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인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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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인노미야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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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당주 고토히토(載仁) 친왕
7대 당주 하루히토(春仁) [1][2]
1. 개요
2. 성립
3. 역대 당주
4.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
5. 기타


1. 개요


閑院宮
일본 황실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4개의 세습친왕가[3] 중 가장 나중에 생겼으며, 현재의 황실은 이 궁가의 후손이다.
아울러 외래어표기법상 '''간인노미야'''가 맞으나, 이렇게 쓰면 '''가닌노미야'''로 읽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강인노미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조하자.
세습친왕가에 대해서는 후시미노미야 항목에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2. 성립


당시 일본 조정에서는 황위 계승 예정자 이외의 황자들은 세습친왕가의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가시켜 '''법친왕(法親王)'''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4] 그런데 1654년 고코묘 덴노가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서하자 혈통상으로 가까운 남자 황족이 죄다 출가해버린 탓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황실에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둘 것을 건의했다. 당시 히가시야마 덴노도 같은 생각이어서 자신의 아들 히데노미야(秀宮)[5]를 새로운 궁가의 당주로 하기 위해 쇼군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710년 새로운 세습친왕가인 간인노미야(閑院宮)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뒷날 간인노미야의 2대 당주 스케히토(典仁) 친왕의 아들 모로히토(師仁) 친왕[6]이 119대 고카쿠 덴노로 즉위했다. 만약 간인노미야가 없었다면 황위는 부계혈통상 한참 먼 후시미노미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히가시야마 덴노는 이러한 점을 우려했던 듯하다.

3. 역대 당주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나오히토(直仁)[7]
1704~1753
2대
스케히토(典仁)
1733~1794
3대
하루히토(美仁)
1758~1818
4대
다츠히토(孝仁)
1792~1824
5대
나루히토(愛仁)
1818~1842
6대
고토히토(載仁)[8]
1865~1945
7대
하루히토(春仁)
1902~1988

4.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


신적강하 및 그 이후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자.

5. 기타


  • 본래 간인노미야는 천황의 직궁가와 부계혈통상 가장 가까운 세습친왕가였다. 그러나 5대 나루히토(愛仁) 친왕이 요절하고,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고토히토(載仁) 친왕을 6대 당주로 맞으면서 부계혈통상으로 후시미계 다른 미야케와 별 차이가 없어졌다.
  • 6대 당주 고토히토 친왕일본 육군의 수장으로서 수염참모총장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 해군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 왕과 함께 황족을 각각 등에 업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육해군이 각각 나이 많은 황족을 수장으로 내세워서 조카뻘에다가 나이도 한참 아래인 천황이 이를 통제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말도 있다.
  • 신적강하 이후 구황족들이 여러가지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7대 당주 하루히토 부부의 이혼소송이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때 하루히토가 동성애자고, 그의 애인 역할을 하던 부관[9]이 하루히토의 부인 나오코(直子)를 폭행하기까지 했다는 등의 폭로전이 벌여져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적이 있다. 이후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한 하루히토는 '카스가 흥업(春日興業)'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차리고 대표 이사를 지냈다. 사업 수완이 있었는지 여타 구황족들과는 달리 신적강하 이후에도 풍족하게 잘 살았다.[10] 이혼한 뒤에 재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하루히토가 죽은 1988년에 간인궁가는 단절되었다. 사생아가 적어도 네 명은 있다는 증언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 간인노미야는 단절되었지만 현재의 황실이 간인노미야 계통이며, 이외에 간인노미야에서 신적강하한 화족 가문의 후손들이 남아있다. 모두 초대 당주인 나오히토 친왕의 후손으로,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 스미토모(住友) 재벌의 총수였던 스미토모 토모이토(住友友純). 살리카법 기준으로 따진다면 이들이 후시미계 구황족들보다 계승순위가 앞선다. 물론 이쪽 집안 사람들은 신적강하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애당초 황적복귀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부계로 따져서 현재의 황실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16촌 정도니 남이나 다름없다.
  • 옛 세습 친왕가 가운데 유일하게 교토에 있는 궁가의 저택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교토고쇼(京都御所)의 부지 남서쪽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입장할 때 방명록에 본인의 이름을 쓰면 된다. 월요일, 연말연시에 휴관하며 09시부터 16시까지 참관 가능하다. 홈페이지

[1] 아버지가 '''친왕'''이었던데다, 신적강하한 구황족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도 천황의 직궁가와 같은 '''히토(仁)'''가 들어가다보니 '''하루히토 친왕'''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2] 사진은 말년의 모습. [3] 나머지 3개의 궁가는 후시미노미야, 카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4] 친왕이 출가하는 경우, 입도친왕(入道親王)과 법친왕(法親王)이 있다. 둘 다 왕자 출신 승려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환속해서 자식을 보면 그 자손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에 차이가 있다. 입도친왕의 자손은 가능하나, 법친왕은 불가능하다.[5] 뒷날의 나오히토(直仁) 친왕.[6] 나중에 토모히토(兼仁)로 개명한다.[7] 113대 히가시야마 덴노의 아들. 그의 딸 이소노미야 토모코 여왕이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출가한다.[8] 봉사손으로 입적.[9] 하루히토는 종전 당시 육군소장이었다. 군대가 해체된 뒤에도 그의 부관은 하루히토 개인의 집사로서 계속해서 수발을 들었다.[10] 야마노테선 타마치역 앞의 NEC카스가(春日) 빌딩이 그의 소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