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1. 개요
2. 진행
2.1. 배경
2.2. 대위국 건국
2.3. 고려군과의 전투
2.4. 묘청의 최후와 서경 포위전
2.5. 결말
3. 영향


1. 개요


1135년 고려승려 묘청개경에서 서경#s-1.1.2으로 천도를 추진하며 대위국을 선포하며 일으킨 난.

2. 진행



2.1. 배경


묘청은 서경 출신으로 인종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 시기에는 금나라요나라멸망시키고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함에 따라 동북아시아가 요동치는 격동의 시기였는데 묘청은 금나라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과 함께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아마도 묘청은 대외적인 명분 이외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묘청이 살아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2.2. 대위국 건국


결국 기상 이변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건들이 터지면서 서경 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러한 모든 것을 기득권의 훼방으로 여긴 묘청은 서경에 틀어박힌 채 개경의 귀족 세력을 타도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고 선포하였다. 원래 한자 문화권에서 천자의 나라는 격식을 갖춰 표기할 때 大+국호 또는 大+국호+國 등으로 적었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는 大漢(國) 식으로 적는 식이다. 중국의 경우 천자국은 한 글자를 쓰는 게 정석으로 간주됐고 제후의 작위를 줄 때도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두 글자를 쓰는 것보다 높은 것으로 간주됐다. 묘청의 반란군은 '위(爲)나라'라는 천자국을 선포한 셈이다. 실제로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을 천도하라고 권하며 칭제하고 연호를 선포하자고 했으니 국호를 이런 식으로 지은 것이다.[1]
결국 묘청 등 서경 세력은 광종을 뛰어넘어서 국호 또한 한 글자로 고치겠다는 대단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연호를 '하늘을 열었다' 또는 '하늘이 열렸다'는 뜻의 천개(天開)로 정하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이라 명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나라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추대하지 않았다.[2] 만약 난이 성공하여 인종의 신변을 확보하게 된다면 그를 대위국의 황제로 모시려고 했던 듯 보인다. 애당초 서경 세력은 서경 천도와 인종의 칭제건원을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좌절되어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니 인종 외 다른 사람을 추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2.3. 고려군과의 전투


서경 세력은 반란과 동시에 가짜 어사를 동북면으로 파견하여 지방 관원들을 체포하고 행정권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들키지 않으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했던 것인데 때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개경 군인 2명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복귀해서 반란 사실을 알렸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대가 파견되었는데 자세한 규모는 불명이나 우군만 2천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좌군과 중군의 규모를 알 수 없다. 먼저 우군이 서경에서 동북면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한편 가짜 어사들이 파견되었던 지역을 위무하여 역반란이 일어났다. 가짜 어사임이 들통난데다가 관군의 선무공작이 주효하여 세력 확장을 위해 파견된 서경군이 모두 잡히거나 죽은 것이다.
그러는 한편 좌군은 서경과 개경을 잇는 도로를 점하여 서경의 남쪽, 중군은 우군이 점거한 지역을 통해 우회하여 서경의 북쪽을 점거했다. 대동강 하구를 관군 수군이 점령하여 서경의 서쪽도 점거당함으로써 반란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2.4. 묘청의 최후와 서경 포위전


묘청은 수세에 몰린 끝에 어처구니없게도 반란을 일으킨지 불과 17일 만에 서경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부하인 조광(趙匡)에 의해 병부상서 유참(柳旵), 유참의 아들인 유호(柳浩)와 함께 살해되었고, 이들의 목은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에 의해 개경으로 보내져 항복을 위한 협상용으로 쓰였다. 하지만 조광의 항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황은 이랬다. 김부식이 글을 써서 인종에게 보냈는데, 조광은 적에게 협력하긴 했지만 대장의 목을 베어서 공이 크니 살려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은 인종은 김부식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김부식 외의 세력들이 "그건 김부식의 공이 아니니까 넌 얼른 토벌이나 해"라며 윤첨을 비롯한 항장들을 하옥시켰다. 이 때문에 조광은 항전을, 김부식은 토벌을 하게 되었다. 조광은 다시 서경에서 항전을 시작하고, 결국 묘청의 난은 대규모 유혈 사태로 마무리되었다.
조광의 항전은 의외로 길게 이어졌다. 그 이유는 서경이 워낙 견고해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은 서경 주변에 여러 개의 성을 증축하고 그 주변에 참호를 파 지구전에 돌입했는데, 조정의 신하들은 북방의 금나라를 비롯한 적들이 겉으로는 화친하고 있지만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는데 이토록 전쟁을 오래 끌다가 다른 변란이 발생하면 막아낼 방도가 없으므로 빨리 공격해서 반란을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경의 반란세력은 금나라와 고려를 이간질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 주장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김부식은 '변방의 경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하나, 서경이 매우 견고해 무턱대고 공격하다가는 많은 사졸이 상하여 오히려 변방 경계에 구멍이 생길 것이므로 온건한 계책으로 병력을 보존하고 국가의 위엄도 꺾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고, 인종 역시 김부식의 말을 옳게 여겨 모든 작전권을 그에게 위임했다.
서경 포위전은 해를 넘겨 2년을 끌게 되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도 묘청의 난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 '서경에서 난동을 일어났다는데 진압하기 어렵다면 10만 대군을 보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고려는 남아있는 건 잔당뿐이고 곧 무너질 것이라며 이를 거절했는데, 그 말대로 국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포위망을 뚫지 못한 서경의 군세는 군량부족에 시달리고 탈주자가 늘어나는 등 점차 힘을 잃어갔는데, 김부식은 전군(前軍)을 양명포의 산 위로 옮겨 군영을 세우게 한 뒤 2만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서경의 서남쪽에 거대한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서경군은 공사가 벌어지는 틈을 타 전군을 기습했지만 격퇴당했고, 관군 역시 서경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조광은 토산에 맞서기 위해 성 안에 이중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2.5. 결말


지루한 대치가 계속 이어질 무렵, 윤언이와 지석숭이 '대치가 오래되었으므로 사변을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며 김부식에게 성을 급습할 것을 요청했다. 김부식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윤언이가 거듭 요청하자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서경을 대대적으로 기습했다. 서경군은 당시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가 허를 찔려 윤언이의 말처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무너져 큰 피해를 입었다. 해가 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관군은 철수했지만 한 번 싸움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서경군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고,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의 수뇌부 대부분은 밤 사이 자결했으며, 성 안의 나머지 무리들은 다음날 우두머리인 최영을 사로잡아 항복하였고, 묘청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묘청의 난은 김부식의 의도대로 관군의 큰 피해 없이 진압되었다.

3. 영향


묘청의 난으로 인해 숭문천무(崇文賤武) 분위기가 강화되어 이후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또한 태조의 유언인 훈요 10조에도 명시되어 있었던 서경의 지위가 하락되어서 그전부터 유명무실했던 분사제도(分司制度)는 완전히 폐지되었다.[3] 그리고 고려 조정의 역사계승 의식은 고구려 계승에서 삼한일통 의식으로 완전히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몽골과의 전쟁때는 고조선 계승 의식으로 확대가 되었다.
[1] 고려의 국왕들도 외왕내제(밖으로는 왕, 안으로는 황제)를 칭했는데 나라 이름은 고려국으로 지었다.[2] 나중에 벌어지는 삼별초의 난에서는 삼별초왕족 중 1명인 승화후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 자체는 다른 편이었지만 묘청 세력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 군주가 공석인 채로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3] 고려는 개경의 관청을 제2의 수도인 서경에도 설치했는데 이것을 분사제도라고 한다. 태조 때 시작되어서 예종 때 완성됐다. 서희의 담판에서 수도가 서경이라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도 이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