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존중
金存中
(? ~ 1156)
1. 개요
용궁 김씨의 시조이자 고려의 권신. 의종의 측근으로 의종 즉위 초에 권력을 잡았으나 10여년만에 죽어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2. 상세
출신은 용궁군(현 경상북도 예천군)이다. 김존중은 춘방시학, 즉 의종의 태자 시절 교사로,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태자 관련 사무를 보는 첨사부의 녹사에 임명된다. 인종 재위중에는 동궁을 드나들며 환관 정함과도 친분을 쌓았으며, 의종 즉위년(1146)에는 우정언에 임명됨으로 내시에 소속돼 왕의 총애를 받는다.
김존중과 정함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된 의종이 정습명을 꺼리는 것에 주목한다. 정습명은 원자 시절부터 의종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주장한 신하로, 인종은 정습명을 의종의 스승으로 삼고 후일을 부탁할 정도로 신임했다. 그러니 간관 출신이며 임금의 스승이었던 정습명은 왕 앞에서 할 말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존중은 정함과 함께 정습명을 헐뜯었고, 정습명이 잠시 병으로 물러나자 정함의 도움으로 비어있는 우승선(중추원의 정3품 관직) 자리를 꿰어찬다. 의종 4년(1150) 3월, 왕의 뜻을 알고 정습명이 약을 먹고 죽은 뒤에는 그야말로 김존중의 세상이 온다.
또 김존중·정함이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있었으니, 의종의 모친 공예태후와 연결된 외척이었다. 공예태후의 누이가 정서와 결혼해 인척 관계 있었는데, 김존중은 당시 내시낭중이었던 정서 및 태후의 동복동생 임극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함이 대령후 왕경과 결탁하는 반란 모의 세력이 있다고 무고하는데 김존중은 처음에는 증거를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함의 주장에 제동을 건다. 그리고는 대령후의 집에 출입했다는 근거를 들며 정서를 무고하는데, 정서는 실제로 대령후와 친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든 정황이 있었다. 의종 5년(1151) 5월 김존중의 친족 좌간의 왕식과 기거주 이원응 등이 정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니 결국 정서는 장을 맞고 동래로 유배된다. 정서와 그 일파가 제거되니 의종은 김존중을 더욱 총애한다. 같은 해 7월 김존중은 동제거를 겸한다.
김존중은 태자[1] 가 어린데 종친들이 강하니 일찌감치 태자를 보좌할 스승을 정해야 함을 의종에게 아뢴다. 의종은 김존중의 제안에 따라 유필을 태사, 최윤의를 태부로 임명한다. 유필이 죽자 의종 10년(1156) 좌승선이었던 김존중이 대신 태자소보에 임명된다. 김존중은 아마 의종에 이어 그 아들의 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리리라 계획했겠지만, 같은 해 등창으로 갑자기 죽어버린다. 의종은 김존중을 수충내보동덕공신 이부상서 정당문학 수문전대학사로 추증한다.
3. 여담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김부식처럼 시체가 온전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시를 잘 썼다고 한다.
의종 3년(1149)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했다가 이듬해 탄핵돼 상서좌복야로 강등된 고조기가 김존중에게 몸을 굽힙으로 곧 원래 관직을 회복한다. 이자겸 일파에 가세했던 이들을 모두 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개했던 고조기가 권신에게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으니 세간의 비난을 듣는다.
의종 13년(1159) 왕이 잠시 김존중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