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영제

 


'''공자 영제'''(公子嬰齊, ? ~ 기원전 570년)는 춘추시대 초나라영윤이다. 자는 '''자중'''(子重)이다. 초목왕의 아들이자 초장왕의 동생이다.

1. 생애


기원전 598년, 좌윤(左尹)이 되어 송나라를 공격하였다.[1]
기원전 597년,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필 전투에 참여하여 진나라를 대패시켰다.[2]
기원전 589년, 영윤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허나라, 채나라와 함께 위나라, 노나라를 공격하여 안 전투에서 진나라에게 공격을 받던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그해 겨울, 노성공이 영제, 채경후, 허영공, 진(秦)나라의 우대부(右大夫) 열(說), 송나라의 화원(華元), 진(陳)나라의 공손 녕(公孫寧), 위나라의 손량부, 정나라공자 거질(公子去疾), 제나라의 대부와 함께 촉(蜀) 땅에서 회맹하였고, 공형(公衡)을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기로 하였다.[3] 공자 영제는 송나라를 정벌한 뒤 신(申), 여(呂) 땅을 상전(賞田)으로 받고자 하였으나 신공(申公) 무신(巫臣)이 이를 저지하였다. 이후 무신이 진나라로 달아나자 공자 영제는 사마(司馬) 공자 측과 함께 무신의 일족 및 청윤(淸尹) 불기(弗忌), 연윤(連尹) 양로(襄老)의 아들 흑요(黑要)를 죽였다. 공자 영제는 무신의 일족 중 한 사람인 자염(子閻)의 가산을 얻었다.[4]
기원전 585년기원전 584년, 공자 영제는 진나라에 의존하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584년, 무신이 공자 영제로 인해 멸족당한 원수를 갚기 위해 진나라에게 오나라와 연합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로 인해 공자 측과 공자 영제는 1년 동안 7번이나 분명(奔命)하느라 피로해졌다.[5]
기원전 582년, 진(陳)나라와 거나라를 공격하였다.[6]
기원전 580년, 송나라의 화원(華元), 공자 영제, 진나라의 난서가 사적으로 우호를 맺고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첫 번째 정전 회의를 달성하였다.[7]
기원전 575년,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언릉 전투가 일어났다. 초공왕이 소차(巢車)에 오르자 영제는 백주리로 하여금 공왕의 뒤에 서게 하였다. 전투 중에 진나라의 난침이 영제를 보고 이전에 그가 진나라 군대를 '정돈과 쉬기를 잘한다'고 평가한 것을 떠올려 진여공에게 영제에게 술을 선물해 호의를 보이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초나라가 전투에서 패하자 영제는 공자 측에게 자살하여 사죄하라고 암시를 보냈고, 공자 측은 자살하였다. 공왕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막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8]
기원전 574년,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기원전 573년, 팽성(彭城)의 어석(魚石)을 구원한 뒤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571년, 영제와 공자 임부가 소국의 재물을 받고 자신들을 핍박한 우사마(右司馬) 공자 신을 죽였다.[9]
기원전 570년, 오나라를 공격하여 구자(鳩兹)에서 이기고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자신은 먼저 개선하여 크게 연회를 벌였는데, 부하인 등료(鄧廖)가 이끄는 조갑차병(組甲車兵) 3백 명과 정예 보병 3천 명이 오나라의 기습을 받아 조갑 80명과 보병 300명 만 남게 되었다. 영제는 소식을 듣고 심병(心病)을 얻었다가 사망하였다.[10]
[1] 《春秋左氏傳·宣公十一年》:楚左尹子重侵宋,王待諸郔。 [2] 《春秋左氏傳·宣公十二年》:子北師次於郔,沈尹將中軍,子重將左,子反將右,將飲馬於河而歸。 [3] 《春秋左氏傳·成公二年》:十一月,公及楚公子嬰齊、蔡侯、許男、秦右大夫說、宋華元、陳公孫寧、衛孫良夫、鄭公子去疾及齊國之大夫盟於蜀。 [4] 《春秋左氏傳·成公七年》:子反欲取夏姬,巫臣止之,遂取以行,子反亦怨之。及共王即位,子重、子反殺巫臣之族子閻、子盪及清尹弗忌及襄老之子黑要,而分其室。子重取子閻之室,使沈尹與王子罷分子蕩之室,子反取黑要與清尹之室。 [5] 《春秋左氏傳·成公七年》:巫臣請使於吳,晉侯許之。吳子壽夢說之。乃通吳於晉。以兩之一卒適吳,舍偏兩之一焉。與其射禦,教吳乘車,教之戰陳,教之叛楚。置其子狐庸焉,使為行人於吳。吳始伐楚,伐巢、伐徐。子重奔命。馬陵之會,吳入州來。子重自鄭奔命。子重、子反於是乎一歲七奔命。 [6] 《春秋左氏傳·成公九年》:楚子重侵陳以救鄭。冬十一月,楚子重自陳伐莒,圍渠丘。 [7] 《春秋左氏傳·成公十一年》:宋華元善於令尹子重,又善於欒武子。聞楚人既許晉糴伐成,而使歸復命矣。冬,華元如楚,遂如晉,合晉、楚之成。 [8] 《春秋左氏傳·成公十六年》:子重複謂子反曰:“初隕師徒者,而亦聞之矣!盍圖之?”對曰:“雖微先大夫有之,大夫命側,側敢不義?側亡君師,敢忘其死。”王使止之,弗及而卒。 [9] 《春秋左氏傳·襄公二年》:楚公子申為右司馬,多受小國之賂,以逼子重、子辛,楚人殺之。故書曰:“楚殺其大夫公子申。”[10] 《春秋左氏傳·襄公三年》:三年春,楚子重伐吳,為簡之師,克鳩茲,至於衡山。使鄧廖帥組甲三百、被練三千以侵吳。吳人要而擊之,獲鄧廖。其能免者,組甲八十、被練三百而已。子重歸,既飲至,三日,吳人伐楚,取駕。駕,良邑也。鄧廖,亦楚之良也。君子謂:“子重於是役也,所獲不如所亡。”楚人以是咎子重。子重病之,遂遇心病而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