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위
1.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讓位. 군주가 퇴위하여 그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위를 물려받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다른 단어를 써서 세세하게 구분[반정][선양][찬탈] 하므로, 양위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에는 국왕에게서 왕세자로 정상적으로 왕위가 넘어가며, 쿠데타 등의 소동이 없는 평온한 경우에 한정하는 뜻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즉 양위는 광의의 뜻과 협의의 뜻이 다 공존하는 단어다.
거의 모든 군주국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현대에는 평균수명의 증가와 더불어[1] 고령의 군주가 자의로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사례가 늘게 되었다. 죽을때까지 재위하면 다른 노인들이 집에서 편한 여생 보낼때 온갖 관심과 국사행위에 끌려가는 노인학대(?)를 겪어야 하니 일종의 은퇴의 의미가 된 듯. 90대까지 현역 재위중인 엘리자베스 2세가 괜히 대단하단 말을 듣는게 아니다.
1.1. 한국에서의 양위
조선시대에 양위를 한 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고종이 있다. 이중 태조와 정종과 단종은 쿠데타를 겪고 사실상 강요당해서 양위한 것이고 고종도 일본에게 강요당하여 양위한 것이니, 스스로의 의지로 양위한 왕은 태종과 세조 둘인데, 세조는 급격히 몸이 안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양위한 다음날에 사망하였으니, 당장 건강의 이상이 없으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양위한 왕은 태종 뿐이다. 물론 그냥 왕노릇 그만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니고, 세자를 첫째에서 셋째로 갈아치우면서 새 세자가 왕으로 무난하게 즉위하게 하기 위해서 양위한 것이다.[2]
그런데 왕이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주로 임금이 자신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양위발언을 즐겨 한 왕은 태종, 선조, 영조가 있다. 태종은 당시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쇼를 벌여 왕권을 강화하고 낚시에 걸려든 외척과 권신들을 숙청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는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양위쇼(...)를 반복했다.
실권자가 아직 실권을 쥐고 있는데 양위하겠다고 할때 "그러시옵소서"라고 할 신하는 없었다. 당연히 "아니되옵니다"라고 하는데 말꺼낸 실권자가 그냥 말을 거두지는 않으니, 보통 이런 양위쇼가 발생하면 세자를 비롯해서 문무대신들이 그야말로 "죽여주시옵소서" "주상께서 강녕하신데 양위가 어인 말씀이옵니까?"라고 석고대죄 모드가 되기 때문에 양위 이벤트를 펼치고 나면 임금의 권위가 올라간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후일 보위를 이을 세자는 왕의 양위를 막기위해 자신의 단점을 두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백하는 사실상 자아비판을 해야해서 세자의 위치를 약화시킨다는 단점도 존재하였다. 여러번 양위 소동을 겪은 양녕과 광해와 사도 모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일탈에 빠졌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 때문에 왕이 진짜 왕위를 넘겨주려면 세조의 경우처럼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거나 태종의 경우처럼 따로 신하와 비밀리에 협의를 마치고 넘겨줬다.
일단 양위가 확정되어 옥새와 관이 세자에게 넘겨지면 그때까지 궐에서 엎드려 통곡하고 상소올리던 신하들 모두 즉시 곡을 그치고 즉위 준비에 들어간다. 이미 왕이 바뀐 상황에서 한마디라도 더했다간 선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새로운 왕 더러 꺼지라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양위까진 아니더라도, '''세자책봉'''[3] 과 '''대리청정'''[4] 역시 비슷한 효과를 냈다. 오늘날에는 대통령, 수상이 '''재신임'''을 거론하면 비슷한 반응, 효과를 낼 수 있다(...).
1.2. 일본에서의 양위
중세 일본의 천황은 후계자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서 인세이를 행하는 것을 사실상 관습으로 하였다. 그것이 전형으로서 확실히 굳어진 것은 시라카와 덴노가 인세이를 행한 뒤였다. 그 뒤로 꾸준히 천황은 양위 후 상황[5] 이 되어 양위 후 살기 위하여 마련된 고쇼인 센토고쇼를 짓고 살았다. 그러한 전통이 일시 단절되었던 것은 고츠치미카도 덴노가 양위치 못하고 죽은 이후였다. 이 시기는 바로 그 유명한 오닌의 난과 메이오 정변이 있던 시기, 즉 센고쿠 시대 초기였다. 전국이 개막한 뒤 조정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었기 때문에, 고츠치미카도 이후의 천황은 양위의 의례를 하거나 센토고쇼를 지을 수가 없었고, 거의 그 생을 다함으로서 재위를 끝내게 되었다. 그러한 양태는 오기마치 덴노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기마치 덴노 시기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집권하여 키나이가 안정되었고, 조정의 재정도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였다.
1.3. 기타 창작물에서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4에서는 마왕 엔딩을 볼 경우 마왕이 딸[6] 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겨울왕국 2에서는 엘사가 안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령이 된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楊偉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자는 세영(世英).
풍익 출신으로 조예 때 상서랑을 지내고 237년에 경초력을 만들었으며, 조예가 궁실을 수리하자 궁실을 짓느라 백성들의 묘의 소나무, 잣나무를 함부로 베고 동물 모양의 비석과 돌기둥을 훼손하고 있다면서 죽은 이에게 죄를 짓고 효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 이는 후세의 법칙으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니라면서 간언했다.
244년에 조상이 대규모로 출병을 해 낙곡대전을 일으켰는데, 위군이 촉군의 허장성세에 속아 제대로 진격하지 못하다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도리어 촉군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는데다가 보급 문제까지 겹쳐 어려움에 빠졌다. 이 때 양위는 조상의 참군을 지내 형세를 설명하면서 급히 철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패하리라고 했다.
조상의 면전에서 등양과 논쟁을 했는데, 양위는 조상에게 등양과 이승이 장차 국가의 대사를 망치려 하니 죽여야 한다고 했으며, 조상이 이를 불쾌히 여겼지만 마침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반정] 왕위계승대상자가 국왕의 혈족은 맞으나, 왕위계승순위에서 멀거나 더 정통성이 높은 왕위계승자가 따로 있는데 이걸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다. 쉽게 말해서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선양] 왕위계승대상자가 국왕의 혈족이 아니거나 매우 관계가 먼 경우를 말하며, 국호가 바뀌는 등 사실상 왕국 자체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수립되는 경우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타인이 권력을 얻어서 원래 국왕을 몰아내는 것을 형식 좀 차리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찬탈] 선양과는 달리 그냥 국왕을 바로 단칼에 죽여버리고 즉위하는 경우를 말한다. 보통 국가멸망사태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양위, 반정, 선양 등으로 오른 국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비하적 의미로서 해당 승계를 찬탈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1] 장수왕의 아들은 아버지가 너무 오래사는 탓에 즉위도 못해보고 죽었다(...)[2] 양녕대군은 태종4년부터 14년동안 태종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세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동안 '예정된 다음 국왕'으로서 그의 영향력이 여기저기 있고 폐세자하되 그를 살려두었는데 둘째도 아니고 셋째를 세자로 세웠다면, 태종이 급사라도 한다면 새 세자가 무난하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쉰 가까이 나이를 먹었으니 급사안하리란 보장도 없고, 실제로 양위 4년 뒤에 사망했다. 따라서 미리 양위해서 셋째가 왕으로서 자리를 굳혀두게 하는 편이 좋았다. 사실 혼란기인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미리 넘겨두는 경우가 많았으니(고대 로마제국이나 중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동로마 제국을 보면 후계자를 공동왕으로 미리 즉위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 전국시대엔 후계자에게 미리 당주 자리를 넘기고 자신은 은거자로서 뒤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다.), 급격한 세자 교체 상황에서 태종이 정답을 고른 것이라 볼 수 있다.[3] 선조(광해군 건저파동), 숙종(장희빈의 소생 경종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파동) 등이 대표적이다.[4] 세종이 몸이 안좋아져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시키려 하는 것은 대신들의 반대로 몇년 만에야 성사되었으며, 숙종도 죽기 얼마 전 세자에게 대리청정시킬 때 노론과 소론이 얽혀 정국이 굉장히 불안정해졌다.[5] 출가해서 법황이 되기도 하였다.[6] 친아버지가 마왕, 어머니는 인간이며 마계와 관련된 엔딩들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