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산국

 


1. 개요
2. 명칭
3. 역사


1. 개요


居漆山國
원삼국시대 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지금의 부산광역시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거칠산군, 장산국, 내산국으로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래는 원래 거칠산군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동래(東萊)로 개명하였다고 하며, 또『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은 장산국 혹은 내산국을 병합하여 거칠산군으로 삼았다가 경덕왕 때에 개명된 것이라고 하였다.
현대에 들어 일부 학자들은 중국 사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독로국이 이 거칠산국과 같은 나라라고 보는 학설도 제기한다. 이 때는 독로국이 거제가 아니라 부산에 위치하게 된다. 다만 정약용과 현대 다수 학자들은 독로국을 거제로 보고 있다.##

2. 명칭


지명의 유래는 말 그대로 '거친산', '거친뫼'. 부산에는 현재도 황령산(荒嶺山 : 거칠 황)이 있는데 지명이 서로 상통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진, 변한국과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국들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 물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3세기 중엽 시점의 소국명들이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3세기 말기 ~ 4세기 전중엽, 그리고 5세기 정도의 국명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국명이 바뀌었거나 몇몇 소국은 멸망, 새로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로 보인다. 또 인류학적, 고고학적 성과로 볼 때 초기 국가들은 자연적으로 인접한 지역의 읍락들이 연합한 형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각 읍락이 주도권을 쥘 때마다 그 읍락의 이름으로 바뀌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읍락 국가 이론).
이렇게 보면 동래 지역을 나타내는 소국이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으로 여러개로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부산 지역은 지리적으로 보건대, 동래 지역이 가장 생산력이 높고 중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여러 구조곡을 따라서 분절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 읍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로국을 부산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독로국은 현재 해운대 일대, 거칠산국은 동래 일대로 보기도 한다. 동래는 독로에서 변형된 말로 본다.
현재에도 동래 복천동 고분군 일대에는 행정 구역인 칠산동이 있기 때문에 거칠산국과 관련된 지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3. 역사


부산의 동래는 『삼국사기』 권34 잡지(雜誌)3, 지리(地理)1 동래군조(東萊郡條)에 처음 동래군이 나오는데, 군명의 변화 및 영현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군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고려]도 그대로 따른다. 그 영현은 둘로 동평현은 본래 대증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기장현은 본래 갑화량곡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東萊郡 本居柒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東平縣 本大甑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機張縣 本甲火良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문헌기록에서 신라가 거칠산국에 쳐들어간 내용은 삼국사기 본기가 아닌 석탈해 때의 장군 거도(居道) 열전에만 나온다.
거칠산국과 그 옆의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광역시)은 초창기 신라(사로국, 즉 경주시)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국경 지대에 위협이 되었는데 신라의 장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두 나라를 병합할 계획을 짰다. 마침 이 당시 이 지역에는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해 군사를 동원했고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두 나라 사람들도 마숙 행사를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가 평소 하던 대로라고만 생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상에서 신라가 경주 바깥의 다른 나라를 병합한 첫 사례고, 이 때쯤부터 신라가 진한 안에서 약간씩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음즙벌국실직곡국이 국경선 다툼이 해결되지 않자 신라에 중재를 요청한 것도 신라의 신장된 국격을 반영한 듯.
위는 사서의 내용대로인 얘기고 고고학적으로는 석탈해(1세기)는 커녕 한참 뒤에야 부산 지역에서 신라계 유물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워낙 기년이 맞지 않는 문제는 이전부터 제기되어왔고 삼국사기 초기 기사들은 학계에서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이주갑인상과 비슷하게 기준을 만들고 기록들을 거기다 끼워맞춘 것으로 보이는데 연도는 맞지 않지만 그래도 신라 쪽 기록들은 일어난 내용(사건)들은 신뢰도가 높다고 보고 있다.[1]
특히 1980년대 이후 고고학적 성과가 누적되면서 1세기대 신라의 팽창 등은 일부 학자를 제외하면 말이 안되는 것으로 거의 정설화되었다.
부산 지역은 다른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늦어도 기원전, 후에는 엘리트 계층이 출현하면서 소국 단계에 진입했을 것으로 본다. 기장 정관 취락 등 초기 철기, 원삼국시대 방어 취락이 관찰되고 여타 철기나 청동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동래패총에는 이러한 철기 문화와 함께 일본의 토기인 하지키가 발견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한일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쉬이 추론할 수 있다. 동래패총은 현재 수영강에서 거슬러 올라와 온천천 일대에 넓게 산포하고 있으면서 동래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과 인접하고 있다. 따라서 거칠산국은 금관국과는 별도로 일본과 교류하던 집단이었을 것이다.
4세기까지 거칠산국은 낙동강 건너편 김해의 금관국과 고고학적 특징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으며, 아직 신라계 유물은 비중이 낮다. 따라서 이때부터 독로국을 주도하던 중심 읍락이 주도권을 상실하고, 거칠산국이라는 읍락이 부산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의 부산 지역 중심 고분군은 단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이기 때문에 거칠산국과 관련된 부산 지역의 읍락은 동래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거칠산국의 지역사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4세기 영남 지역 전체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당히 중요하고 민감한 주제다. 만약 복천동 57호 21호, 22호에서 보이는 신라계 토기, 신라계 갑주, 산자형 금동관 등을 신라화의 증거로 본다면, 삼국사기 거도 열전의 내용과 이를 연관지어 거칠산국의 복속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계속해서 나타나는 금관국의 토기 양식, 그리고 금관국과 마찬가지로 출토되는 일본계 파형 동기, 통형 동기 등으로 금관국과 공통의 제례의식이 치뤄진 것에 주목하는 입장에 서서 보면, 거칠산국이 신라에 합병하는 시기가 5세기 이후가 된다. 5세기 이후로는 김해에서 초대형 고분군 축조가 중단되고 부산지역 고분군은 오히려 더 커지고, 비슷한 시기에 확연하게 신라화가 진행된다. 이후 동래 복천동에서 연산동 고분군 지역으로 중심세력이 옮겨갔다고 보기도 한다. 연산동에서 거칠산국 세력(혹은 후계 재지세력?)은 고분의 규모가 줄어들다 신라가 중앙집권화하면서 완전히 편입된다.
[1] 삼국사기의 백제 부분 초기 기록들은 내용이 앞뒤가 안 맞는 게 훨씬 심하다. 신라 쪽은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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