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함

 


1.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2.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3. 고려 18대 왕 의종의 환관이자 내시[1]


1.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丁咸
생몰년도 미상
제갈량이 4차 북벌을 해서 노성 전투에서 사마의를 이기고 후방을 기습한 장합을 이겼지만 수송 임무를 맡던 이엄이 장마비로 인해 식량 운반을 지속하지 못하자 사람을 보내 제갈량에게 후퇴하라고 했는데, 이엄은 보급품이 충분하지만 승상(제갈량)이 퇴각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려 제갈량을 모함했다가 제갈량이 편지를 공개해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갈량이 상서대에 공문을 올리게 되었다.
제갈량이 상서대에 올린 공문에서 행좌호군독신중랑장으로 언급되어 이엄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 인수, 부책 등을 없애 작위, 봉지 등을 박탈하는 것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제갈량의 공문에 언급된 인물 중에서는 원침, 유파, 허윤, 상관옹, 염안, 두의, 성발, 번기 등과 함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유선에게 위나라로 출병하는 북벌을 허락받아 유선의 조서를 받고 승상부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명령했는데, 그 명단에서 좌호군 독신중랑장으로 언급되었다.

2.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程咸
생몰년도 미상
자는 연휴(延休).
위군 무안 사람으로 정원 연간[2]에 사례교위의 주부를 지냈는데, 관구검이 수춘에서 군사를 일으키다가 사마소가 보낸 군대에게 격파당한 후에 주살당하고 관구검의 손녀를 죄에 연류하려고 하자 정함은 여자로서 남에게 시집간 자는 생산해 양육하면 다른 집의 어머니가 되니 이를 죽여도 난동의 근원을 징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또한 남자는 다른 종족에 죄를 입지 않으면서 여자만 홀로 두 가문에서 법률을 따른다면 약한 여자를 돕고 법령을 올바르게 한 것이 아니라면서 집에 있는 여자는 부모의 형에 따르도록 하고 출가한 여자는 시집간 가문의 법률에 따르도록 청했고 이는 채택되었다.
서진에서 역황문랑, 산기상시, 좌통직랑, 시중을 지냈고 280년에 오나라가 평정되자 시중으로 있으면서 무제의 명에 따라 가충을 치하하면서 비단 8천필을 하사하고 읍 8천호를 증가시켰다.
저서로는 집 3권이 있다.
삼국전투기에서 여자가 출가하면 친정, 남편 양 쪽의 죄를 왜 받아야 하냐면서 출가한 사람들은 남편 쪽의 죄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짧게 등장한다.

3. 고려 18대 왕 의종의 환관이자 내시[3]


생몰년도 미상.
의종이 태자 시절에 같이 격구를 즐겼다. 의종이 즉위한 이후 정습명 때문에 의종이 오락을 즐기기 어려워지자 정습명의 해임을 요구하여 정습명을 궁궐에서 내보냈고, 내시 김존중과 계획하여 의종의 동생 대령후 왕경과 정서를 모함하여 처벌했다. 그리고 의종의 총애로 권지합문지후라는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물러났다.
그러다 이후 의종이 합문지후에 임명했다. 당연히 신하들이 농성으로 맞섰으나 의종에게 단식 투쟁을 권하여 의종의 승리로 끝나도록 하였다.
엄청난 뇌물을 받고 이권 조정에 개입하여 재산을 쌓은 정함은 새 집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거의 왕궁과 같았고, 의종이 그의 저택에 '경명'''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그곳에서 국정을 보았을 지경이었다.
이후 등창으로 죽었다. 죽기 전 끙끙 앓고 누워 있던 그의 집 앞에는 병사 수십 명이 가져가도 남을 정도로 의종의 총애 덕분에 모은 재산, 그리고 문병을 가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지나가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고 "국권이 모두 고자 한테 있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1] 의종이 정함을 총애하였기에 내시의 벼슬 합문지후에 임명했기 때문에 환관에서 내시로 출세했다.[2] 254 ~ 256년이다.[3] 의종이 정함을 총애하였기에 내시의 벼슬 합문지후에 임명했기 때문에 환관에서 내시로 출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