로 제갈탄의 관직이었던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오나라 방면 방어를 맡았고 제갈각의 침공을 막아냈다.
255년 자신과 교분이 있던 하후현, 이풍 등이 사마사에게 주살되고 역시 사마씨에 원한이 있던 양주자사 문흠[6]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후 사마사의 전횡이 심해지자 분노해 황제 조모에게 사마씨의 죄상을 적어 올리고 마침내 태후(太后)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사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문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따로 주둔하던 회남의 장수들을 위협하고 아울러 크고 작은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7]하여 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 문흠은 스스로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 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기동부대)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문흠은 사마사에게 패배해 오나라로 도주했고 관구검은 사마사에 대항해 싸우다가 패해서 달아나던 도중에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인 장속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으며 관구검의 목은 낙양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

2.4.1. 타임라인


관구검의 난은 사마사의 죽음까지 연계되므로 꽤 중요한 사건인데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 진서 경제기, 자치통감의 타임라인이 좀 다르다. 진서는 명색이 추증황제의 제기인데도 완전히 이 부분 타임라인이 엉망진창이라 이를 교정하는 교감기가 따로 있을 정도고(...) 자치통감도 진서의 오류 때문에 피를 좀 봤다. 파성넷에서 정사 삼국지 고귀향공기를 기준으로 정리한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다.
정원 2년(255년) 1월 12일(乙丑), 관구검, 문흠의 반란 → 25일(戊寅), 정토하기 위해 사마사 출병. 30일(癸未), 곽회 죽음[8]→ 윤1월 1일(甲申), 사마사가 은교에 주둔 (진서, 자치통감) → 16일(己亥), 낙가전투와 문흠 패주 → 한편, 9일(壬辰) 오나라 손준이 수춘으로 출병하였다가 문흠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19일(壬寅), 탁고(橐皋)로 진군하자 문흠이 군영으로 와서 투항. (삼국지 오서 삼사주전) → 21일(甲辰),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 장속이 관구검을 베고 그 목을 경도로 보냄. → 29일(壬子),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음 (진서, 자치통감에서는 辛亥=28일) → 2월 5일(丁巳), 위장군 사마소를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삼국지 위서 삼소제기, 자치통감)
자치통감은 정사 삼국지와 진서가 겹치는 부분에서 진서의 황당무계하거나 말이 안되는 기록을 배제했지만, 겹치는 부분에서도 말이 되는 진서의 내용을 어떻게든 조금씩은 넣는 편인데 그러다가 피를 본 케이스가 이 대목이다. 사마사의 토벌출병 시기 부분에서 자치통감은 삼국지의 1월 무인일(戊寅)와 진서의 2월 무오일(戊午) 의 차이를 절충해서 1월 무오일(戊午)로 정리했는데 이때는 1월로 치면 5일이고 관구검의 난은 1월 12일이니 사건전개상 무리가 있게 되어버렸다. 정사 삼국지와 진서를 대조하면서 기록을 정리하다보니 이런 실수가 나고야 만 것.
정사 삼국지는 윤 1월 29일에 사마사가 죽었다고 했고 진서 경제기와 자치통감은 그 전날인 28일로 봤는데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 고귀향공 부분을 보면 '29일, 또 회남의 사대부와 백성들 가운데 관구검과 문흠에게 속은 사람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장군으로 삼았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사망했다.'라고 했다. 만약 사마사가 29일에 죽었다면 사마사는 죽기 직전에 해당사항을 처리하는 것으로 관구검의 난을 마무리 했다는 뜻이고 28일이라면 이 최종 마무리는 사마소가 처리한 것이 된다.

2.5. 사후


관구검의 손자이자 관구전의 아들 관구중, 동생 관구수는 목숨을 건져 오나라로 도주했다.
장남인 관구전은 치사시어사로 낙양에 있었는데 도망치려다가 잡혀 주살당했다.[9]
관구전의 부인인 순씨는 친척인 순의, 순우 등의 탄원으로 사면되었다. 임신 중인 관구전의 딸 관구지도 주살 대상이 되었으나, 어머니 순씨가 하증에게 탄원해 사면되었고 이후 출가한 여자는 연좌제가 붙을 땐 친정집이 아닌 시가(媤家)의 구성원으로 계산되어 처리되는식으로 법령이 개정되었다.
차남인 관구종은 오나라에 사자로 가서 목숨을 건졌는데 훗날 서진의 시대가 오자 용서받고 아들 관구오와 함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에 출사했다.
참고로 관구검의 난을 평정한게 제갈탄인데, '''2년 뒤 제갈탄은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반란을 일으킨다'''. 사실 관구검의 난 이전에 왕릉도 수춘에서 반란을 꾀했던 적이 있다.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수춘에서 3번이나 반란이 일어난 것. 다만 3번의 반란 모두 적진은 같은 세력(사마씨)이였으나 주동자는 달랐다.[10]

3. 이름 논란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이름의 毌(꿰뚫을 관)과 毋(말 무)가 거의 비슷하다보니 혼선이 생긴 경우로 볼 수 있는데 링크의 기사에서는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를 언급하면서 무구검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구오가 한자를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으며 위키백과에서는 위나라 관구 지역에서 성이 창씨했기 때문에 관구검이 맞다는 주장을 기록하고 있고, 이 외에 毋의 음은 성 혹은 지명에서는 관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치통감 등 다른 역사서에서 '무구검'으로 표기하기도 한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 권중달 교수역에는 관구검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구가 더 익숙하다보니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서도 관구검이 더 많이 쓰인다.
너무나 비슷한 글자이다 보니 폰트에 따라 글자가 서로 반대로 나오기도 한다. 윅셔너리 링크나 창 제목에 있는 글자와 본문에 있는 글자가 엇갈려 있다. 고대에도 혼동으로 인한 오기가 빈번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관: https://en.wiktionary.org/wiki/毌
무: https://en.wiktionary.org/wiki/毋
관구씨와 그 연원에 대한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해당 글자의 발음을 'Guàn'이라고 특별히 명시해 놓았으며, 영어 위키백과 항목도 'Guanqiu Jian'으로 되어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관구씨 항목: https://zh.wikipedia.org/wiki/%E6%AF%8C%E4%B8%98%E5%A7%93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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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9, 10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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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능력치는 그냥저냥 굴릴 수 있을 정도다.
삼국지 2에서 딱 한 번 무력 90을 찍고 나와서 먼치킨 장수가 된 적이 있다.
삼국지 3에서도 무력은 75이지만 안습한 수준의 수전지휘 때문에 장군이 되지 못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76/지력 47/정치력 64로 가진 병법도 좋아서 거의 삼국지 2에 이은 제2의 전성기. 돌파, 주사, 제사, 정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9/무력 74/지력 51/정치력 58/매력 53의 무관형. 특기는 농업, 기술, 치안, 화시, 기습, 유인, 회복, 반격. 총 8개다. 그래도 후기에 등장하는 장수라 저 정도면 인재풀이 제일 나은 위나라 소속이더라도 그냥저냥 굴려먹을 수 있다. PK 전용인 253년 고전분투 시나리오정도가면 모든 장수를 통틀어서 통솔 80 넘는 장수가 20명도 안되는 안습한 상황인지라. 무력 70이 넘는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소심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74/지력 52/정치력 56/매력 54. 특기는 없다. 영웅집결에서는 수춘을 근거지로 하는 군주로 등장한다. 특이하게 친애무장에 자기를 토벌한 제갈탄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갈탄과 그 부하들도 부하로 두고 있다. 제갈탄도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1은 도시 수가 적어서 둘을 나누기도 곤란해서 이렇게 처리한 듯. 휘하에는 듣보잡들 정도밖에 없지만 내정형 모사인 하후현과 맹장인 문앙문흠 등이 쓸만하다. 주위에는 원술, 도겸, 공주 등이 있기에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후부터는 조조, 손견, 여포 등 강대국들을 상대해야 한다. 수춘 자체가 방어하기에 영 좋지 않은 지역이라 최소 4세력(조조, 여포, 장각, 손책) 이상에서 최대 8세력(조조, 여포, 장각, 도겸, 유요, 원술, 손견, 유표) 정도까지를 어떻게든지 잘 막아야 진출할 길이 생긴다. 그러니 인재 쑥쑥 흡수시키고 내정을 탄탄히 다지자.
삼국지 12 일러스트는 어째 관정의 포즈와 동일하고 옷만 갑옷이고 칼만 다른 걸 들고 있는 모습이다. 전법은 기군신속.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74/지력 55/정치력 56. 특기는 순찰 1 단 하나. 전수특기 역시 당연히 순찰이며 특이하게도 음성이 보통 음성으로 들린다. 이는 동생인 관구수와 아들 관구전도 마찬가지. 거슬린다면 PK로 할 때 노장 음성으로 변경해주자. 강유북벌 시나리오에서 반란군으로 등장한다. 이때의 근거지는 수춘이 아니라 유주 일대인데, 고구려 동천왕을 격파하고 기고만장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문흠 일가와 제갈탄은 관구검 부하가 아니라 따로 논다. 제갈탄이야 그렇다 쳐도 문흠, 특히 문앙이 휘하에 없는 건 아쉬운 대목. 전법은 자부대의 공격력을 올려주는 공격강화로 네임밸류에 비해 아쉬운 전법.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8, 무력 74, 지력 55, 정치 56, 매력 53이며 개성은 독려, 농정, 개수, 소침, 주의는 패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4, 진형은 어린, 학익, 정란, 전법은 돌격, 경파, 업화, 도발, 정란, 친애무장은 이풍, 제갈탄, 조상, 조예, 하후현, 혐오무장은 사마사다. 영웅집결에서는 수춘의 군주로 나오며 부하로는 관구수#s-2, 관구전#s-2, 관구흥#s-1, 당자#s-2.1, 문앙#s-4.1, 문호#s-2.2.1, 문흠#s-3.1, 오강#s-2, 윤대목#s-2, 이풍#s-5.1, 장반#s-2.1, 장집#s-3, 제갈정#s-2, 제갈탄#s-4.4, 초이#s-2.1, 하후현#s-6까지 총 16명을 두고 있다. 소속 도시의 재야 무장으로는 유엽#s-5.2, 장구, 주광#s-1.1, 창자, 호질#s-1.4 총 5명이 있으며 옆 동네 광릉을 점령하면 보즐#s-5, 보천#s-2.1, 보협#s-3, 서선#s-1, 여대, 장굉#s-4.2, 장홍, 진건#s-2.3, 진교#s-2.3, 진송#s-1 총 10명이 있는데 이들을 모두 등용하면 난이도가 급하락한다.

4.2.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3에서 위계열 호위무장 디폴트 네임으로 등장하며 잠깐 이름을 비췄으나 그 이후 5편까지 미등장.
후반기 시나리오가 편입된 6편부터 본격적으로 클론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손연의 난은 진나라 초반 시나리오라 사마씨 일족이 다해먹어서 비중이 없지만 중후반부에 나오는 관구검, 문흠의 난에서 총대장으로 등장한다. 6편에선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반발하며 위에 대한 충성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7에서는 문앙이 무쌍무장이 되면서 문흠 부자의 비중이 관구검을 압도한다. 관구검은 바지사장이고 진짜 반란 주체는 문흠으로 보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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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선 쪼다스러운 모습으로 등장. 덤으로 클론무장인지라 들고있는 쌍인검에서 한쪽 날을 뺀 듯한 형태의 저 장검이 EX무기가 아니라 쌍월이다. 참고로 동반 참전한 문흠은 레어 등급으로 나왔는데 본인은 노멀 등급으로 나왔다.

4.3. 반삼국지


시대를 초월해 등장. 나름대로 사마의를 도와서 위군 잔당의 위력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마초에게 썰린다.

4.4. 삵의 발톱


왠지 모르게 금발로 나온다. 고구려의 가상인물들한테 매번 당하는 찌질하고 비열한 장군으로 등장.

4.5. 삼국전투기


킹덤방난으로 패러디. 싸움을 엄청 잘하게 생겼지만 특별히 부각되는 묘사는 없다. 그나마 있다면 비류수 전투정도. 낙가 전투(4) 정사대로 일반 백성에게 화살에 맞아 사망. 최훈은 진짜로 충의를 위해 싸웠다면 자기 혼자만 도망가지는 않았을 거라며 딱히 충효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디스했다. 또한 '이기는 전투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했으나, 지는 전투에서는 누구보다도 한심했다'고 평가했는데, 이때문에 굳이 방난으로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킹덤의 방난도 왕기같이 진정으로 강한 자 앞에서는 깨갱하는 캐릭터였으니.

[1] 10만이라는 설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2] 침공 연도는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으로, 관구검기공비에는 24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때 부여가 위군에 군량을 제공했다.[3] 삼국지 위서에는 북옥저, 삼국사기에는 남옥저로 서술되어있다. 대략적으로 옥저 근방으로 이해하면 된다.[4]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관구검은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현도(玄菟)를 출발하여 여러 길을 따라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비류수(沸流水) 상으로 가서 양구(梁口)에서 대전을 벌였다. 고구려군을 연달아 쳐부수고 관구검은 마침내 말과 수레를 묶어 환도성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도륙내고 수천 명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략) 고구려 왕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자 관구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년)에 다시 고구려 정벌을 하였다. 고구려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나자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하였다. 옥저 땅 1천 리를 지나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으며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겼다. 8천 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논공을 하여 상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고구려군이 막판에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나오나 중국 기록에서는 대체로 계속된 승전으로 괴멸시킨 것으로 나온다. [5] 이 비석은 땅속에 묻혀있다가 현대에 이르러 발굴되었다.[6] 문흠은 조상의 동향인으로, 용맹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워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포상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怨恨)이 날로 심해졌다고 한다.[7] 歃血,희생의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8] 파성넷에서는 윤 1월엔 계미일이 없고 1월 30일이 계미(癸未)일이기 때문에 윤 1월 기사 이후 곽회의 죽음을 쓴 것은 잘못이고 곽회가 죽을 때 최종 관직인 거기장군이 아닌 정서장군으로 썼다고 오류를 지적했는데 물론 윤 1월에 곽회가 죽었다고 배치를 잘못한 것은 자치통감의 잘못이 맞지만 자치통감도 곽회가 거기장군으로 승진한 거 자체는 정확히 기술했다. 곽회가 거기장군이 된 것은 자치통감 권 75권에 나온다. 관구검의 난을 다룬 권 76권에서 굳이 곽회를 정서장군으로 쓴 것은 이후 진태가 곽회의 정서장군직을 이어받았다는 진태전의 기록을 참고해 진태가 승계받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사 삼국지 진태전에서 굳이 정서장군을 당시 거기장군인 곽회에게 이어받았다 기술하는데 곽회전에는 250년 거기장군이 된 이후에도 곽회의 지절과 도독은 이전과 같이 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정서장군 직도 계속 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9] 연의에선 관구전이 수도가 아니라 관구검의 휘하에 있던 것으로 나와 있으며 도망치던 도중 신현의 현령 송백에게 의지했다가 술에 취해 자던 중 목이 잘려 죽는 걸로 나온다.[10] 왕릉은 사마의, 관구검은 사마사, 제갈탄은 사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