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에 관한 문서이다.
2. 정부 체계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들은 파트리키(Patricii)라는 귀족과 플레브스(Plebs)라는 평민으로 나뉘었다. 왕정이 무너진 뒤 이것을 주도한 브루투스는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consul)을 뽑아 통치를 맡기는 방식을 고안해 내고 이것은 로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집정관은 연임을 무한히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모든 현안을 그들의 재량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집정관을 독식하자 또 다른 왕정으로 변신하게 될 것을 우려한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이 연임을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 집정관은 경험이 없는 뜨내기가 맡는 직위가 되어버렸고, 집정관들은 주로 집정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엘리트 집단인 원로원의 조언을 듣고 일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므로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비대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감찰관의 권력은 매우 강했는데 이 감찰관은 원로원의 의원들 중 명망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대(大) 카토도 감찰관의 직책을 오랫동안 수행하였다. 이렇듯 원로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었으므로 이 원로원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시피 하였고 따라서 공화정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지게 된다.
그러나 집정관의 권력이 원로원으로 넘어가도 군사 지휘권(Imperium)은 집정관의 고유 권한이였으며, 이것만큼은 원로원이 좌지우지 할 수 없었다. 집정관들은 선출되자마자 두 개의 군단(각각 4천 명씩 8천 명)이 주어졌고 해마다 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로마의 사정상 집정관은 주로 전선에 나가 있는 일이 잦았다. 집정관들은 실질적인 권한이 원로원에게 넘어갔어도 그들이 군사를 통솔해서 싸운다는 것에 열중하였으므로 그다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은 행정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관은 군단을 지휘하느라 로마에 머무는 일은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에 남아 집정관 대신 행정 업무를 처리할 직책이 만들어진다. 이를 법무관이라고 한다. 법무관직 역시 초기에는 로마 시를 담당하는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마
법무관 아래엔 건축물과 도로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있는데 이를 안찰관(조영관)이라 한다. 안찰관은 원래는 평민만 선출될 수 있었으며 하술할 호민관을 보조하고 케레스 신전을 관리하는 일을 했으나, 이후에 공공 사업, 시장,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리하도록 권한이 확대되었다. 이후에 두 명의 귀족 안찰관이 더 추가되었으며 이들은 명령권을 보유한 상위 안찰관이었다.안찰관 아래엔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이 있다. 위의 직책들은 순서대로 역임하여야 하고 이를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린다.
주로 상부에서 임명하는 일반적인 관료 사회와는 달리 로마 공화정에선 저 직책은 모두 선거로 당선되어야만 맡을 수 있다. 또한 로마는 특이하게 상부의 결재를 받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담당관의 재량으로 이루어 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즉 안찰관이 법무관보다 권위가 낮은 직책이긴 하나 안찰관은 법무관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으로 건물을 수리하거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관료제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피라미드식 조직이 아니라 각각 담당 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선출직 행정관인 것이다.
처음에 이런 집정관, 법무관 등은 귀족에서만 선출되었으나, 로마 초기의 평민 반란 이후에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동등해지면서, 호민관 리키니우스의 주장으로 그 수의 절반을 평민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다만, 집정관직의 경우는 기원전 367년까지도 파트리키 귀족만 선출될 수 있었다. 평민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귀족들은 대대장(tribunus militum) 6명[1] 에게 집정관급 권위를 부여해 통치하게 하는 일명 집정 대대장(Tribuni militum consular potestae 혹은 consular tribune)이라는 관직을 만드는 편법으로 집정관 직에 선출될 권리를 귀족들만의 특권으로 유지했다. 이러한 '집정 대대장' 직위는 기원전 366년 평민도 집정관직을 지낼 수 있게 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Lex Licinia Sextia)법이 통과되면서 사라진다.
3. 민회 제도
로마에는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부족회 또는 트리부스 민회(Comitia Tributa),그리고 평민회(Comitia Plebis Tributa)의 총 4개의 민회가 존재하였다. 쿠리아 민회에서는 정무관에게 명령권(Imperium)을 부여하고 입양이나 제사장의 취임 등의 결정을 내렸으며 켄투리아회에선 정부 관료를 선출하는 역할을 하였다.[2] 또한 트리부스 민회는 귀족 안찰관과 재무관,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선출하였고, 술라의 개혁 이전까지는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평민회는 호민관과 평민 안찰관을 선출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쿠리아 민회는 알려진 로마 민회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왕정 시대 초기부터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인들을 람네스(Ramnes), 티티에스(Tities), 루케레스(Luceres)라는 세 개의 트리부스(부족)으로 조직하였고 각 트리부스는 10개의 쿠리아로, 쿠리아는 10개의 겐스(씨족)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쿠리아별로 투표권을 부여받은 민회가 쿠리아 민회이다. 왕정 시대에는 애초에 왕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공화정 시기로 넘어가면 하술할 켄투리아회와 이후에 등장한 평민회, 트리부스 민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갔기 때문에 쿠리아회는 각각 30개 쿠리아를 대표하는 30명의 릭토르(lictor)[3] 들의 모임으로 크게 축소되었고, 권한도 켄투리아회가 선출한 정무관들에게 형식적으로 명령권(Imperium)을 부여하거나 사제단을 선출하는 등의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약화되었다.
켄투리아회는 기원전 6세기경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로마 시민들을 재산 수준으로 구분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 분류는 총 5개였고 재산이 많은 순으로 1계급에서 5계급으로 분류되었다. 이렇게 분류된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백인대(centuriae)라는 단위 그룹에 각각 배정되었으며, 초기에 하나의 백인대는 100인으로 구성되었고 로마 군단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백인대도 여기서 비롯하였다. 따라서 이 백인대 분류에 기초를 둔 켄투리아회는 본래 군사 단체였고, 군대를 지휘하는 명령권을 지닌 정무관의 지시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포메리움 밖의, 군대가 집결하는 마르스 평원(campus martius)에 모였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야니쿨룸 언덕[4] 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5]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화정이 발전하고 로마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한 백인대에 100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속하게 되면서 백인대들은 더 이상 군사 징집의 기초 단위가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켄투리아회는 여전히 존속했으며 여전히 경제적 능력에 따른 5개의 계급(+무산계급)으로 구분되었고, 법률 제정 및 수정과 정무관 선출, 살인이나 반역죄 재판, 조약 체결 등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켄투리아회에서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투표 방식을 썼다. 우선 모든 시민을 193개의 백인대에 할당하였으며 각 백인대는 각각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즉 각 백인대에서 시민들끼리 서로 거수 투표를 하여 우세한 의견이 그 백인대의 의견이 되고 그 뒤 193개의 백인대들의 의견을 비교하여 과반수가 승리하는 방식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백인대에 시민들을 할당할 때 상술하였듯이 재산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였다. 재산의 양은 이미 감찰관에 의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서를 토대로 시민들을 분류한 것이었다. 이때 각 백인대당 자산 요구량은 거의 비슷한 범위로 세분화 되어 있었으므로 부유층에 해당되는 그룹으로 가면 갈수록 그 백인대에 포함되어 있는 시민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가장 부유한 그룹의 경우 고작 20명에서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무산자의 경우 한 백인대에 수천 명이 있었다.
그런데 켄투리아회에선 한 백인대가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므로 이 20명의 한 표와 수천 명의 한 표는 같은 비중이었다. 또한 상위 그룹부터 투표를 하고 과반수가 지나면 투표가 종료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8개의 기사계급(에퀴테스) 백인대와 80개의 1계급 백인대만 해도 총 98개로 과반수인 97개를 넘겼고, 부유한 1계급 시민들의 의견들만이 투표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이런 투표 방식은 기득권 층에 엄청나게 유리하였으며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공정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기원전 241년경 켄투리아회에 대한 개편이 있었다. 원래 총 193개의 백인대는 기사계급 18개, 1계급 80개, 2계급 20개, 3계급 20개, 4계급 20개, 5계급 30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에 5개로 배분되었다. 상술했듯이 기사계급 및 1계급이 과반수 이상의 98개의 백인대를 보유했기 때문에 켄투리아회에는 2계급 이하의 시민들의 의중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 점점 힘을 얻던 부유한 2계급 계층들의 불만을 샀다. 따라서 1계급~5계급까지에 각각 70개씩의 백인대를 배정해 그 총수를 373개까지 늘리는 개편안이 생겼다.그러나 전통에 따라 표수는 193개를 유지하기로 했고, 하위 4개 계급의 백인대들은 2~3개 백인대가 하나씩의 투표권을 가지면서 총 100표에 무산계급의 표까지 더하면 105표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반면 기사 및 1계급은 기사들의 18표+1계급의 70표로 88표의 투표권만 가져갈 수 있었다. 이 개편안으로 켄투리아회에서 기사계급 및 1계급이 누리던 절대적인 우위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새로 켄투리아회에 의중을 반영할 수 있게 된 2계급 역시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1계급과의 의견차는 적었고 하위계층의 의사반영은 여전히 요원하였다
이러한 불공정한 점 때문에 평민들은 그들만의 민회를 따로 만든다. 평민회가 그것이다. 평민회는 성산 사건을 통해 평민들이 얻어낸 권한으로 무엇보다도 호민관을 선출하여 원로원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갖게 되었다. 평민회는 호민관들이 소집하고 주재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안찰관(단, 후대에 창설된 고등 안찰관은 제외) 역시도 소집할 수 있었다. 평민회는 4개의 도시 트리부스와 31개의 농촌 트리부스로 확대 개편된 트리부스 단위로 투표하였다. 초기에 평민회의 결의안은 켄투리아회의 재가를 받지 못하면 법으로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87년에 독재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통과시킨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에 의해 평민회의 결의는 켄투리아회의 승인 없이도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평민회가 창설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부스회 역시 창설되었다. 트리부스회 역시 평민회와 마찬가지로 트리부스 단위로 모이고 투표하였으며 명령권을 지닌 정무관이 소집했고, 법안을 제정하고 재무관들과 고등 안찰관,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선출하였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지나친 선거비용과 황제의 권력 강화하기 위해 민회와 평민회는 모두 폐지된다.
4.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
원로원 계급의 로마인들은 이러한 순서로 관직을 밟아 나가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과정과 최소 연령 단계는 대대장(Tribunus Militum)[6] -재무관(Quaestor)(30세)→안찰관(Aedilis)(36세)→법무관(Praetor)(39세)→집정관(Consul)(40세)→감찰관(Censor) 순이다. 원래는 연령 제한이 없이 20대에 집정관에 선출되는 것도 가능했지만 또 다른 야심가가 나타나 공화국을 위협하게 될 것을 걱정한 술라의 조치로 인해 최소 연령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의 경력 외에도 평민만 가질 수 있던 10석의 호민관(Tribunus Plebis), 그리고 두 석의 평민 안찰관(Aedilis Plebis) 직위가 있다. 호민관은 재무관, 안찰관보다 더 높은 경력으로 보았다. 다만 호민관 및 평민 안찰관은 평민만을 위한 것이라고 봐서 명예로운 경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로마 귀족에게 있어 300석밖에 없는 원로원에 진입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영예였는데, 당연히 그런 만큼 원로원 의원이 되는 건 매우 힘들었다. 우선 최소한 저 위의 관직 중 하나를 역임한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 관직 하나 하나가 죄다 '''선출직'''이라 수많은 경쟁을 뚫고 당선해야만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고 자리는 한정되었으니 당연히 '''선대 의원이 사망해야''' 공석이 생긴다. 원로원은 5년 주기로 뽑았는데, 매 선거마다 평균적으로 공석이 2~30석 정도 생겼고, 명예로운 경력을 밟던 자들 중에 원로원의 감찰관이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해 통과한 사람만이 원로원 의원이 된다. 그나마도 법무관 8명, 집정관 2명이 우선적으로 원로원이 될 자격을 심사받는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호민관이 되면 자동으로 원로원 입석이 주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로원의 수는 술라의 개혁 이전까지 300석에 불과하였다. 5년마다 공석이 20~30명 가량인데 법무관과 집정관이 합쳐서 매년 10명이니 5년이면 50명이다. 다만 집정관이나 법무관 정도면 이미 원로원 의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결국 20석 정도가 다른 하위 관직을 역임한 사람에게 개방된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중 호민관은 해마다 10명씩 뽑으니 지난 5년간 뽑힌 호민관만 50명이다. 따라서 백여명이 넘는 호민관 경력자와 다른 명예로운 경력을 밟던 자들이 고작 20석 가량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라 실제로는 호민관이 되어도 원로원에 입석하는 걸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7]
물론 위의 상황은 공화정 후기의 일이고, 공화정 초기에는 호민관은 두 자리 또는 다섯 자리, 법무관은 한 자리였으니 그 시절에는 호민관이 되면 꽤 높은 확률로 원로원 편입이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원로원 정원이 300명이 아니라 200명이긴 했다.
때문에 로마 귀족들의 공직에 선출되기 위한 노력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지금의 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유권자에 대한 매수가 횡행해 로마 말기로 진입하면 로마의 정치가들은 매우 부유한 귀족이 아닌 이상 엄청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엄청난 빚을 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이러한 선거를 여러 번 거치면서 생긴 빚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틸리나 역모 사건의 주역인 카틸리나도 카이사르와 맞먹는 빚을 지고 있었으며, 또 쿠리오는 고작 호민관에 불과하였으나 집정관 때의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빚을 진 것으로 유명하였다.
어떤 정치가들은 눈부신 군사적 성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인기를 모아 출세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 29세라는 어린 나이에 집정관이 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뛰어난 군사적 능력 때문에 집정관을 7번이나 역임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대표적이다.
5. 관련 문서
- 황제(임페라토르) - 제정시대부터
- 원로원
- 민회
- 독재관(Dictator;딕타토르)
- 집정관(Consul;콘술)
- 호민관(Tribunus Plebis;트리부누스 플레비스)
- 감찰관(Censor;켄소르): 본래 선거, 조세, 병역을 위한 인구조사(census)를 수행하는 직책으로 임기는 4~5년, 켄투리아 회에서 두 명을 선출하였다. 초기에는 단순 사무직에 가까웠으나, 정치참여의 기반이 되는 병역 능력, 재력 등을 평가하는 임무였기에 점차 실권을 획득하여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는 권한, 품행이 로마의 도덕 기준에 미달하는 의원을 제명하는 권한, 품행이 좋지 않은 시민의 시민권을 최대 5년 간 박탈할 수 있는 권한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어 뒷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감찰관이라는 역어의 근거가 된 원로원과 각종 기금의 예산에 대한 감찰권, 각종 공공사업의 계약서 작성 등을 맡아 정치-재정을 아우르며 명예로운 경력의 가장 마지막 임지로서 장례 때 왕정 시절 왕만 가능했던 보라색 수의를 입는 영전을 받았다.
- 법무관(Praetor;프라이토르): 본래 40세 이상 6명이 선출되었으나, 술라의 개혁 이후로는 8명이 선출되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에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 됨으로서 잠시 정원이 60여명(!)까지 늘어났다. 이후 내전이 종결된 후에는 다시 정원 8명으로 돌아갔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30세 이상으로 자격이 완화되었고, 단순한 명예직이 되었다.
- 안찰관(Aedilis;아이딜리스): 조영관이라고도 한다. 본래 호민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케레스 신전의 관리인이었던 이들은 케레스 신전에서 장이 열리며 평민 대상 주요 선거 유세지가 되자 중요도가 오르면서 다양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후대에는 경찰, 도로, 공중 목욕탕, 음료수의 관리, 식량 공급, 축제나 각종 행사의 운영과 공급까지 늘어난다. 평민회에서 호민관과 함께 평민 둘만 선출했으나 로마 시가 확장되는 기원전 3세기에 귀족 포함 조영관[8] 둘이 추가되어 총 4 자리로 늘었다. 바로 이 직위에서 카이사르가 경기를 주최해 인기를 모았다.
- 재무관(Quaestor;콰이스토르): . 초기에는 집정관이 임명하는 2명의 귀족 한정 보좌관이었으나 B.C 421년 4명으로 늘면서 명목상으로 평민에게 열렸지만 B.C 409년에야 최초의 평민 재무관이 임명되었다. B.C 287년에 비로소 트리부스 인민회 선출직으로 바뀌면서 쿠르수스 호노룸의 등용문이 되었다. 당초의 업무는 살인죄 조사였으나 경제범죄(주로 조세사건) 조사, 군대 행보관, 국고-신전 기록 관리자[9] 로 영역이 늘었다. 둘이 집정관을 따라 행보관, 둘이 도시 업무를 맡았다. 삼니움 전쟁과 라티움 전쟁을 거치며 이탈리아를 통일하자 행정 소요가 급증하면서 기원전 267년 10명으로 인원이 증가했다.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이후에 코르시카-사르데냐, 시칠리아,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아시아 속주를 설치하며 발생한 속주 총독 행정 수요와 군단 수요는 늘어난 10명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결국 기원전 81년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의 수는 20명으로 늘리고 자격을 30세 이상으로 낮췄고, 재무관을 역임한 뒤에는 원로원 의원직을 얻을 수 있었다.
[1] 때때로 8명에서 10명까지도 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 단, 귀족 안찰관(Aedilis Curules)과 재무관, 대대장(트리부누스 밀리툼, tribunus militum)은 예외. 이들은 트리부스 민회에서 선출되었다.[3] 파스케스를 들고 다니며 정무관들을 호위하고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호위병들이다. 다만 저 역할만 하는 건 아니고, 경찰이 없었던 로마 공화정 시기에는 시답잖은 시위나 소규모 폭동을 진압하는 일종의 치안관 역할도 겸했다.공화정 말기에는 약 300여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이중 30명이 상술했듯이 30개의 쿠리아를 대표했다.[4] 티베리스 강 남서쪽에 위치한 언덕. 로마의 일곱 언덕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언덕으로 취급되었고, 꼭대기에는 요새가 있었다.[5] 이 깃발이 내려가면 적이 공격해 온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회의는 즉시 해산되었고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무장한 후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6] 흔히 군사호민관으로 오역된다. 상세한 내용은 호민관참조[7] 다만 호민관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할 권한은 가지고 있었다.로마인 이야기에서 이걸 호민관이 되면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다고 잘못 이야기한 듯하다.[8] 상아 의자에 앉을 수 있었으며(즉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트리부스 민회에서 선출되었다.[9] 국고가 사투르누스 신전에 있어 신전에 보관된 기록의 관리 책임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