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clearfix]
1. 개요
'''가야'''(伽倻)는 삼국시대 초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러 국가의 총칭이다. 가야의 위치는 현대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상남도 대부분,[10] 부산광역시 전체, 그리고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전라남도 3도 각각의 일부분이 가야에 속했다.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했으며, 삼한 중 마한과 진한이 일찍부터 백제와 신라를 중심으로 정리됐던 것과 달리 6세기 중후반까지 여러 작은 나라의 형태로 있었다. 물론 수백 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있는 만큼 그 여러 작은 나라들도 그대로 쭉 간 것이 아니라 소국들 간에 흥망성쇠가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에는 6개의 나라가,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된다.
가야 안에서 전기에는 김해시의 금관국이, 후기에는 고령군의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11] 이는 여럿 중 대표적인 세력 정도의 지위였다. 비교적 최신 연구에서는 함안군의 안라국이 앞에 말한 두 나라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여겨지기도 하며,[12] 이외에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갖춘 여러 성읍국가들이 있어서, 차차 중앙 집권화된 광범위한 고대 영역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달리 멸망할 때까지 도시를 초월한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다. 학자에 따라서 대가야가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13] 물론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호남 동부까지 진출하며 백제에 맞먹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지만, 결국 가야권을 통일하지도 못하고 고령군 주변만을 직접 통치하는 단계에서 백제와 신라에 치여서 멸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가야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지역별로 작은 나라가 존재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전 명칭인 변한 시절과 실질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고, 몇백 년은 기간동안 바뀌는 부분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변한 = 가야로 보아도 무방하다. 변한과 가야가 연결되는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구분한다면 어느 시점으로 구분할지는 학계에서 의견이 통일되어있지 않다. 학계 쪽 용어로는 가야사의 시작이 변한(=가야 전기)이고 5세기부터 가야 후기라는 '''전기론(前期論)''', 변한이 가야의 모태지만 둘은 구분해야 하며 3세기까진 변한, 4세기 이후는 가야라는 시각을 '''전사론(前史論)'''이라고 한다. 전기나 전사나 실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라고 봐서 원사론(原史論)이라고 정의해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대체로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쯤을 변한과 가야의 구분시점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 이전까지는 지역별로 특색있는 유물이 나타나지 않고, 변한과 진한이 제사 빼곤 비슷했다는 삼국지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야사의 특징은 다른 삼국에 비해 문헌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일단 '''가야 측이 당시에 주체적으로 남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야가 당시에 문자기록을 남겼는데 유실됐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기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고[14] 개황력과 본조사략, 가락국기와 같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가야 관련 기록도 결국 가야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나 편찬된 것으로 보이고 그마저도 후손들이 조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한 흔적이 강하다. 그리고 그나마 신라 사회에서 출세한 김해 금관국 계통 외에 나머지 가야 계통의 기록은 더 안습하다. 신라 계통 사서에 기반한 삼국사기와 백제 계통 사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서기에서는 가야가 꽤 자주 등장하지만 전부 타자로 등장하는 부분적인 기록 뿐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가야를 좀 챙겨주긴 했지만 삼국유사 특성상 설화적 내용으로 가득차있고 분량도 충분하지 못하다. 가야는 중국식 한문 역사기록체계가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멸망했고, 가야권을 아우르는 중앙정부가 없었으므로 가야 전체의 관찬사서를 편찬할 주체 같은 것이 없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서기 같이 선전으로 얼룩진 해외 기록이나, 땅 속에서 나온 유물의 형태나 분포로 정황을 추적하는 고고학 의존도가 다른 삼국보다 훨씬 높다. 다행히 가야계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하면 도굴 피해가 심하긴 하지만 시신을 안치하는 주곽과 부곽이 나뉘어 있었던 특성상 무덤 주인공 석실은 털려도 부장곽이나[15] 순장자가 묻힌 순장곽은 무사한 경우가 많아 고구려나 백제 무덤[16] 보다는 훨씬 도굴 피해가 덜하고 유물도 풍부한 편이라 고고학적으로 연구하기는 좋은 환경이다.
기록이 부족하므로 그 얼마 없는 기록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치열한 편이다. 특히 아래 여담 단락에서 설명된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와 부산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로 대표되는 두 학파의 대립이 있다. 각자 많은 근거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경북대는 현재 경북인 고령군에 자리했던 대가야를, 부산대가 현재 경남인 김해시에 자리잡았던 금관가야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처럼 가야는 도시마다 국가가 따로 존재했으므로 각 지자체와 학교들이 자기 고장에 있었던 나라에 비중을 두고 연구하고 지원하는 향토사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옆동네 신라와 비교하면 신라는 지금의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로 안착해 결국 경주 외 나머지 신라권 지자체들은 자기 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해도 결국 신라의 변방역사일 뿐이지만, 가야권은 각 지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었으니 1990년대 지방자치제 이후 매력적인 컨텐츠로 유행했다. 가야사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었던 정치적 분립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지방자치제 시행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17] 이런 지역주의적 연구는 재정적 지원을 하는 지역정치인,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간혹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기에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연구성과가 여태 쌓여온 것도 있다보니 이런 구도는 한동안은 계속될 듯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이후의 신라) 지역과는 언어, 법속, 의식주가 모두 똑같고 단 제사 풍속만 다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두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부분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야와 나라가 합쳐진 이후 신라 귀족과 같은 진골 골품을 준 것이나 삼국 통일 이후에도 9서당 10정이나 9주 5소경을 나눈 기준 등을 보면 고구려계, 백제계, '가야를 포함한 신라계' 크게 세 집단으로 통일신라인을 나눠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봐선 낙동강 동안의 원신라인들도 옛 가야계와 토박이 신라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김해 금관국을 중심으로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통설이다.[18] 이후 5세기경에 반파국(대가야)을 중심으로 지금의 호남 동부 일부까지 진출하며 중흥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를 계속 때려주던 고구려도 내분과 돌궐의 침입으로 쇠약해지고, 혼란기를 수습하고 정신을 차린 두 나라의 사이에 끼고 체급차에 밀려 결국은 하나하나 신라에 항복 또는 흡수되었다.[19] 6세기 들어 백제 성왕이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만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562년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 전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되었다. 사실 가야 세력권의 서부 일부[20] 는 백제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에서도 변방 일부라 크게 주목은 받지 못하는 편이다.[21]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소국들 역시 신라에 하나하나 병합될 때, 특히 큰 저항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경우는 신라의 유화 정책에 의해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김유신의 선조 집안인 금관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도 구형왕에게 김해를 식읍으로 주고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진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도 우륵, 강수, 김유신 가문, 진경대사 등 여러 가야계 인물들이 신라에서 활약했다.
2. 명칭
현대에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가야(伽倻)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가 존속했던 시대는 아직 한화(漢化)가 거의 되지 않은 시대라 한자 표기가 고정적으로 정착하지 않았고, 때문에 여러 기록에는 고대 한국어 표현을 들리는 대로 다르게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비슷한 명칭이 등장한다. 한자만 다른 가야들, 가량, 가라, 가락, 가기, 구야, 하라, 임나(任那) 등 다양하다.
가장 널리 쓰이는 '가야'는 현대에는 '伽倻' 한자표기가 가장 보편적인데, 국어사전에도 이 표기로 올라와있고 가야 명칭이 파생된 가야금, 가야산, 가야동 같은 지명들도 거의 저 한자 표기를 쓰지만 정작 이 한자 표기는 원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는 고려 후기~조선시대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한 표기다. 삼국사기는 주로 '加耶'로, 삼국유사는 '伽耶'로 표기했다.[22]
여러 명칭 중 임나라는 명칭은 한국 기록보다 일본 기록에서 훨씬 많이 나오고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이미지가 나빠졌지만, "임나" 역시 원래 가야의 한 구성국, 더 나아가 가야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여러 표현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사용했을 뿐 엄연히 한국계 고문헌과 금석문에도 임나라는 단어가 조금씩 나타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일본과 관련이 있는 표현은 아니다. 이 '임나'는 일본에서는 미마나로 훈독하는데, 임나의 어원은 미오야마국의 이름이 와전된 것 등 몇 가지가 있는데 뚜렷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설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릉비』
王驚喜恨相見之晩問其姓名對曰臣本任那加良人名牛頭王曰見卿頭骨可稱強首先生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지금의 경상도 서부 일대 위주였던 가야에 북쪽 바다로 볼 만한 지형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임나가 대마도에 있으며, 고대 한국의 국가들이 대마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다.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으나 이웃 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 나라에 투항하였다.
「진경대사탑비문」
현대에는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등으로 알려졌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가야 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옛 가야 시대 이름인 양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六十五年秋七月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65년 가을 7월 임나국이 소나갈길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서기』 숭신 천황 65년
按駕洛記賛云垂一紫纓下六圎卵五歸各邑一在兹城則一爲首露王餘五各爲五伽耶之主金官不入五數當矣而本朝史畧並數金官而濫記昌寕誤
『가락기』 찬을 살펴보면,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리니 /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 한 개가 이 성 안에 남았다."라고 했다. 즉 하나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은 각각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서 금관도 함께 꼽아 창녕(昌寧)이라고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오가야 제목의 주석
즉 당시에는 '금관가야'가 아닌 (예시)'가락', '금관국' 등의 명칭을 썼다는 것. 그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고정된 한자표기가 통용되지 않았던 시기라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등장한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XX가야라는 명칭이 XX국이라는 명칭과 함께 통용되었을 수도 있다.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古寧伽耶今咸寕大伽耶今髙霊星山伽耶今亰山一云碧珎小伽耶今固城又本朝史畧云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一金官為金海府二古寧爲加利縣三非火今昌寕恐髙霊之訛餘二阿羅星山同前星山或作碧珍伽耶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녕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이다. 또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금관, 둘째는 고녕, 셋째는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오가야 조
가야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한국사 다른 왕조의 이름도 거의 그렇듯이 정설은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본인의 저서 강역고에서 '가나(駕那)'가 기원이고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삼국지를 쓸 때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한치윤 등 많은 실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고 일본의 아유가이도 가야가 갈[冠弁]에 기원을 둔다며 같은 견해를 보였다. 일제강점기의 학자 이마니시 류는 '간나라'를 어원으로 추정했는데 가야 지역에서 간은 '干', '旱', '韓'으로도 표시하는 말로서 '神', '上', '大'의 뜻을 가지므로 간나라는 신의 나라, 또는 큰 나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안재홍은 가야 국가들이 낙동강변에 있었으므로 '가람(江)'이라는 말이 기원이라 추정하기도 했고, 최남선은 겨레라는 말과의 연관성을 주장했다.
3.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가야 제국이지만, '황제'의 제국(帝國)이 아니라 '여러 나라'라는 의미의 제국(諸國)이다. 주로 '''가야 연맹'''[23] 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위치상으로는 가야산 이남과 낙동강 서쪽으로 현재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남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최대 영역은 전라도 동부 일부(대략 소백 산맥까지)까지로 추정된다. 7차 교육 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여수시 등지에서도 고령계 반파국 유물이 나왔는데 이는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가 개로왕 피살과 웅진 천도 등 혼란한 틈을 타 차지한 것.
지금까지는 가야의 정치 체제로는 이수광과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처음 주장한 이후 이병도 교수가 근대적 학문 체계 속에서 정립한 '연맹 왕국설'이 정설이었다. 이 때는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외부에 공동 대응하는 연합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7년 이후에는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소국들이 연맹 형태로 연결된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이 지역에 속하는 서로 남남인 소국들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 물론 이 나라들이 때로는 서로 힘을 합치기도 했지만,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이다.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견의 진전으로 서서히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2017년 현재 역사학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대 사학계, 고고학계에서 하나의 맹주 아래 단일연맹으로 움직인다는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당장 포상팔국 전쟁만 해도 해석은 복잡하긴 하지만 어쨌든 서로 싸웠다는 것은 확실하고, 다른 예로 후반기 가야의 강호인 안라국이 낙동강 서쪽에서 고령 대가야와 양립하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때때로 대립적 관계까지 보인다. 단일연맹이 존재했다면 어느 가야가 위기에 빠지거나 멸망할 때 큰형님 대가야가 군사지원을 한다던가 하는 모습도 있어야 하는데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일연맹체설과 분립국가설 둘 사이의 절충안으로, 가야권이 하나의 단일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옛날 설에서 바뀌어 대가야권(고령 및 합천 등 주변지역), 금관가야권(김해, 부산 등), 아라가야권(함안, 마산 등), 소가야권(고성, 진주 등) 등 지역별로 중간규모 연맹체가 여럿 있었다는 지역연맹체론도 등장했는데, 부산대 백승충 교수의 설이다. 일단 이 권역 간에는 그래도 조금 더 가야 토기의 양식 등 고고학적 공통점이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으로 연맹이란 실체 자체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래서 상호 연맹체가 거의 없는 것에 가까웠다는 단순분립설이 대세인 상태.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등의 폴리스들 간의 한시적 동맹이 있었고 또 스파르타, 아테네 등이 주도적으로 패권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고대 그리스를 연맹 왕국이라 부르지는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기면 된다. 연맹이 아니라 각 성읍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거듭했을 뿐이고 평상시에는 자기들끼리 박터지게 싸운 것이다.
다만 편의상 김해 금관국이 잘 나가는 앞 시기를 전기 가야, 고령 반파국이 잘 나가는 시기를 후기 가야로 구분하는 호칭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일단 가야 제국의 개별 나라들이 별개이긴 하지만 잘 나가는 소위 맹주국이 주변 나라들에 자체 토기 등 영향력을 주변지역에 끼치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설은 AD 400년을 전후하여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금관국이 쇠퇴하였다고 보는데, 그 이전을 전기 가야, 이후를 후기 가야로 칭한다. 이 나뉘는 기준은 구체적으로는 학자마다 몇십년~백여년 이상 등 오차가 있지만 큰 기준에서 주도권이 김해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은 확실히 존재한다.
가야가 소국들로 이루어진 가야 제국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가야가 소국들이고 일본은 킨키에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에선 임나(가야)는 일본 관리가 파견되는 번국(속국)으로 나오며 일본서기를 읽으면 매우 가야를 천하게 보고 능욕하듯이 쓴 기사들도 있을 정도이다.(임나일본부설)
4. 건국신화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서에는 크게 두 가지 버전의 건국신화가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로, 이 쪽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략적인 그 내용은 서기 42년, 김해는 본래 9명의 간(干)[24] 이 추장으로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구지봉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그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왕이며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5개 가야소국의 왕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구지가 문서 참조.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 기록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신 정견모주 사이에서 반파국의 초대 국왕인 이진아시(뇌질주일), 금관국의 수로왕(뇌질청예) 형제를 얻었다는 것이다.
전자가 철저히 김해 금관국 중심적인 서사로 김해 가야계 후손 측의 전승으로 보이며 기존 세력(9간)을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수로왕)이 추대를 받았으며, 고고학적으로 논파된 6가야연맹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여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원형을 일부 잃은 신화로 보인다. 후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로 표현된 고령의 토착 재지세력이 중시되고 있고, 옛 강국 김해의 역사성은 형제라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고령 반파국을 형으로 설정하는 등 반파국이 강국으로 오른 후기 가야의 판도를 반영한 계열 신화의 전승으로 추정된다. 그 외 다른 여러 개별 가야 국가들의 경우도 원래는 저마다 나름의 시조건국신화 전승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상으로 남은 것은 이 두 계통이다.
4.1. 역사와 특징
5. 연표
6. 생활
6.1. 주거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이후 5세기까지 기와집이 없었다.[25] 실제 가야의 대부분 거주지는 아래처럼 생긴 초가집이었다.
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다.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 가옥'''[26] 과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 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 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 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 토기)가 발굴되었다.
사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기와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가야에서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가야 말기부터다. 김해, 고령 등에서는 가야 후기의 기와들이 나왔고 특히 고령군에서 가야의 대궁이 발견되면서 동시에 다량의 기와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6.2. 언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어 항목
가야 제국(諸國)이 위치했던 낙동강 하류는 본래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곳으로, 그 언어에 관한 주된 자료로는 ‘伽倻·加耶’·‘加羅’·‘駕洛’ 등으로 표기된 국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를 하기 힘든게 현실이다.
7. 가야의 구성국
8. 유물
[image]
가야의 토기. 장인마다 만드는데 편차가 있었겠지만 사진속 형태의 토기는 대부분의 가야 문화권에서 발견되었고 가야를 통해 토기, 가마기술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토기 또한 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있다. 또한 신라토기와도 유사하다.
- 가야토기 참고
가야의 금 장식.
8.1. 현존하는 유물 목록
-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
-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전 창녕 금관
- 창녕 금동투조 관모
- 함안 도항리 10호분 미늘쇠
-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
-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
- 합천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
- 합천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
9.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가야는 기본적으로 신라로 계승된 것으로 보나 현대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 들어서 백제, 마한과도 연관이 큰 부분을 주목하여 영호남의 통합을 위한 관점으로 가야사 연구를 지시한 적이 있다. 또한 가야가 한국사에 남긴 발자취는 미약한 편이나 대신 혈통적으로는 현재 한국의 최대 성씨 집단인 김해 김씨를 금관국의 후예로 두고 있기 때문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가야에 대한 인식이 강한 편이다.
고려시대에는 만월대 내 별궁 중 하나를 금관궁(金冠宮)이라 명명 하여 가야를 한국사를 이루는 고대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고 계승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북방 지역의 역사를 중시하기에 남방의 가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북한은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백제, 신라는 수도는 남한이었지만 그래도 북한 영토에도 영역을 걸친 적이라도 있는 반면[27] 가야는 남한 끄트머리에 박혀 있어 북한 영역과는 아예 관련이 없었기에 더더욱 북한은 관심이 없다.
9.1. 임나일본부설
- 임나일본부설 문서 참고.
10. 여담
- 대부분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서도 가야는 주로 조연 신세였다. 장편 드라마 중에서 유일하게 가야를 주인공급 세력으로 다룬 것으로 김수로(드라마)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지부진한 진행으로 흥행에는 실패했다.
- 현재 가야대학교가 금관 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다. 사실 대가야가 있었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대학교였는데 김해로 옮긴 것이다. 고령과 김해 둘 다 가야를 대표하는 양대 도시임을 감안하면 적절한 교명. 반면에 부산광역시의 가야동은 좀 애매한데 부산지역 자체가 전기가야 시절 김해의 영향권에 속하긴 했지만, 가야동 지역과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건 또 아니다. 여담으로 다른 삼국시대 국가명 타이틀의 대학들은 대부분 원위치(?)에 있지 않다. 고구려대학이라던지 신라대학교 모두 원 위치에서는 떨어져 있다.[28]
-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2017년 6월 1일 청와대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복원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특정 국가의 역사를 강조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야사 복원이 영호남을 잇는 사업이라 했다.[29] 사실 가야사 복원 사업의 경우 참여 정부까지는 활발히 이루어진 편이었으나 보수 정권 들어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는데 이번 대통령의 언급으로 다시금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사
- 하지만 정권에 입맛에 맞는 역사 연구는 자칫 역사왜곡으로 빠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사 고대사학회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가 입장을 변경하는 등 학계에서도 말이 많은 상황. 해당 기사
- 한편, 종래의 한국 역사학계는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에 치중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연구를 이어왔기 때문에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 문화의 유입을 중심으로 국가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유전학적,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 남부지역은 분명 북방계통과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바 남방에서 유입된 인종, 문화에 대한 새로운 역사 해석 관점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영토가 아닌 만주지역의 역사도 계통적으로 우리 역사로 편입해 이해하고 연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찬가지로 남방지역 역사도 계통적으로 우리 역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야의 세력범위 역시 한반도 남부에 국한하지 않고 큐슈 일대까지로 확장해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편 시리즈) 기후변화 자료를 통해 과거 한반도 남부가 해수면이 높아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졌음을 고려할 때 가야는 해상국가들의 교역연맹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며 그 세력권에 큐슈까지도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만주일대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우리 역사로 이해하면서 큐슈까지 관점을 확장하는데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는 일본사학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의심도 있다. 큐슈 일대까지 일본의 중앙정권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와 능력을 고려하면 큐슈일대를 가야세력권의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주장이거나 국뽕, 환빠적 해석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가야의 정치체제를 중앙집권식이 아니라 일종의 낮은 수준의 연맹체라고 이해할 경우 그 연맹의 범위는 오히려 확장될 여지가 더 많은 것이다.
- 가야사 관련해서 흥미로운 대립 구도가 있다. 바로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와 부산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로 대표되는 가야사 해석 대립이다. 특히 주보돈 교수가 2017년 8월에 자신의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를 통해 기존의 통설을 뒤엎는 학설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가야사의 시작은 기존의 서기 42년에서 4세기 초 정도로 보고 있으며, 이전의 전기 가야의 중심이었던 구야국(금관국) 체제 때는 대체적으로 변한 사회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이후 4세기 초부터 서서히 변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가야 연맹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가야의 중심은 줄곧 대가야로 보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부산 대학교 신경철 명예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정면 반박하였다. [기고] 금관 가야는 변한 시대인가? 고령과 김해의 현재 행정구역이 각각 경북, 경남으로 갈리다보니 우연찮게도 지역구도적으로도 나뉜다.
특히 신경철 교수를 비롯한 부산대 쪽의 금관국의 주도적 성장을 주안점에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주보돈 교수의 해석에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지산동 73, 75호와 같은 이른 시기 대가야의 고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누적된 위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맹주라는 표현에서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 삼국 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달리[30] 유네스코에 지정된 가야 문화재는 아직 없는데, 이는 기록 부족과 더불어, 가야 고분군 등 가야로 추정되는 유적지도 정말 가야의 고분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물과 유적이 확실히 많은 김해시와 고령군,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알려진 함안군과 고성군, 창녕군에서 가야 고분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는 있다.
11. 같이보기
- 가야/왕사
- 가야금
- 안라회의
- 웅진회의
- 사비회의
- 국립김해박물관
- 국립진주박물관
- 임나일본부설
- 키노 오이와노스쿠네
- 목라근자
- 목만치
- 역적전 - 400년대초 가야가 배경으로 많이 나오는 곽재식의 소설.
- 포상팔국의 난
- 독성산성 전투
- 관산성 전투
- 가야멸망전
- 김해가야테마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