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황력

 

1. 개요
2. 설명


1. 개요


開皇曆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인용된 가야, 정확히는 금관가야에 관한 사서다.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야계사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책이며 지금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인용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하지 않는다. 개황록(開皇錄)이라고도 한다.

2. 설명


정확히 언제 쓰인 책인지 설이 나뉘는데, 우선 '개황'이란 이름을 미루어보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581~600년에 중국 수나라에서 썼던 연호 개황이라는 것. 이 해석대로면 금관가야 멸망과 신라 편입 이후 신라 진평왕 시대쯤에 쓴 책이라는 것이다.
주보돈은 6세기 후반이라면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있을 시절인데 중국과 아무 상관없는 가야사를 서술한 책에서 수나라 연호를 굳이 이 책 이름으로 사용할 이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또 하나는 한자 開皇을 그대로 해석해서 '황국을 열었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금관가야황제국으로 높여 썼다는 말인데, 신라 사회에서 왕가도 아닌 김해 김씨들이 자기들 옛날 선조 얘기에 저런 거창한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금관국 후손들의 위상이 가장 높아진 시점, 즉 김유신이 전쟁영웅에 오른 시점~삼국통일의 열기가 아직 가시기 전인 7세기 중후반에 쓰였다는 해석이 있고(주보돈) 혹은 신라의 통제력이 무너진 나말여초(후삼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신김씨 후손들이 과거의 왕손임을 강조하려 썼다는 의견(정중환)도 있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부분으로 미뤄봐서 금관국의 역사를 신라시대에 살던 후손들의 입장을 반영해 쓴 것으로 보이며, '황실을 열었다'는 개황의 의미처럼 조상들을 매우 높이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화성이 짙은 내용으로 가득한 가락국기에 인용됐단 점에서 개황력의 내용도 설화적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삼국유사보다 앞서 김부식삼국사기를 쓸 때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설화적 성격이 김부식의 유교적 관점에서 터무니없기(괴력난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