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1. 개요
고려 중기의 권신. 대표적인 외척 세도가 집안인 인천 이씨 출신으로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트린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十八子는 이자겸의 성씨인 李의 파자이다.'''"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 인종이 마침내 이자겸을 체포하고 한 말. 사람들은 감격해 만세를 외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훗날 본관은 다르지만 성은 같은 어떤 무장이 진짜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자겸의 작위는 위에서 언급한 한양공→조선국공. 실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인 셈.
작위는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서 소성후(邵城侯), 한양의 공작에서 조선국의 공작으로 진작됐으나 박탈당하고 사후 한양 공작으로 다시 추증됐다.
이자겸의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는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하고[6] 조선국 공작이 되어 지위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그래서 절일을 정해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전문(箋文)을[7] 받았다고 한다.
중국 송나라의 관리였던 서긍(徐兢)은 사신을 따라 고려에 방문하여 견문록인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여기서 이자겸에 대하여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평하였다. 즉 미남에다가 겉으로도 온화한 인물인양 행세한 듯 하다.
최소한 서긍의 묘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흔히 사악한 권신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모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외모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사실 권력있는 간신은 이자겸 같은 타입, 즉 겉으로 보면 사람좋고 호감가는 타입이 훨씬 많은 편이다. 무신정변의 시발점인 정중부 역시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아 겉보기에는 존경스러워 보이는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타입이 아니면 애초에 권력을 잡는 것조차 힘들다. 남 듣기 안좋은 소리를 해서 어그로를 끌고 다니는 비호감 성향의 파이터 타입은 오히려 유학에서 말하는 충신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2. 생애
2.1. 득세 이전
경원 이씨(慶源 李氏)는 인주(仁州)[8] 이씨, 인천 이씨라고 불리기도 한데 그 시조는 신라인이며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로 가문의 세가 강해진 건 이자겸의 할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이자연(李子淵) 때부터이다.[9]
할아버지 이자연[10] 은 현종 때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문종 때 크게 활약해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가는 쾌거를 이룬다.[11] 이자겸은 고모 셋이 왕과 혼인한 셈.
이자겸의 여자 사촌 중 셋이 선종과 혼인해 헌종과도 외척 관계를 만든다.
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는 이자연의 6남인 덕분에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다. 아들로 이자겸, 이자량이 있으며 딸로 순종의 후궁 장경궁주가 있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 장경궁주의 형제로서 관직에 쉽게 올라갔지만 장경궁주가 간통 혐의로 폐출당하면서 그 역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게다가 헌종의 보위가 병환으로 인해 휘청거렸고 선종의 비이자 이자겸의 사촌인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가 이자겸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려고 계림공 왕희[12] 과 대립하던 중 선수를 친 계림공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는 바람에 조정으로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드디어 그의 위세가 회복되는데 숙종의 아들 예종이 자신의 먼 친척[13] 과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딸 자정문경왕태후가 왕태자 인종을 낳고 그가 왕이 되자 이자겸은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된다.
2.2. 하늘을 찌르는 세도
이자겸은 인종 즉위후에는 중서령 겸 영문하상서도성사라는 관직에 올랐는데 특히 영문하상서도성사는 그 이전에는 기록을 볼 수 없는 사실상 이자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상국급 관직이다. 혼자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최고 관직을 독식한 것이다.
또한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올렸다.
당시는 국명이 고려이고 조선은 단지 다르게 부르는 이름 중 하나인데다 국공이라는 작위 자체는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의미심장한 작위명이다. 조선은 당시에는 주로 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오등작 제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분봉 작위.
예종 사후에 자신의 외손자인 연소한 태자(훗날 고려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라 칭해 요속[15] 을 두었다.
셋째딸과 넷째딸을 왕후로 삼게 하여 왕의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했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재산을 부정 축재하였다. 그런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는 이자겸의 둘째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인종의 이모다. 아무리 고려 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3촌 간의 혼인은 고려 초에도 흔하지 않았던 만큼 당연히 반대가 어마무시했지만 이자겸 본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다.
한편 일곱 아들들도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3남 이지언과 4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 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5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6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7남 이의장은 수좌[16] 에 오르게 되었다. 굳이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 체제에 비유하면 아들들이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장, 법무부/국토교통부/기획재정부 차관, 대통령 비서실 의전과장, (국교의) 교구 대주교 직을 모조리 장악한 격이다.
거기에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군부의 핵심 인사로 떠오른 척준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의 6남 이지원을 척준경의 사위로 맞게 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세도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군주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했을 정도. 김부식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19]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을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다....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17]
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18] 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또한 당시 국력이 급성장한 금나라(여진족)에서 고려에게 자신들에 대한 사대를 요구하자 이자겸은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거란족)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사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척준경도 동조했는데 단순히 이자겸의 주장에 묻어갔을 가능성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보다는 사대가 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2.3. 이자겸의 난과 최후
3. 의문
3.1. 정말 반역을 꾀했는가?
주동자로 지목된 이자겸이 고작 유배로만 끝난 것을 들어 그가 정말 반역을 꾀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의 뜻을 품은 건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인데 항간에 십팔자위왕이라는 참설이 퍼지자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것.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자겸 척살 시도가 실패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못 이기고 이자겸에게 순순히 선양할 생각이었지만 이자겸 쪽에서 자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20] 그런데 난데없이 '십팔자위왕'의 소문이 나오며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뺏으려 했고(라는 식의 기록이 적히고), 얼마 안가서 이자겸은 연경궁 사태로 유배되게 된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은 그의 딸인 인종비가 독이 든 떡을 까마귀에게 먹였더니 까마귀가 죽었다는 기록과 독이 든 그릇을 엎질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근데 흉조인 까마귀라는 존재의 사용과 이와 비슷한 기록이 고려 현종과 관련된 기록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창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자겸의 입장에서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킬거라면 애매하게 독살을 시도하면서 툭툭 건드릴 게 아니라 그냥 건장한 하인 몇 명을 보내면 땡이었고 실제로 척준경과 틀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 당시 이자겸의 행적을 보면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냥 그런대로 살자는 식으로 왕을 상대로 간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양반이 척준경이 치러가기 직전도 아니고 척준경에게 다 털리고 벌받을 때가 되어서야 갑자기 난데없이 쿠데타 계획했다는 소리나 들었으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위에서 언급된 하인 간의 언쟁을 보더라도 이지언 하인의 발언은 단순한 하인의 헛소리가 아니라면 기묘하다.
역사서의 내용대로라면 척준경이 이자겸의 지휘하에 왕과 싸웠고 이자겸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다. 근데 이자겸 아들의 하인이 척준경이 왕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욕 보이면 이는 결국 자신의 주인인 이지언의 아버지이자 그 당시 고려의 실세인 이자겸까지 싸그리 매도하는 발언이었기 때문.
즉 저 발언이 진짜라면 이지언의 그 하인은 척준경 이전에 이씨 가문에게 맞아 죽지 않는게 신기한 상황이었다. 이지언 하인의 발언과 이자겸의 쿠데타 시도가 사실이라고 치기에는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 상술했듯이 굳이 좋은 기회를 내버려 두고 쿠데타를 일으킬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 이지언의 하인 때문에 척준경과 틀어지는 상황이면 이자겸은 척준경과 마냥 틀어지기보다 이지언의 하인을 족쳐서라도 척준경을 붙잡는게 더 낫다.
무엇보다 실제로 쿠데타를 준비한다기에는 그 당시 이자겸의 권력에 비해서 너무 준비가 느린 등 의문점이 많다. 결국 확실한건 모종의 이유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고 인종이 척준경을 이자겸 처리하는데 썼다는 것 정도.
3.2. 왜 연합이 깨졌나?
1126년 3월~5월 20일까지는 완전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2달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척준경과의 연합이 깨져 버린게 가장 크다.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3.2.1. 민심의 이반
연합이 깨진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이 이-척 연합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상술한 고려사 이자겸 열전의 일부 글이다. 이자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열중했고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개경 시민이나 백성들이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파의 수탈. 고려사 이자겸 열전.
홍입공(洪立功)이란 무신이 있었다. 원래 직위는 유한경이라는 장군 밑에 소속된 중랑장(中郞將)이었는데 유한경은 이자겸 파였고 이자겸은 홍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승진시켜 준 뒤 척준경에게 보낸다.
척준경이 개경 궁궐을 불지르려 할 때 홍입공을 보내 땔감을 가져오게 시켰다. 홍입공은 조용히 이를 따랐으나 나성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의 군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에 설득된 홍입공의 군졸들은 땔감을 버리고 선의문을 통해 들어가 인종에게 간다. 인종을 만난 홍입공은 대열을 갖춰 절한다. 누군지 의아해한 인종에게 홍입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곧 기뻐한 인종은 그들에게 자신의 숙위를 맡긴다."나와 너희 등은 모두 왕신(王臣)이다. 이제 땔감을 지고 궁을 태우려 하는 짓은 신자(臣子)의 의(義)가 아니다."
이 일화는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종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일화일 수도 있다. 허나 동시에 이자겸파 내에서도 궁에다 불지르는 건 너무 심했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인종을 중흥택, 이어 연경궁에 감금한 이자겸은 자신의 넷째 딸인 인종의 후궁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한다.
처음엔 독이 든 떡을 진상했으나 넷째 딸이 몰래 인종에게 알렸고 인종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다. 보란듯이 떡을 먹은 까마귀는 쓰러졌다.
두번째론 넷째 딸을 직접 시켜 독이 든 술을 올렸는데 딸은 술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며 술을 바닥에 흘려버린다. 결국 두번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이 두 일화는 역시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자겸의 딸마저도 아버지의 거사 참여에 거부한 일화는 이자겸의 민심 장악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다는 반증 일 수도 있다.
척준경은 기어코 본궐에다가 불을 질러 다 태워먹었다. 본궐이 워낙 커 인종이 피신한 산호정까지 불이 닥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인종을 죽일 뻔했다.[21]
이 사건은 여파가 매우 컸다. 비록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시하려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양자간 탓을 돌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네 주인이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태우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너도 정부 소속 노비가 될 꼴인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이지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자세히 보면 이지언의 노비가 해선 안 될 말을 한 게 보인다. 노비의 말을 보면 이미 누가 궁궐을 불태웠는지 다 알려졌고 척준경의 행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당황한 척준경은 분노해서 두문불출했고 하야까지 선언한다. 이지미, 이지보가 척준경과 화해하려 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난의 주동자를 이자겸으로 몰아갔다. 척준경의 말을 보면 욕을 먹을 대로 먹으니 역으로 억울해진 감이 있는 듯하다."'''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척준경이 이지미와 이지보의 수하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 입장에선 아무리 자신이 권신이 됐더라도 자기 아들, 동생, 부하가 다 죽었는데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려의 상징과 같은 본궐을 연소시킨 건 당대나 지금이나 욕을 먹을 것이다.
4. 이야깃거리
- 이자겸은 붙잡혔으나, 왕의 장인에다 외조부란 이유로 죽이진 못 했고, 영광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비굴하지 말자는 각오로 염장한 조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민간어원이며, 굴비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링크 및 굴비 문서를 참고.
- 이 사람 때문에 인천 이씨가 그대로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으로 경원 이씨가 여전히 언급되었고, 실제로 이자겸계 외의 경원 이씨가 같이 제거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원 이씨가 상당히 타격을 입은 사건은 바로 이징옥이 일으킨 이징옥의 난. 그래도 일단 그 때에 비해 세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팩트인 듯 한데,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약 6만 8000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쪼그라든 숫자. 김해 김씨가 그 조사에서 412만 5000명이 보고된 것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안습해진다. 이자겸 때문에 너무 몰락해버린 바람에, 조선 후기 이후에 시작된 족보 세탁 바람에서 별 관심을 못 받은 양반 가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체에서 문과 급제가 9명밖에 안 된다면 양반이라고 하기도 뭣한 가문.
-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역사" 만화에서는, 권력을 휘어잡은 이자겸이 지나가면서 손짓 한번 하자 날아가던 새들이 비 오듯 우수수 떨어지고, 동네 똥개들도 알아서 설설 기며 모시는 모습으로 그 하늘 높은 권세를 묘사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져 있는데, 관직을 상징하는 감투를 아들들에게 사이 좋게 나눠 가지라면서 휙휙 던져주고, 위에서 언급한 7남 이의장이 의기양양하게 수좌를 맡으면서 불교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되자, 그걸 본 스님들이 "이러다가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판국"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