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vs해동 삼대논쟁

 


1. 개요
2. 논점
2.1. 왜색논쟁
2.2. 실전논쟁
2.3. 베기논쟁
3. 이후
4. 관련 문서


1. 개요


해동검도검도간의 논쟁.
해동검도가 80년대에 급격히 세를 불리게 되면서, 일본 무술인 검도를 보급하던 대한검도회와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대한검도회에서 검도 7단이라고 자처한 나한일을 단급 사칭 및 검도 단어의 무단 사용으로 고소하였다. 이에 나한일 측은 해동검도 명의의 유단증을 제출하면서, 자신은 해동검도 7단이라고 맞고소를 하였고 혐의 없음으로 수사종결 처분되었다.
무술 명칭 끝에 도(道)를 붙이는 것은 20세기 들어 일본에서 시작한 것으로, 가노 지고로의 유도가 시초이다. 검도 역시 그러한 흐름을 따랐던 것으로, 고유명사라고 보아야 타당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검도'라는 이름의 단체가 난립하고 있어서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경향이 컸기 때문에 법원에서 나한일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후 해동검도 측이 세를 불리면서 검도에 대해 디스를 걸었다. 이는 앞서 말한 검도 측과 원한 문제도 있지만, 당시 메이저였던 검도를 까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함으로써 수련자를 떼로 긁어모으고, 창작무술이 근본이었던 자신들의 취약한 기반을 가리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해동 측에서 다양하게 검도를 디스했지만 총체적으로는 3개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무술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늘 이 문제로 시끌벅적했다. 3개 주제는 다음과 같다.

2. 논점



2.1. 왜색논쟁


해동검도 측이 검도를 공격하는데 쓴 가장 큰 떡밥. 간단히 말해서 검도는 독립군 학살하던 침략자 일본군의 무술이고, 해동검도는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내려온 고유의 우리 검도라는 논리. 해동검도 측이 자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원천이자, 지금도 일부 유효 하다.
검도는 80년대까지 굳이 역사나 그런 것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수련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누가 봐도 일본 옷 하카마를 입고 죽도와 호구를 쓰기 때문에 반일감정을 굳이 자극해서 손해를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련자들이나 일반인들도 일본의 무술임을 잘 알았지만 국내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대다수 일반인들은 비싼 운동으로 알려진 검도보다는 쿵푸태권도, 합기도 같은 맨손무술을 더 배우려고 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도 그렇게 크지 않은 덕에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 부분을 당시 신생단체였던 해동검도가 크게 자극한 것. 특히 80년대는 국풍81 등 전두환 정권이 민족주의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던 때였거니와 지금보다 반일감정이 훨씬 심했기 때문에, 검도의 약점인 '쪽바리 일본무도를 배우지 말자.'는 슬로건을 해동이 터트리자 검도는 대내외적인 폭풍에 휩싸였다.
여기에 드라마 '무풍지대' 등으로 크게 이름을 알린 해동검도의 총재 나한일의 후광과, 고구려 전통 검술이라는 드립, 민족검도라는 드립에 의해 해동검도는 대대적인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대규모 사범 연수를 통해 적극적으로 세력확장에 나선 때도 이 즈음. 이후로 해동검도 수련자들은 2000년대 초반 나한일과 김정호의 분쟁 때문에 재판판결문이 해동검도의 진실을 파헤칠 때까지 이 점에 대해 자부심이 컸다.
당시 대한검도회장 이종림은 이런 후폭풍에 대응하고자 '검과 검술을 전해준 것은 우리나라인데,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했으므로 결국 검도는 우리가 준 것을 다시 되찾아온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국제검도연맹의 회원단체인 대한검도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제로는 무리수가 많다. 애초에 우리가 검과 검도를 일본으로 전파했다는 것은 말이 된다.[1] 설령 전파했다 해도 위 주장처럼 '일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검술은 영향받은 것도 서로 있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각 지방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검과 검술을 '일방적'으로 전수했다 가정해도, 이 때문에 검도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자충수이다. 그래서 검도인들 사이에서도 무리수 주장을 과감히 철회하고 당당히 일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대한검도회의 정책이 이종림 이사의 판단 하에 달려있으니 바뀌지 못하는 것이다.
이윽고 해동검도 내의 분쟁으로 벌어진 재판 과정에서 해동검도가 기천문심검도에서 갈라져 나온 유파이며, 해동검도의 실체는 '''현대에 만들어진 창작무술'''일 뿐. 지금까지 해온 고구려 기원 운운은 별다른 근거가 없는 개드립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해동이 자랑으로 삼던 베기술이 '''만주에서 민간인 잡아 칼로 베면서 베기술 연구하던 일본군 장교 나카무라 타이사부로'''가 창시한 나카무라류에서 유입되었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육군의 군도술'''인 군도의 조법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검도를 왜놈검술이라고 욕하던 자기들은 뒷구멍으로 '''조상들 목 베던 악질 왜놈 검술'''을 배우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매국노가 따로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2010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해동검도의 몇몇 관장들이 모여서 이 논리로 검도를 디스한 바 있다. 그러면서 여전히 전통검도인 해동의 장점을 역설했는데, 이미 창작무술임이 밝혀진 마당에 전통드립 치는 것이 병크로 공인되면서 지금은 개그 취급. 이 부분은 사람들이 그냥 나한일, 김정호와 그 무리들을 병신취급하며 진절머리를 치는 선에서 끝나서 망정이지 사기혐의로 집단 고소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고구려 검도라고 거짓말인지도 알수없다한 것이 바로 사기고 실제로 그런 줄 알고 해동검도에 와서 수련한 수련자가 그간의 수련비용과 정신적 피해보상 등등을 열거한다면...
하지만 이건 무술계의 허세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에서 정말로 전통으로 내려온 무술은 '''국궁, 씨름, 택견'''뿐이다.[2] 그래서 예전에 태권도도 지금은 사라진 수박 등에서 발전한 전통무술이라 했고, 가끔 한국이 세계 무술의 시작점이란 소리도 했었다. 예전엔 이런 이야기가 통했다. 보통 수련생들은 그 말을 믿었고 따로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일본에서 유래한 무술이 분명한 합기도나 대한검도도 우리나라 고유 무술이라고 칭했다. 현대에 와서 그런 소리가 많이 사라졌고 알 사람은 안다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고유무술이라고 가르치는 데가 많고 또 그걸 믿는 수련생이 많으니 무술계가 거기서 거기란 소리다. 다만 해동검도는 현대에 와서는 정보를 찾아 보기 쉬워져서 더 이상 이런 소리가 과거보다 잘 안 통하는데, 더구나 법정 싸움까지 가서 다 까발려졌는데도 아직도 사무랑이 뭔지 모른다.

2.2. 실전논쟁


역시 해동 측에서 내놓은 3대 빅떡밥. 해동 측은 자기들은 진검이랑 무거운 목검으로 수련하고, 격자부위를 한정하지 않았고, 치는 것이 아니라 베기를 하며, 보법이 자유자재고 운운하며 죽도랑 호구만 뒤집어쓰고 한정된 부위만 골라 툭툭 때리는 검도는 스포츠에 불과하며 실전성 면에서 해동검도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우월성을 내세웠다.
외적으로 보기에 격자부위를 한정하지 않고 진검이랑 목검을 씀이 좀더 실전에 가까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검도 측에서는 당장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반박하며 내놓은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현실사회에서 무슨 실전인가.
  • 격자부위를 한정하는 것은 그곳이 가장 가격하기 힘든 부분이며, 그 부분을 자유롭게 가격할 수 있다면 다른 부분은 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3]
  • 죽도가 가볍다니 빠른머리는 해 봤나?
  • 목검 무겁다더니 죽도랑 차이 없네.
그 외 다양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해동 측에서는 모두 비겁한 변명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실전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칭 <고구려 실전검술>이라는 자부심이 작용한 것도 있었다.
검도 측에서는 이런 해동 측 도발에 대해 기본적으로 무대응, 무시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타유파와 교류하면 파문한다는 규칙까지 제정했었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검도를 배웠으며 한국의 대한검도회 창설과 운영에 큰 역할을 한 남승희 선생이 타유파 인원들에게 교습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검도인들이 크게 아타까워했다. 남승희 선생은 이종림 이사가 주도한 벨트 도복, 준거폐지 등에 반발하며 규칙 몇 개 바꾼다고 일본색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남승희 선생의 입장에 동조하는 검도인들이 특히 안타까워했다.
당연히 해동 측은 자신들과 한번 제대로 붙으면 바로 깨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이라며 해동검도 총재였던 나한일/김정호는 대한검도회에 진검승부를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검도 측은 거절했고 해동은 더욱 의기양양.
그러나 지도부에서 금지한다고 해도 개인 단위로 해동 측과 대련을 해본 경우가 빈발했다. 비공식으로 행한 이런 개인 단위 시합에서 해동검도가 참담하게 깨졌다는 이야기가 점점 퍼져나갔다. 풍부한 대련 경험뿐만 아니라 발구름, 스텝, 체중이동, 그리고 무엇보다 실전검술에서 유래된 검도이기에 실전과는 조금도 관련 없던 해동검도가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검도 측은 격자부위를 제한시키고, 해동은 전신을 타겟으로 하도록 했으면서도 나왔던 결과. 물론 해동 측 수련자 일부가 검도 도장에 도전장을 냈다가 역관광탄 사례도 제법 있다고.
물론 이 정도로는 해동은 꺾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패배는 검도의 가벼운 대나무 막대기 때리기 장난질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 진짜 진검으로 하면 질 리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했다. [4] 물론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도 진정 실전성이 있는 무술이라면 죽도를 쓰든 진검을 쓰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점점 해동검도에서도 죽도와 호구를 쓰는 도장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숫제 검도의 연격을 하는 도장도 꽤 있다. 대나무 막대기 때리기 장난질은 필요없다더니 독자적인 대련술과 호구를 고안한다며 누가 더 빨리 때리나 하고 대련하며 세미나까지 여는 곳도 있는 상황.
지금은 폐간된 무술잡지 마르스에서도 해동검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발구름 때 몸 전체가 앞으로 나가질 않고 제자리에서 발만 움직인다는 등 지적을 했다.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해동검도의 실전성 우월감은 많이 퇴색되었다. 진검술 이해 문제에서도 검도인들 중 진검검리를 가르치는 검도의 본을 따로 연습하거나, 거합도를 따로 수련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더이상 진검 좀 만져봤다고 우월감 가질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해동의 검법이라는 것도 심검도기천문 등에서 차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장 창작이 다수인 해동의 검법이 고류 검술에서 실전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보기는 어렵기는 하다.

2.3. 베기논쟁


실전논쟁과 연동되는 빅떡밥. 해동검도가 검도를 깔 때 내세운 것 중 정통성은 왜색 떡밥, 검리에서 실전 떡밥이라면, 퍼포먼스에서는 베기 떡밥이 나왔다.
해동검도 동영상들을 보면 알겠지만, 퍼포먼스가 대부분 뭘 베는 식인데 보통 신문지, 짚단, 대나무 등을 턱턱 잘라댄다. 자를 때의 포스가 임팩트가 있고, 또 벤 다음에는 칼을 빙빙빙 돌리다 납도한다던가, 신선 뺨치는 가오를 잡으며(...) 다음 베기를 준비하는 등 오도방정을 떨며 마무리하기 때문에, 그냥 둘이서 있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게 팍 치고 끝나는 검도에 비해서 훨씬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쉽다.[5] 실제 이런 베기 영상에 혹해서 해동검도에 입문한 경우도 많다고.
해동검도가 자신있게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베기술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대한검도회는 죽도 검도와 더불어 제정거합, 그리고 120 cm정도의 봉을 쓰는 장도(杖道)까지 포함된 일본 전검련과는 다르게 죽도 검도만 계속 해 왔고, 검도에 포함된 진검형인 '검도의 본'도 잘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진검을 이해하는 것은 전무하다고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해동검도가 베기에서 노하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짚단도 대나무도 베어본 적이 없어 해동검도가 진검베기를 주제로 태클을 걸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과도한 퍼포먼스적인 면을 지적하는 정도가 고작. 당연히 해동은 진검으로 베는 것이야말로 검술의 본질이라며 의기양양했고, 실전성 떡밥과 맞물려 넷상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논쟁에서 해동검도의 큰 무기가 되었다.
사실은 해동검도의 베기술은 일본 나카무라류의 베기술이 유입된 것이었다. 비천 이영식은 진검술을 추구하다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보고 연구하여 베기술을 터득했고, 나중에는 나카무라 타이사부로에게 직접 사사받아 나카무라류를 배워 그 정수를 배웠다고 한다. 이영식의 단체가 도법협회였는데, 여기서 베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80년대 말~90년대 초 한창 해동검도가 세력을 늘려갈 때 사범으로 영입되거나 들어갔다. 이들이 해동검도의 뛰어난 베기술을 정착시킨 장본인들이다. 초창기 해동검도의 베기는 매우 형편없었다고 한다. 현재도 해동검도 도장 중에서는 토야마류의 형을 가르치는 곳이 간혹 있는데, 이런 곳이 바로 도법협회 출신 사범들이 운영하거나, 영향을 받은 곳이다.
이들이 들어와 베기술을 정착시킨 것은 좋았지만, 퍼포먼스적인 면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나카무라류의 베기술의 본질에서도 멀어졌다. 짚단을 베어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무협지적 퍼포먼스도 추구하다 보니 삼각도라는 괴랄한 도검을 만들어내기도 즉 실전을 위한 베기가 아닌, 베기를 위한 베기가 되어버린 것.

3. 이후


대한검도회 측에선 그동안 죽도검도에만 신경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던 검도 측이 거합이나 검도의 본, 베기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거보다는 진검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왜색 논쟁을 겪으며 검도의 정체성을 숨기기보다는 차라리 확고히 하는 편이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해동의 자폭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도 있다. 특히 해동은 협회가 수없이 분열하여 세력이 축소, 더 이상은 검도 측에 대항할 여력이 없어졌다. 가끔씩 해동이 던지는 전통검도 드립은 이미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엉성하게 복원한 조선세법이나 준거폐지, 벨트 도복이나 검도 한국기원설[6] 등 무리수로 검도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많다. 왜색 논쟁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종림 이사가 내놓은 대책이지만, 내외적으로는 눈 가리고 아웅이며 오히려 검도의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많다. 조선세법만 해도 검도의 검리에 맞춰 복원하느라 무예도보통지의 기록과 달라진 점이 많고, 검도인들은 검도의 시각에서 공공연하게 '검리와 맞지도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검도에 삼대논쟁을 걸어 흥했던 해동은 지금은 삼대논쟁에서도 패배하고 대대적인 협회분열, 게다가 나한일 총재의 공금유용 건까지 합쳐졌고 무술시장도 불경기인지라 관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고 한다. 더군다나 인터넷에서의 떠돌아다니는 여러 진실들 때문에 인식도 나빠진 상태.

4. 관련 문서


[1] 검술 또는 무술이 발전한 나라들은 지방분권화된 역사를 오랜 기간 유지하였고, 과거에 난립한 세력들이 서로 싸워가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무도를 발전시켰고 실전에서 피를 흘려가며 실전성을 검증했음이 특징이다. 검도 또한 그 모태가 되는 북진일도류의 수련방식에서 계승된 것이다. 다른 유파에서 이런 죽도수련방식을 비웃으며 도전해왔다가 개박살이 난 역사를 보면 실전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증된 수련방식이다. 따라서 중앙집권적 형태의 한반도 역사를 보면 무술이 크게 발전할 수 없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2] 검을 쓰는 병과가 조선초기 이후로 사실상 몰락했기에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검법을 들여오고, 항왜들에게 일본식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3] 격자부위가 머리, 허리, 손목인데 (목은 찌르는 것이니 제외) 머리는 칼 맞으면 즉사이고 허리는 최소 치명상, 손목은 무장해체가 된다. 거기다 머리는 높이, 손목은 칼 바로 위쪽, 허리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기에 타격이 힘들다.[4] 흥미롭게도 이러한 '진검승부면 우리가 이긴다.'는 변명은 검도의 모태가 된 북진일도류가 타 유파를 시합에서 박살낼 때마다 들었던 변명과 똑같다. 북진일도류는 암살과 테러가 난무하는 혼돈의 막부말, 후대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명검사들을 배출함으로서 죽도시합으로 단련된 실력은 실전에서도 여전히 유용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실전으로''' 증명하였다. 이전까지 죽도 검법은 실전에선 안 통한다느니 진검이면 우리가 이긴다느니 지껄이던 타 유파 검사들은 그저 데꿀멍.[5]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검술은 실전성보다는 멋을 추구한 모습이 대부분이니, 그런 영상에 길든 대중들의 눈으로 보기에 더 멋졌던 것도 있다. 물론 이런 검술이 실전성으로는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6] 해동검도의 역사왜곡 사기랑 똑같은 수준이다. 대한검도회 주장대로 고대 한국에서 기원했을지라도 일본에서 천 년이 넘게 가다듬어진 검도를 한국 전통무술이라고 할 순 없다. 차라리 한국무술임을 주장하고 싶으면 일본 전검련 가맹국에서 탈퇴하고 기술 체계를 갈아엎어서 완전 독자 노선을 걸으면 된다. 그런데 일본 검도의 가맹국으로 등록은 해놓고 한국무술 타령이니 이 얼마나 앞뒤 안 맞는 행보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검도회는 영향력이 일본 전검련 다음 2위이고, 세계적인 경기를 개최하면 일본계와 한국계 나라들로 양분화되는 현상까지 발생하니 기가 찰 노릇. 일본과 대한검도회 간 마찰이 있자 일본계 국가들이 대부분 불참했던 국제경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