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카쿠 덴노

 


[image]
'''시호'''
고카쿠 덴노(光格天皇, 광격 천황)
''''''
모로히토(師仁), 도모히토(兼仁)
'''능호'''
노치노츠키노와능(後月輪陵)
'''생몰'''
1771년 9월 23일 ~ 1840년 12월 11일
'''재위'''
1780년 1월 1일 ~ 1817년 5월 7일
'''연호'''
안에이(安永)(안영)(1779년~1781년)[1]
덴메이(天明)(천명)(1781년~1789년)
간세이(寛政)(관정)(1789년~1801년)
교와(享和)(형화)(1801년~1804년)
분카(文化)(문화)(1804년~1818년)
'''황거'''
교토 어소(京都御所)
1. 개요
2. 생애
3. 이야깃거리


1. 개요


일본의 제119대 천황. 고카쿠 덴노의 7대손인 나루히토까지 계속 부자 세습으로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에 현 일본 황실의 직계를 연 천황이다.
제113대 군주 히가시야마 덴노의 4세손으로, 방계 황족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의 6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본래 모로히토(師仁)였으나 師仁이라는 한자가 死人과 같은 발음으로 읽힐 수 있다는 이유로, 즉위한 뒤 토모히토(兼仁)로 개명했다.

2. 생애


중환에 시달리던 고모모조노 덴노는 후계를 정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급사'''하고 만다. 고모모조노 덴노에게는 황자가 없고 황녀 요시코(欣子) 내친왕 1명만 있었다. 이에 급히 4대 세습친왕가문들 중 간인노미야에서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의 6남 모로히토 친왕을 사후 양자를 들이는데 그가 바로 고카쿠 덴노다. 고카쿠 덴노는 고모모조노 덴노의 7촌 아저씨(재종숙부)가 되니, '7촌 아저씨가 조카의 양자가 된 셈'이다. 고카쿠 덴노는 1780년 즉위하였으며, 요시코 내친왕을 황후로 삼았다.
재위 중에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하자 고카쿠 덴노는 에도 막부에게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1811년 치시마 섬의 측량을 위해 일본에 온 러시아 군함 디아나호가 일본에 억류되는 이른바 고로닌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교섭의 내용을 전부 보고하도록 하는 등 조정의 권위회복에 노력하였다.
막부와 조정의 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존호'사건이다. 고카쿠 덴노는 친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에게 태상황의 존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2] 그러나 에도 막부가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였고[3], 이 사건은 후에 존왕사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고카쿠 덴노는 학문에 열심이었으며, 시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등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하였다. 또한 4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교토의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이나 가모 신사(賀茂神社)의 임시제를 재개하고 조정의 의례를 부활시키는 등 노력하였다. 또한, 대학료를 대신하는 조정의 공식교육기관 설치를 구상하였으나 재위 중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아들 닌코 덴노대에 와서야 조정 공식교육기관 가쿠슈인[4]이 설치되었다.
1817년 5월 7일, 고카쿠 덴노는 닌코 덴노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이듬해 5월 9일에 퇴위함에 따라 태상황이 되었다.
1840년 12월 11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교토시 히가시야마(東山)구에 있는 센뉴지(泉涌寺, 천용사)에 있다.

3. 이야깃거리


  • 고카쿠 덴노는 현재 황실의 직계 조상으로, 부계 기준으로 따져서 지금의 황실 구성원 이외에 신적강하해서 별도의 가문을 창시한 후손은 없다. 애초에 고카쿠 덴노의 자손은 닌코 덴노부터 다이쇼 덴노에 이르기까지 직계 남계 혈통은 전원 후계자 한 명을 제외하면 요절했기 때문에 따로 세습친왕가를 만들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상 현재 일본 황실의 남계 혈통 부족의 시작이 고카쿠 덴노부터 비롯되었다. 그나마 당시에는 친형인 하루히토의 혈통인 간인노미야가 있었지만 간인노미야 직계도 나루히토(愛仁)로 단절되고 후시미노미야에서 양자입적으로 이은 지경이었고 결국 단절되었다.[5]
  • 고카쿠 덴노의 퇴위 이후 태상황이 된 천황은 이후 202년 동안 없었는데, 아키히토 천황이 2019년 4월 30일부로 생전 퇴위하고 익일인 5월 1일에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함에 따라 고카쿠 덴노의 사례가 새롭게 언론에게 주목받았다.
[1] 선황이자 양부인 고모모조노 덴노의 연호 습용.[2] 그 이유는 막부가 제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이 코카쿠 텐노의 신하들보다 서열이 낮기 때문.[3] 막부의 반대 논리는 '제위에 오른 적이 없는 인물이 상황의 칭호를 받은 전례가 없다.'는 것.[4] 나중에 일본 제국 때에는 이 교육기관이 일본 황족 및 화족 자제 전용 교육기관이 된다.[5] 더 올라가서 현 직황족의 가장 가까운 남계혈통을 따라 올라가 히가시야마 덴노의 후손으로 압축해도 남계에서 가장 가까운 궁가였던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츠라노미야가 이미 단절되었고 공가로 입적된 다카츠카사 스케히라의 혈통밖에 없다. 이들조차도 현 직황족과는 20촌이 넘게 차이난다. 흔히 구황족이라 불리는 자들은 700년 전에 분가된 가문이고, 300년 전 가문에서 분가된 혈통에서 따져도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일본 황족의 부족이 심각했는가를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