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핌 리센코
1. 개요
구 소련의 과학자.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소련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 중 한명이었으나, 잘못된 이론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을 수십년 후퇴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소련의 떠오르는 과학자
19세기 말에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달리 눈에 띄는 행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후 1928년 미추린(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чурин)이란 육종학자의 연구를 계승하여, 춘화처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춘화처리'(春化處理)[2] 는 보리, 밀처럼 겨울철 휴면을 거쳐야만 하는 종자들을 인위적으로 저온 처리하여 휴면 없이도 정상적인 발아가 이루어지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농업 외에도 원예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튤립과 같은 화훼의 경우, 전 해에 꽃이 피고 진 구근이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겨울을 겪지 않으면, 피라는 꽃은 안 피고 잎만 무성하게 나거나, 아니면 괴이한 형태의 상품 가치가 없는 기형 꽃이 피게 된다.[3][4]
본래 춘화처리는 리센코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이 경험상으로 알게 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겨울밀(가을에 심어 여름에 거두는 밀)을 억지로 봄에 심으면 이삭이 패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춘화처리를 거치면 겨울밀을 봄에 심어도 정상적으로 이삭이 패므로 수확이 가능하다.
2.2. 소련의 농업을 망친 과학자
그런데 리센코는 '''용불용설을 지지'''했다. 그는 한 세대의 벼에 춘화처리를 해놓으면 그 다음 세대부터는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심어도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당연히 이런 연구 결과가 소련 농업 발전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딱 소련이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소련 농업이 개판 5분 전 상황일 때 리센코의 이론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1933)이 진행되면서 소련 농업부는 바빌로프의 유전학보다는 단기적으로 생산량을 높일 방법을 찾았고, 리센코의 이론은 거기에 딱 적임자였다. 농업체제 전환의 부작용과 리센코의 엉터리 이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소련 농업은 1980년대까지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5][6]
2.3. 어용학자, 소련 과학계의 정점에 서다
그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과학자였다. 왜냐면 리센코는 당시 소련 과학계에서 이만큼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도 드물었던데다가, 출신 성분도 '부르주아'의 아들인 바빌로프와 달리 일반 농민의 아들로 우수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센코이즘의 사상적 베이스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인데, 용불용설에 따르면 부모의 후천적 유전형질이 자식에게 유전된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변증법에 의거하여 이에 따라 새로이 공산주의적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리센코이즘은 어찌보면 공산주의를 자연과학적으로도 일견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결과적으로 그는 과학자로서 실수를 잔뜩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소련 생물학계의 정점으로 올라섰다.'''[8] 그리고 그의 큰 권력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2.4. 바빌로프를 숙청하다
당시 소련에는 유전학이 큰 화제를 불러왔는데, 그 연구의 선도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진화생물학의 종주국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전학을 유학하고 유전학을 재배식물에게 적용시켜 많은 연구결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바빌로프는 한때 소련 농업과학아카데미의 총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센코는 바빌로프의 유전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리센코는 유전학 이론을 연구 결과로 반박하기보다는 선천적인 유전자를 중시하는 유전학이 반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며 바빌로프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을 부르주아나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데 치중했고, 스탈린 역시 극도의 소련 국가주의자였던 터라 외국 학문이었던 유전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빌로프는 대숙청의 피바람에 휘말려 감옥에 갇힌 뒤, 1943년에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와 동시에 멘델 등의 생물학자들의 이론이나 소련의 유전학도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낙인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본보기로 리센코는 스탈린과 정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과학계의 독재자가 되었다. 이미 과학보다는 유사과학에 가까웠던 그의 이론에[9] 반대하면 반동분자나 파시스트로 몰려 큰일을 당했으므로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감히 반대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생물학 연구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소련의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바빌로프가 숙청되기 전에 남겨놓은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들을 과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보전된 게 이 정도였으니, 만에 하나 실험국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하기라도 했다면 소련의 파멸은 실제보다 훨씬 더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2.5. 스탈린 사후
바빌로프의 숙청을 초래한 그의 권력 자체는 스탈린이 죽으면서 그 위세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흐루쇼프도 생물학에는 무지했던지라 그의 이론은 1950년대 말까지도 쓰였다. 대체적으로 생물학에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않았던 소련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그의 엉터리 이론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이걸 농업에 접목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결국 흐루쇼프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시베리아-카자흐스탄 지역의 처녀지 개간 운동이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야 리센코와 그의 이론은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소련 과학계에서 퇴출되었고 유전학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소련 농업에 남긴 상처는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으며, 결국 이는 현재의 러시아의 농업에도 상당한 악재로 남고 말았다.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여튼 1964년부터 러시아 과학계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1965년에 모스크바 유전학 연구소장직을 사임하면서 반 강제로 과학계를 떠나게 된다. 그후 1976년에 모스크바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는데 소련 정부는 그의 죽음을 이틀동안 비밀에 부쳤다가 사망 사실을 발표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쿤데보 공동묘지에 뭍혔다.
3. 영향
리센코식 용불용설은 타국에까지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애초에 소련 체계가 극도로 경직되지 않았다면 이런 과학자의 탈을 쓴 사기꾼이 이 정도로 거대한 영향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니, 소련 체제가 가진 모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소련에도 유능하고 훌륭한 과학자는 많았다.
이 사람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일단의 경향을 리센코주의(Lysenkoism)라 한다. 굳이 유전학 등이 아니라도 사이버네틱스 공학이나 비교언어학 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스탈린 시대에 들어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
중국에서도 첸쉐썬이 농업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벌이긴 했다. 이 사람은 생물학자도 아니었으면서 리센코의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였다. 그래도 첸쉐썬은 자기 본업인 로켓 공학에선 천재이기라도 했지 리센코는 자기 본업인데도 말아먹었다. 그런데 정작 리센코는 자기 자신의 이론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냉소했다.
4. 그 외
소련의 농업을 영구히 망쳐놓긴 했지만 농사 기술과 실무적 지식은 대단했다. 애초에 그런 실력이 없었으면 소련 생물학계의 1인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농업 실무쪽에만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최신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진화론의 발전을 게임북 형식으로 놓은 <진화론 300년 탐험>이라는 책에서는 리센코를 고집스레 쫒아가는 선택지를 고르면 바로 게임 오버가 된다. 그렇다고 발을 들여놨다가 탈출하고자 하면 바빌로프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면서 역시나 게임 오버다.
소빠 사이에서도 소련 농업 폭망의 원흉으로 두고두고 까이는 인물이다.
러시아 애호가로 유명한 일본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가 리센코를 소재로 한 노래 "어째서! 루이선생님"(どうして!ルイ先生)[10] 를 발매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소극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옳았다는 것은 아니고 '상식적으로 소련 같이 거대한 국가의 기반사업을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게 말이 되냐?'라는 것. 즉 트로핌 리센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건 소련 지도부 전체가 져야하는 실책인데 리센코 개인을 총알받이로 삼아 자신들은 빠져나갔다는 식이다.
[1] 현재의 우크라이나 폴타바 주.[2] 러시아어로 'яровизация'(야로비자치야)라 한다.[3] 참고로 최근 식물학에서는 춘화처리는 영어로 'Vernalization'이라고 하며 성장한 식물이나 구근을 저온에 두어서 꽃눈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과정에 한정한 용어이고, 씨앗의 발아를 돕기 위한 저온 처리는 층화처리(Stratification)라고 따로 해서 구분한다.[4] 이런 저온처리의 가장 극적인 예는 바나나의 종자를 영하 60도에서 장기간 처리해 온대지방인 일본에서 바나나를 재배할 수 있게 한 몬게 바나나의 예이다.[5] 일부 예외도 있었지만... 김병화 항목 참조.[6] 여담으로 이 때의 농업정책 실패 때문에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별장(다차)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소련의 별장은 고위층들이나 유명인들에게 배급되는 별장을 빼면 주말농장에 가깝다). 물론 1가구 1별장 정책은 흐루쇼프가 소련의 이미지를 대외에 선전하면서도 일반인들에게 부자나 특권층의 상징인 별장을 배급해야 되겠다는 의미로 시행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선채소류의 수급이 지속적으로 원활하지 못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주말시간이나 휴가를 이용해서 경작을 해서 식량수급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했다.[7] 사실 이러한 설은 엥겔스 생전에도 자연과학에 변증법을 적용하려는 등의 형식으로 존재했다.[8] 이렇게 공산주의나 좌익 사상을 일종의 생물학적 형질로 취급해서 좌익을 아예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보려는 시도는 이 시기 극좌나 극우나 같이 공유했다. 소련 당국의 경우 새로운 형태의 소비에트 인간(homo sovieticus)를 문화적, 사회적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대대적 선전 작업을 통해 이를 퍼뜨리려고 했고, 반대쪽에서 나치를 비롯한 파시스트들 또한 좌익 사상에 물드는 건 '''유전학적 결함에서 비롯된 정신병'''으로 취급하여 탄생한 게 스페인에서 일어난 프랑코 정권의 대규모 고아 납치 프로젝트였다.[9] 위에 언급한 용불용설이나 반유전학 이론 뿐 아니라 작물을 빽빽하게 심으면 농사가 잘 된다는 밀식 농법도 그의 작품이다.[10] 일본어 표기로는 '루이센코'(ルイセン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