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기

 

1. 개요
2. 생애


1. 개요


고려의 문관. 경서, 사서를 섭렵하고 오언시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2. 생애


탐라 출신으로 고려에 임용된 1세대인 우복야 고유의 아들이다. 초명은 고당유(高唐愈). 예종 초에 남쪽 고을(南州)의 수령으로 임명돼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본다.
인종 8년(1130) 4월 이주연, 임원준, 황보양, 문공원 등과 왕에게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부분이 묵살된다. 이 상소는 4년 전 축출된 이자겸의 당파였으나 환관과 결탁해 별도의 처벌 없이 복직한 지수주사 봉우(奉佑)를 면직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고조기는 혼자서 두세번 상소를 올렸으나 같은 해 7월 시어사에서 공부원외랑으로 좌천된다. 인종 9년(1131) 예부낭중으로 금나라에 사절로 가서 인종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에 사례한다. 인종 13년(1135)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을 보좌한다.
고조기가 대관(臺官)이 된 뒤에는 이자겸 당여로 죄를 면한 이들을 내쳐야 한다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다. 고조기는 "비록 성상께서 관대하시어 그 허물을 덮어주려 하시지만, (이자겸 일파가) 어느 면목이 있어 조정에 서 일월을 보겠습니까?"[1]라며 강경 대응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종 입장에서는 인천 이씨가 유력 문벌인 만큼 혼인 관계로 맺어진 문벌귀족도 많았기에, 고조기의 주장을 수용해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조기는 예부낭중으로 관직을 옮기면서 대관 자리를 잃는다.
의종 2년(1148) 3월 정당문학, 12월 참지정사 판병부사에 오른다. 이듬해 의종 3년(1149)에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되고 판이부사를 겸한다. 의종 초에는 김존중과 환관 정함이 권세를 얻었는데, 고조기는 이들에게 영합한다. 젊어서는 정의심에 넘쳐 이자겸 일파를 탄핵했던 대관이 나이가 들며 권신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에 여론의 비난을 듣는다. 의종 4년(1150) 간관이 고조기를 탄핵하기에 이르러 상서좌복야로 좌천된다. 그러나 김존중의 도움으로 곧 판병부사를 겸하고 이듬해 중군병마판사 겸서북면병마판사가 되며 중서시랑평장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관직에서 물러나고 의종 11년(1157) 죽으니, 왕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시호를 내린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장례는 관리가 대신 주관했다.

[1] 雖聖上寬大, 掩其疵疾, 何面目立朝廷, 見日月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