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응상

 


桂應祥
1893년 12월 ~ 1967년 4월 25일
1. 소개
2. 생애


1. 소개


일제 강점기의 섬유 공학자, 농학자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농학자, 유전학자, 잠사학자이다.
북한 내에서 저명한 유전학자이며, 한 평생을 농학 연구에 헌신한 학자이기도 하다.
북한 체제 내에서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에 배치된 학설을 펼쳤고, 실제 리센코와 유전학 분야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남북대치 상황으로 인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학자이지만, 국제 유전학계에서 계응상은 꽤 인정 받는 세계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893년 1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석산리에서 화전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전을 일구었으나 10대 후반 무렵 마을의 서당을 다니게 되었고, 서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8세가 되는 해에는 공부를 해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경성부로 상경하여 오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각종학교였던 오성학교를 1916년 졸업하고,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겠단 생각에 무작정 도일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관립전문학교와 제국대학에선 오성학교 학력이 인정되지 아니하였고, 그나마 오성학교 학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준 사립 우에다(上田)잠사전문학교에 1917년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1910년에 설립된 신생 사립전문학교였기에 입학생을 폭넓게 받았다 한다. 이 전문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계응상은 규슈제국대학 농학부에 편입하였다. 계응상이 이 대학에 편입하던 해 농학부가 신설되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편입생을 선발했고 계응상은 수월히 규슈제국대학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3년간 더 수학한 후 차석으로 졸업했고, 곧바로 도호쿠제국대학 농학부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6년만에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기 가계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에 고학을 했고, 이 때 굉장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신문배달, 식당 종업원, 청소부, 경마장 청소 등 온갖 잡일을 해 돈을 모아 학비를 댔다. 하지만 그는 기업체나 관청에 들어가기보단 학자가 되겠단 일념뿐이었고, 그러한 일념이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은 아무리 박사 학위가 있다하더라도 제국대학의 교원이 될 수 없었고, 일본의 관립 전문학교의 강사 자리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조선 내에도 고등 농업 교육기관이라곤 수원고등농림학교숭실전문학교 농과 정도였는데, 이곳에선 남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계응상은 아예 중국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1930년 5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광동중산대학 유전학과 교수를 지낸다. 여기서 그는 서구의 현대적 유전학과 중국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을 접하며 일본의 폐쇄적인 학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의 전황이 심각해지자 그는 중산대학의 강단을 떠나 베트남 하이퐁, 하노이, 사이공 등을 전전하다 중국의 홍콩을 거쳐 결국 1940년 조선 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계응상은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 자리를 얻게 되고 여기서 식민지인텔리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잠사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사실 이정도 스펙만 보더라도 계응상은 당시로서 주목받는 신성 농학자였고, 남과 북 모두에게서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단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고[1], 이를 교묘히 활용한 북한 당국에 설득되어 1946년 월북하게 되고, 그갸 평양역에 도착하는 날 김일성이 직접 역 플랫폼에 나와 계응상을 맞이한다.
월북한 이후에는 원산농업대학 강좌장(학과장)에 임명되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중앙잠업시험장의 기관장을 겸직하게 된다. 계응상은 자신의 학설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1930년대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 세계 유전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트로핌 리센코의 환경유전설과 혼합유전설을 부정했다. 일견, 관점에서야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리센코와 계응상의 지위는 하늘과 땅이었다.
리센코는 소련의 국가 과학원 원사, 국가 유전학연구소 소장, 국가농업원 원장 타이틀을 모두 쥐고 있고, 또 소련 내의 정치력까지 쥐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고 계응상은 일개 농업대학의 촉망받는 학자에 불과했다. 즉, 리센코의 학설에 반기를 든 계응상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권 농학계의 비난과 북한 농업 당국의 행정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북한 농학계 내에서 리센코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가자 소련의 언질을 받은 북한 농업 당국에서 칼을 빼들고 중앙잠업시험장의 기관장 자리에서 계응상을 해임하고 곧이어 교육성에서도 계응상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이러한 소식이 김일성에게까지 들어갔고, 김일성이 어디서 뭘 잘못 먹었는지 왜 학자의 신념을 짓밟으려 하냐면서 계응상을 원래 직책에 복직시켰다.
당시 계응상이 비판 받은 명목은 소련 내에서 부르주아농학이라 규정한 서구유전학을 따르며, 모건 유전학 실험의 주요 소재였던 초파리 유전학 강의를 진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김일성이 제동을 건 것이다. 만일 여기서 김일성이 제동을 걸지 않았으면 북한 내에 리센코의 학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농업이 더 빨리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김일성의 옹호를 받은 계응상은 리센코의 학설을 더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베이징 세계유전학대회에서 아예 대놓고 리센코의 농업 이론을 따르면 소련 농업은 붕괴될 것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고, 소런의 국가 과학원에서 이 문제를 놓고 리센코와 직접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추대되는 등 출세 일도를 달렸으나, 1967년, 4월 25일, 그것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북한에선 교통사고가 극히 드문 일이고, 특히 4월 25일은 인민군창건일인 북한의 명절이다. 일각에선 계응상의 정치적 가치가 사라지고 소련과의 관계에서 입안의 가시같은 존재이니 제거해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하튼 북한에선 계응상의 농업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하며 1990년 사리원농업대학의 명칭을 계응상농업대학으로 개칭했고, 이 대학은 2010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1] 실제로 이 시기 조선 내에서나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단 이유로 비난 받는 학자들이 많았다. 문제는 이런 학자들은 권력이나 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비호를 받지 못했고 그러한 비난을 그대로 받아야했다. 이러한 비난은 반민특위가 조직되자 더욱 거세졌고 리승기, 리경식, 려경구, 채희국 같은 이들은 끌려가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격국 이런 무분별한 비난에 빡돈 당시 학자 계층 상당수가 1946년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북한으로 넘어가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