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갑인상

 

二周甲引上
1. 개요
2. 실상
3. 왜5왕과의 비교
4. 고사기와의 비교
5. 등장 이유


1. 개요


2(二)주기(周)의 갑자(甲), 즉 2갑자를 끌어(引) 올렸다(上)는 뜻으로, 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의 특정 부분에서 사건이 일어난 시대를 일괄적으로 120년 끌어올렸음을 뜻하는 용어. 즉 사건 자체는 대체로 사실인 듯한데 연도가 120년씩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의 영향으로 백제 비유왕 치세기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전지왕부터 개로왕의 치세기로 편입 되었고, 비유왕은 등장도 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애초에 왜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이주갑인상으로 년대를 조작했으나 비유왕 치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신라와 연합을 꿰하고 친서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왜국이 비유왕의 치세기를 소거 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1] 그래서인지 원래 4-5세기에 즉위한 백제왕들의 기록을 보면 어떠한 이유로 언제 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한지 기록 되어있지만,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은 비유왕이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언제 즉위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즉위년도를 기사년 (429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455년에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29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유왕이 즉위한 년도다.
일본서기 내적으로는 쉽게 알기 힘든 문제이나, 3-4세기 사이 백제 등 외국 관련 기록이 2갑자(120년) 끌어 올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된 용어. 이것으로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국의 역사를 앞당기기 위해서 3-4세기 사이의 공백을 120년 뒤 기록을 앞당겨 메웠음이 밝혀진 것이다.[2]
문제는 모든 일본서기의 연대가 120년씩 앞당겨진 것이 아니라 일부 시기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건의 실제 연대를 찾는 데서 이주갑인상은 오히려 다른 역사 왜곡들에 비하면 고마운 지표가 되기까지 한다. 최소한 이주갑인상된 연대는 '일괄적으로' 120년 올린 것이기라도 하기 때문에...특히 이 일괄적이고도 기계적인 120년의 끌어올림은 한반도의 고대 국가 관련 기사에만 존재하며, 일본 국내용 기사에서도 적용 되었다는 흔적은 없다. 물론 그도 그럴것이 일본은 당대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 사건을 다룬 단편적인 문헌 자체가 없기 때문에 아예 확인 조차 불가능 하지만.. 고로 일각에선, 백제의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하면서 120년을 끌어올린 것은 한반도의 고대국가를 의식한 의도적 조작이었음을 방증하는 날조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당시 일본의 변변치 않은 문헌 기록과 와교기롯으로 인하여, 120년 끌어올렸다는 것을 유일하게 검증 해줄수 있는 단서는 백제삼서를 인용한 기사와 삼국사기의 연대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2. 실상


대체로 이주갑인상으로 시점이 왜곡된 기록은 3-4세기를 다룬 것들로, 진구 황후의 치세부터 시작해서 웅략천황 기록 까지 나타난다. 백제의 해당 시기는 대략 근초고왕 치세기부터 개로왕 즉위 직전까지다.[3]따라서 진구 황후를 그대로 120년 내리거나 진구 황후 이전의 천황을 120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 시작은 246년(366년) 근초고왕 휘하의 백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직전인 230년대에는 위나라에 조공하는 등 히미코를 의식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 이전의 기록은 2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타 기록에서 확인하기 힘든 내정 기록이 하나 있고, 198-205년에 걸쳐 주아이 덴노와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록이 나타난다.
이 부분의 정벌 기록은 도대체 연대가 어떻게 돼먹었는지 알기 어렵게 마음대로 꼬였다. 실성 마립간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긴 하는데 이름은 파사로 1세기와 5세기가 융합된 기현상이 나타난다[4]. 한편 200년의 '우류조부리지간'은 석우로와 닮아 249/253년의 기록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뜬금없이 205년에 425년[5]박제상미사흔 구출을 기록하고 있어 이 시대 기록의 정확한 역사적 출처는 더욱 미궁 속에 있다.
그 뒤로부터, 진구 황후의 후기 기록(244년 이후)은 사료적 신빙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연대도 대략 이주갑인상에 맞춰진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연대이다. 일본서기는 근초고왕의 붕어와 근구수왕의 즉위를 255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이를 375년으로 말하기 때문에 약 120년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국 측 사서와 일치하므로 결국 일본서기는 120년을 앞당겼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백제 관련 기록의 연대는 대개 이주갑인상된 것으로 보면 비교적 정확한 편이나 아신왕의 즉위를 294년(→ 414년 / 실제로는 420년)으로 기록하거나 308년(→ 428년?) 갑자기 죽은 전지왕이 누이를 일본에 보내는 기록이 나타나는 등 완벽히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6]. 전지왕의 재위기간이 405년에서 420년까지이기 때문에 오진 덴노 말기에는 실제 역사와의 차이가 최소 8년에서 최대 23년까지로 단축한 것 같다. 다만 일부 기록은 이 시기에도 그대로 이주갑인상이 적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오진 덴노 치세인 310년 천자문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라는 법흥왕 치세인 521년 천자문을 전래받았다. 310년에서 120년을 더해 530년으로 정정하면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후 일본서기 상 4세기 후반 ~ 5세기에는 삼국 및 중국과 관련된 기록이 줄어들어 연대 추정이 다시 어려워진다. 하지만 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연대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대략 유랴쿠 덴노 ~ 케이타이 덴노 정도의 연대) 문제는 이것이 송서에서 중국에 조공했다고 하는 '왜5왕'의 연대와는 또 잘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애초에 120년을 끌어 올렸으므로 그 뒤의 120년은 다시 공백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 상으로 적어도 공백은 없으므로, 그 중간에 등장하는 천황들의 역사 기록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백제의 경우에는 이주갑인상의 영향으로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시점에서 비유왕의 치세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기록이 뒤죽박죽에 엉터리가 많아진다.
그런데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재야사학자 김성호는 태세기년(太歲紀年)을 이용해 오진 덴노 ~ 인교 덴노의 즉위연도를 복원했다고 주장하였다.
오진 덴노 재위기간이 30년, 닌토쿠 덴노는 60년, 인교 덴노는 30년을 더하여 120년간을 연장하여 이주갑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설이 맞는지는 검증해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해 연대가 정말 마음대로 '구겨져' 들어가 있고, 이주갑인상된 기록은 그나마 그 중에는 일관적으로 '접혀' 들어간 연도이다. 때문에 정상적인 연대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곤란하다. 일본서기 단독으로는 사서로서의 신빙성이 무지하게 떨어지고, 삼국사기나 중국의 역대 사서들과 꼭 비교검토를 해야 한다.

3. 왜5왕과의 비교


왜왕 찬(贊): 421년 이전 ~ 438 / 리추 덴노: 400(21년 이하 차이) ~ 405(33년 차이)
왜왕 진(珍): 438 ~ 443 / 한제이 덴노: 406(32년 차이) ~ 410(33년 차이)
왜왕 제(濟): 443 ~ 462 / 인교 덴노: 412(31년 차이) ~ 453(9년 차이)
왜왕 흥(興): 462 ~ 477 / 안코 덴노: 454(8년 차이) ~ 456(21년 차이)
왜왕 무(武): 477 ~ 502년 이후 / 유랴쿠 덴노: 456(21년 차이) ~ 479(23년 이상 차이)
중간중간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공통적으로 약 '''21년 ~ 23년의 격차'''를 보인다. 송서에서는 제(濟)가 다른 왕들과 다르게 공식적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생전 양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아버지(제)와 형(흥)이 한꺼번에 사망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4. 고사기와의 비교


고사기에서는 리추 덴노가 432년 사망했다고 되어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 27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부레츠 덴노유랴쿠 덴노를 본따 만든 인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서 왕계도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대수
천황명
일본서기 상 재위기간
환산된 재위기간
왜5왕
17
리추 덴노
400 ~ 405
427 ~ 432

18
한제이 덴노
406 ~ 410
433 ~ 437

19
인교 덴노
412 ~ 453
439 ~ 481

20
안코 덴노
454 ~ 456
481 ~ 483

21
유랴쿠 덴노
456 ~ 479
483 ~ 506

22
세이네이 덴노
480 ~ 484
삭제

23
겐조 덴노
485 ~ 487
삭제

24
닌켄 덴노
488 ~ 498
삭제

25
부레츠 덴노
498 ~ 507
유랴쿠 덴노와 동일인물

26
케이타이 덴노
507 ~ 531
507 ~ 531


5. 등장 이유


중국 사서에는 266년부터 413년까지 와 접촉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왜는 478년까지 활발히 중국과 교류하다가 502년 나라에서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다시 100여 년 간 중국 역사서 속에서 사라졌다.[7]
그나마 6세기 일본서기 기록은 5세기 후반 이래 역사 기록이 있었음이 확인되고[8] 신빙성이 나름대로 괜찮아지며 삼국사기 등과도 교점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6세기 일본사는 3세기 후반 ~ 4세기만큼 오리무중은 아니다.
사실 5세기 후반 이후 봉작을 받고자 왜가 조공하는 기록이 없음을 두고, 그리고 5세기 후반 이후 역사 편찬 작업을 시작했음을 두고 케이타이 덴노 세력이 정변을 통하여 구 왕실을 축출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3세기 후반과 4세기의 일본 열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한 가지 원인추론이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은 히미코 - 토요의 통치 아래 안정된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 전과 중간에 전쟁으로 인해 어지러웠던 시기가 존재하고 왕 또한 여러 국가들의 합의로 함께 세워졌다(共立). 이 균형이 깨지면 연맹왕권은 쉽게 분열될 가능성이 있는데, 3세기 후반에 아마 그러한 상황이 실제화된 듯하다. 이후 일본 열도는 다수의 국가가 병존하는 상황에 접어들었을 터, 조공함으로써 중국 사서에 이름을 남길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이 결과 종합적인 역사 기록을 남길 주체가 없었을 것이고, 사실 문자가 없었다고 하는 삼국지 동이전과 수서의 기록으로 보면 그 전부터 역사 기록을 남길수 없었다.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 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왜국에서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을 때 3세기 후반 - 4세기, 더 나아가 5,-세기까지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는 구전기록을 종합하여, 그 이후 한동안은 120년을 끌어올려 나름대로 균등한 역사기록을 분배했던 것 같다.
다만 이때 일본 열도의 권력이 마냥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는 의문점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266년 ~ 413년의 공백기 사이에도 '왜국'은 신라와 활발히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혼인을 맺기도 했다.[9] 그렇다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모종의 이유로 이 시기에 등장하는 '왜국'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진 덴노부터 다시 역사를 복원한 것 같은데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오진 덴노부터 공백기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면, 진구 황후기 말년에 딸린 역사 기록은 또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은 현재로서는 새로운 사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추측의 영역으로 남을 듯하다.
[1] 원래 목적은 비유왕의 치세기를 소거하는데 목적을 둔것은 아니지만, 이미 시작한 이주갑인상을 끝내려면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비유왕의 집권기를 년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없앴다는 것이다[2] 다만 이 공백의 기록이 그대로 말소된 건 아니고, 대체적으로 아마테라스 ~ 진무 덴노 시기로 왜곡하여 투사한 듯하다.[3] 학계 일각에서는 백제 전지왕이 일본에 보낸 308년의 기사에 등장하는 신제도원(新齊都媛)을 458년 기사에 등장하는 지진원(池津媛)과 동일인물로 보는데, 지전원에 대한 기사 이후로 대략 연도 조작으로 일컬어지는 이주갑인상은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본다[4] 실성이 일성으로 읽히기도 하는 만큼 이 부분은 신라 측의 문제였을 가능성도 있다.[5] 삼국유사 기준. 삼국사기에서는 418년.[6] 이와 별도로 이 현상은 단순히 백제 측 기록의 혼란일 수도 있다. 진서에서는 진사왕을 건너뛰고 아신왕이 바로 백제왕이 되었고 송서에서는 비유왕의 사망시점이 삼국사기보다 5년 늦은 425년으로 나오기 때문. 그리고 저런 5~10년 이내의 자잘한 왜곡이 임의적으로 가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진사왕이 찬탈 하였고 또 아신왕이 재 찬탈 했기 때문에 정통성 차원에서 송나라가 아신왕만을 인정 했을 가능성이 크고 백제측에서도 아신왕 즉위 이후 진사왕을 의도적으로 재임기간에서 누락 시켰을 가능성이 있기에 오기는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7] 이 내용마저도 실제로 왜가 조공하여 관직을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다.[8] 『제기(祭記)』, 『구사(舊辭)』: 각기 고사기, 일본서기의 원형이라고 추정함.[9] 287-289년, 292년, 294-295년, 300년, 312년, 344-346년의 기록들. 물론 이 공백기 사이에 등장하는 '왜국'이 공백기 이전과 이후에 등장하는 '왜국'과 '동일한 집단' 또는 '동일한 왕조'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