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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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125대 천황이자 현 상황(上皇)이다.
연호는 '''헤이세이 平成(평성)'''이며, 1989년 1월 8일부터 2019년 4월 30일까지 30년간 재위하였으나 고령의 나이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2019년 4월 30일 자신의 맏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천황 자리에서 생전에 물러나 고카쿠 덴노 이후 202년 만에, 그리고 일본에서 근현대적 헌법이 정해진 이후 처음으로 '''상황(上皇/じょうこう)'''이 되었다.
1933년(昭和8年)생으로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의 2남 5녀 중 다섯째 자녀이며, 아들 중에서는 첫째이다. 1989년 1월 7일 쇼와 덴노의 십이지장 하혈로 인한 사망으로 일본 제125대 천황에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11월 12일 도쿄도 고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
아명의 일종인 '어칭호(御称号)'는 “쓰구노미야(継宮)”. 사후에는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로 불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2][3] 현재 황위에서 퇴위하였으나 생존 중이므로 일본에서는 상황(上皇)으로 불린다. 외국에서는 휘를 그대로 따서 Akihito로 호칭된다. 현재 큰아들과 함께 둘만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Emperor라고 불리는 인물이다.[4]
대표적인 친한파 천황이자 평화주의자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유명하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5] 대표적인 발언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말이 평화를 지향하는 말들이다. 덕분에 식민지들을 비롯한 과거 일본 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국내외에서 모두 지지를 받는 인물.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 특례법(天皇の退位等に関する皇室典範特例法)'이 만장일치로 정식 통과되어 2019년 4월 30일 정식으로 퇴위하였다.# 물러남으로써 황위는 장남 나루히토에게 승계되었고, 자신은 상황(上皇, 조코)[6] 이 되었다."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자신의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戦争の記憶が薄れようとしている今日、日本が歩んできた歴史を繰り返し学び、平和を考えることは極めて重要だ。"
(平成23年12月23日、御自身の誕生日記念感想文を通じて..)
2. 생애
3. 가족관계 및 후사
4. 한국 관련 발언
아키히토는 식민지배나 전범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같은 평화주의적 언행 외에도 한국 관련한 친화적 발언을 꽤나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반성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며 총리 아베 신조에게 후손들을 위해서 바른 역사를 가르치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전쟁을 반성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가 "그냥 기도나 하고 있으라"고 하는 등, 총리 아베 신조하고 사이는 그렇게 썩 좋진 않다. 일본의 간무 덴노(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의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나 혐한세력들은 당연히 이 발언을 듣고 당시 천황이였던 아키히토를 까기도 하고 싫어할 정도이다.
우선 1990년, 일본을 공식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의[7] 대화 때 ''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만찬에서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선 직접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8] 다만 아사히신문 등이 이 대목을 보도한 것과 달리, 주로 일본의 보수 성향 언론들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아키히토의 이 발언은 쏙 빼놓기도 했다. 2013년 나라 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도 속일본기를 인용하며 같은 발언을 했다.#
참고로 언급한 간무 덴노는 나라현에서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794~1185년)[9] 를 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들여다보자면 간무가 편찬한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간무 덴노의 아버지는 코닌 덴노(後仁天皇)로 할아버지 대에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황위 계승이 어려웠던 인물이다. 그때, 만난 여인의 이름은 야마토노후히토 니이가사(和史 新笠)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61세에 천황이 된 코닌은 니이가사를 정실로 삼고 타카노노아손(高野朝臣)씨를 사성하고 이들 사이에 난 아들 간무를 황태자로 삼는다. 789년 니이가사가 세상을 떠나자 간무 덴노는 어머니를 태황태후로 추증하고 히라노 신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냈다. 간무는 즉위 동안 백제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임용하였다.황태후의 성은 야마토(和)씨이고[10]
이름은 니이가사(新笠)이다. (…)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코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 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11]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皇太后 姓; 和氏, 諱; 新笠. (…)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皇后容徳淑茂 夙著聲譽. 天宗高紹天皇龍潛之日 娉而納焉. (…)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卽其後也. 출처
이는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와 간무 자신이 백제 무령왕 혈통임을 내세워 황권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코닌이 즉위할 때 정실은 이후 황후였고, 그 아들인 오사베가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이들은 불과 몇 달 후에 폐위되고 사망한다. 니이가사 소생이던 간무에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코닌의 자식은 5남 7녀였는데, 후지와라 가문은 간무를 내세운다. 반대측이 적통성을 문제삼자 "내 어머니는 백제의 왕족"이란 말로 이를 잠재우고, 간무는 황태자에, 어머니는 황후에 책봉된다.
간무가 속일본기를 편찬하여 니이가사에 대해 서술할 때 동명성왕의 출생까지 거론한 것은 무령왕은 온조왕의 후손이며 온조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자인 주몽의 아들이니 곧 간무 자신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나타낸다.
그동안 천황가가 백제계와 관련있다는 학설은 일부 학자들에게서만 나올 뿐이었는데[12] 이때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인들이 차지한 한반도" 운운하며 "지금의 한반도는 백제와 무관한 나라"라는 망언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아키히토보다 한술 더 뜬 사람은 일본황실이 조선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에 천황가의 풍습이 한반도와 비슷한 점을 소개하며 동의했던 쇼와 덴노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당시엔 '태평양조선인평화탑'(太平洋朝鮮人平和塔)에 참배했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
2017년 9월 20일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가 사이타마현 히다카 시에 있는 고마 신사(高麗神社)를 방문했다.[13] 역대 천황 가운데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아키히토 덴노가 처음이라고. 참고로 고마신사는 130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자 도래인인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에 일본 내에서 고구려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함으로써, 한국에게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를 내비쳤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신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신사를 둘러보던 아키히토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2019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황태자였던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현 상황)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14] 외무상이 1986년 3월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었다.#
2020년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도 첫 해외방문을 한국으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 요구에 수반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일본은 보수 우경화 흐름이 강해지면서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5. 평화주의자
역사관,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침략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으며, 평화헌법의 가치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
대표적인 발언은 아래와 같다.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과 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국 수교 20주년차로 베이징 방문 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방일 만찬 때)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 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당시, "통석의 염(痛惜の炎)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가 한 말이다.[15] 이 발언은 제대로 된 사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저것도 사과라고 하는거냐'며 비난을 받는 경향이 강한데, 이에 이원복 교수는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탄에서도 해당 발언을 언급하며 일본인들의 체면을 고려한 우회적 표현을 몰라서 무작정 분개한 것이라고 봤다.[16]"전쟁 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평화로운 세월을 회상하고 이를 되돌아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2018년 8월 15일 임기 마지막 전국 전몰자 추모식에서)
실제로 아키히토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이 없다.''' 극우 세력 일각에서는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17]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황태자 시절 참배한 적이 5회 있다"고 썼지만 아키히토 덴노가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른 건 1952년이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공개적으로 A급 전범을 합사한 건 1978년 이후로, 1975년 이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은 전임 히로히토와 마찬가지로 아키히토가 A급 전범 숭배에 동조한다는 근거는 일체 없다. 극우 세력에서 은근슬쩍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반달을 일삼는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특성상 이 또한 극우 세력의 날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참배는 안하는 대신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祭)를 지낼때 보내는 공물을 매년 해마다 보내기 때문에 실제로 안간다고 해도 암묵적으로 A급전범들을 추모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결국 위 발언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지위를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 덴노의 성향은 반(反) 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생생히 겪은 전쟁의 아픈 기억(지독하고도 처절한 전쟁의 참상과 비참함 그리고 죽음의 공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키히토는 11살 때이던 1944년, 그 초등학생 나이에 몇 달 동안 연합군 작전으로 퍼부어진 전국 대공습, 어뢰작전으로 인한 사람들의 대규모 아사, 원자폭탄이 낳은 절대적인 파괴라는 ''''전쟁의 비참함''''과 방공호에 몇 달 간 틀어박히며 전쟁이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려야만 했던 ''''압도적인 공포''''까지,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공포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 생생히 아니 정말 처절하게 실감해야만 했다. 처음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직후 천황과 황족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천황에게 "현인신이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며 원망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그러한 참상과 원망이 충격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
또 같은 해 방공호에서 피난생활을 할 당시에는 군대의 참모 부관에게서 '''카미카제[18] '''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그럼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 뿐 아닙니까?"'''라고 물어서 기고만장하던 일본군 부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등, 사람 목숨을 벌레 취급하던 일본군의 잔혹함과 어리석음도 직접 보아온 것이다. 이러니 극우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전쟁세대로서 누구보다 잘 아는 셈이다.
2011년 3월 15일 토호쿠 대지진(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저를 생각하지 말고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TV 도쿄는 천황폐하의 담화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정규방송을 돌렸는데 그 소식을 듣고도 "문제없다"며 넘어갔다고 한다.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하여 '주권 회복의 날'(ご主権回復の日)을 일본 내각이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격상하였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군정 체제를 벗어난 것을(주권 회복) 기념함과 동시에, 미군정 때 만들어진 현행 일본국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행사인만큼 내각이 참석을 요청하면 천황으로서도 실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아키히토는 '''행사 내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황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과거 '''아버지 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천황의 동의(재가)없이 멋대로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참배는 커녕 근처에도 안 갔다는 사실'''[19][20] 을 감안하면 내심 평화헌법(일본국헌법)을 유지하려는 아키히토 입장에서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덴노 헤이카 반자이'도 얼핏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워 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신배들[21] 의 속셈이 뻔한데 아키히토 입장에서 유쾌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 내의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는데, 현재 언론은 아베 신조의 개헌 중에서 자위대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국가원수로 명문화되지는 않은 천황을 '''개정 헌법에서 다시금 일본국의 국가원수로 명문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천황을 일본의 상징으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휘두르던 군국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쪽 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민당과 연립정부인 공명당의 결사 반대로 빠지긴 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아베 신조 총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천황은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공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고쿄에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는 아키히토 재위 기간 내내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사적으로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
일본 내 극좌파들도 천황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심심하면 주장하지만, 아키히토 개인의 인격(인성)에 대해선 비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쇼와 덴노를 전범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들도 아키히토와 나루히토 부자의 인격은 칭송하기 때문에 천황제 폐지 주장도 즉각 폐지보다는 남성 황족들의 씨가 말라서 천황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유보하자는 입장이 주류다.
2013년, 야마모토 타로가 초선 의원이던 시절 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황거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천황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 천황이 왜 편지를 즉석에서 보거나 자신이 갖지 않고 시종장에게 편지를 넘긴 게 현명한 판단인지는 야마모토 타로 문서로.
거기에 더해 패전 70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녹음(옥음방송) 원판 사진과 고음질 디지털 녹음본을 2015년 8월 1일에 전격 공개했다. #(일본어) mp3
천황 일가의 굴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항복 녹음(옥음방송종전조서)을 디지털로 세심하게 복원해 공개한 것은,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돌아보면서 반성하자"는 것. 참고로 이 원본을 이용한 디지털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의 항복 선언 녹음본은 음질이 매우 열악했다. 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를 참고할 것.
이런 좋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일본 내 속사정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라 일본에 대하여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그냥 '일본 높으신 분=나쁜놈'이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에 아키히토 천황까지도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아키히토는 명백한 평화주의자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아키히토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일부 못 배운 한국인들은 '평화주의자는 개뿔!'이라는 말까지 내뱉을 정도로 아키히토 역시 그저 쪽바리 중 하나 정도로나 취급할 정도로 평판이 상당히 박한 편에 속한다.[22]
후술할 1992년 MBC <분노의 왕국> 천황 암살미수 장면 파문 외에도 한일 무역 분쟁 초기에는 아키히토를 무슨 80년대 반공물에 나오는 김일성 마냥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단지까지 등장했을 정도. 정작 아키히토는 한일 무역 분쟁의 진짜 주범인 아베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고수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국가의 상징이라는 이유만으로 알지도 못하고 비난을 가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1998년 가을, 일본 문화 개방과 인터넷의 대중화로 진면목이 꽤 알려졌는지 까방권 비슷한 것을 얻어, 그와 관련된 뉴스의 댓글 창에도 긍정적인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의 뉴스 댓글들이 꽤나 과격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례적인 경우. 국내에서의 천황의 이미지가 좋아지다 보니, 아베가 한국에서 까일만한 일을 했을 때 뉴스 댓글창에 '덴노 헤이카 반자이'로 도배되는 요상한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6. 대중 매체에서
1992년 4월 6일 MBC 드라마 <분노의 왕국> 1회 천황 암살미수 파트에서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식 때 퍼레이드 장면이 삽입된 바 있었는데,[23] 주인공 이하연(변영훈 분)이 재일교포 브로커(최불암 분)에게 몰래 권총을 구해 즉위식 날 구경꾼 속에 숨어서 아키히토에게 총을 쐈으나, 암살에 실패한 후 경찰에 잡히는 식으로 나왔다.[24] 방영 이후 가토 고이치 일본 관방장관이 먼저 항의 의사를 밝힌 후 야나기 겐이치 주한 일본대사가 노장희 한국 외무부차관에게 항의했고, 우익단체들도 주일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요코하마 주일한국총영사관까지 난입했다.
이에 MBC 측도 창작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맞섰으나, 결국 방송위원회는 "가상의 사건을 사실로 오인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주의' 조치를 내렸다. (관련 영상, 관련 기사, 에피소드 내용 정리)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시즌 10 23화에서 심슨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스모 경기장에서 등장했는데[25] 그를 스모 선수로 착각한 호머 심슨에게 집어던져져 마와시(샅바) 담는 통에 쳐박혔다. 당연히 호머 심슨은 일본인 관객들에게 쓰레기 세례를 받았고, 일본 경찰에게 교육을 받다가 마지가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일설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는 천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방영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디 심의기관에서 방영금지처분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이 에피소드를 건너 뛰었다. 한국에서 왜색을 이유로 에피소드를 건너뛰는 상황과 같다고 보면 된다. 천황을 던지는 장면이 있어 방영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게 아니라, 그냥 건너 뛰었기 때문에 천황 관련 장면 때문에 방영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정발 DVD에도 이 에피소드는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 말고도 방영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몇 개 더 있다.
소설 원작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도 등장한다. 직접적인 이름 언급은 없고 그저 황태자, 전하(皇太子 殿下)라고만 언급이 된다. 배우는 츠지 다이스케.[26] 일본에게 병합된 태평양 연안 미주 지방을 방문하게 된다. 황실은 이미 군부의 꼭두각시가 되고 독일과 벌어지는 격차를 걱정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이미지로 나온다.[27]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양 연안의 자국민들에게 연설을 하다가 저격을 당하고 중태에 빠진다. 이후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언급만 나온다.
7. 기타
아버지 쇼와 덴노처럼 어류학자로서 일본 어류학회 명예회원이기도 하고, 사이언스와 네이처 논문을 포함하여 논문 28편을 발표했다.[28] 한편 천황이 되기 전에 했던 연구중에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던 망둑어 분류법을 제안하였는데, 현대에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린네 탄생 300주년에 런던 린네 학회의 키노트에서 밝히기도 했다. #
2008년에는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사이좋게 1, 2저자를 먹으며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Akihito, Fumihito A et al.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 황실은 성(姓)이 없기 때문에, 저자 목록에 그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궁호(宮号)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성'으로 등재.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고, 딸 구로다 사야코도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물총새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일종의 집안 내력인 듯.
오랫동안 망둑어[29] 연구를 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망둑어 종이 2개, 속이 1개 있다. ''Platygobiopsis akihito''와 ''Exyrias akihito'' 두 종과 바누아투와 월리스 푸투나 근방에 서식하는 Akihito속. 실험이 예상과 달리 잘 안 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 2019년 퇴위를 앞두고 천황으로서 마지막으로 망둑어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는 데 그 자리에서 다른 논문도 검토 중이라고 하므로 퇴위 후에는 편하게 연구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 시절 미국에서 블루길을 생포해 처음으로 일본에 들여왔다. 현재 일본에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블루길의 선조이기 때문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외국 방문이 3차례 (미국, 영국, 네덜란드) 뿐이었던 히로히토와 달리 미국, 중국,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의 해외순방이나 지방순례,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 발생시 피난소 현장 방문도 상당히 흔해서 인기가 높은 편[30] 이며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일본 내에서 천황제에 대한 자발적인 호의도가 상당한 편이다. 참고로 2003년에 이르러 일본의 전체 도도부현을 모두 방문했다.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듯하여, 해외순방시 따로 번역가 없이도 해외의 수상들과 무리없이 대화한다. 그 외에 짧지만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포착 되기도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아키히토는 젊은 시절 잠깐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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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폐막식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키히토 덴노가 더 들어가라고 손짓한 걸 김대중 대통령이 못 본 거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저기서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밖에서 만난 후에 같이 들어온데다, 일반적으로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절 교육을 받았을 아키히토 덴노가 악수를 왼손으로 청할 리가.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직접 영어를 쓰며 빌 클린턴을 환대하기도 했다.
훗날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하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2015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순방을 검토하기도 했었다고 NHK 방송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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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차로는 2세대 토요타 센추리 로얄 리무진 외에 위 사진과 같이 세단형 센추리로 목격되는 일도 많다.[31] 천황의 차량 탑승시 천황의 위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이다. 즉 인도와 가까운 쪽 자리에는 앉지 않는다. 이 자리는 황후의 자리가 된다. 이유는 테러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는 1991년 식 혼다 인테그라 4도어 세단 모델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부부가 테니스 치러 갈 때 직접 운전한다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32] 참고로 황태자 시절에는 노란색 비틀을 몰았다. 사실상 천황 중에선 처음으로 보통운전면허 정식 취득 및 자가용을 소유했다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기준.
대한민국 군인 중 김근태 예비역대장과 많이 닮았다.[33][34]
생전, 퇴위 발표 이후에 천황의 생일과 신년에 궁중에서 하는 일반인의 축하 행사에 참가하는 관광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JR 히가시니혼이 관리하는 일본 황실 전용 특별열차[35] 가 있고, 이를 위한 천황 전용 시설이 도쿄역, 하라주쿠역에 있는데 정작 본인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시설을 사용하려면 의전 같은 각종 준비를 해야 하는데[36] 이 과정에서 다이어가 망가져 국민들이 불편을 겪을까 염려해서라고.[37][38] 그래서 왠만해서 황실 전용 특별열차보다는 신칸센을 타고 다니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이는 생전 퇴위 후에도 마찬가지
일본의 역대 천황 중 여성 천황과 요절한 천황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은, 다시 말해 면도한 천황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1989년 이전에 태어나 만 29세 이상인 사람이 아키히토 덴노가 퇴임하는 2019년 4월까지 결혼하지 못하는 일본 청년들이 자신들을 천황의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본떠 ‘헤이세이 점프(jump)’라며 자조하듯 불렀다고 한다. 이에 덩달아 SNS에서 “헤이세이점프!”[39] 를 함께 거론하며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천황은 '일본국과 일본국민의 상징인 존재'로서 원래 국민의 의무도 넘어선 '''인간의 탈을 쓴 신'''인 '''아라히토가미(현인신)의 존재'''이지만, 황실의 품위를 위해, 제125대 천황 즉위(即位礼正殿の儀/天皇ご即位) 당시 자발적으로 상속세 4억 2800만 엔을 냈는데, 주민세는 고쿄 주소가 일본 도쿄 도 치요다구라서 치요다구에 납부한다고 한다.
퇴위 이후 2020년 7월 기준으로 황태자 시절에 하다가 천황이 된 뒤 하지 못한 망둑어 연구 활동을 하면서 노후를 즐기는 중이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신종 망둑어를 발견해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