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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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제22대 군주이자 제6대 왕. 초성왕의 아들. 이 양반이 바로 춘추오패인 초장왕의 아버지되는 분이시다. 초 성왕의 적장자로 아버지에게 자살을 종용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정복 전쟁을 펼쳤다. 전쟁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는지, 이 사람 손에 멸망하거나 속국이 된 나라만 10개 가까이 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그는 위에 언급한 대로 초 성왕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하지만 초 성왕이 젊고 예쁜 후궁에게 빠져서 아들인 웅직(熊職)을 낳은 후 상신을 폐하고 후처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거기에 반발하였다.
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웅상신은 부하 반숭의 계책을 듣고 궁으로 쳐들어가 초 성왕을 협박해 자결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투월초를 시켜 웅직을 죽였다.[1] 그 공로로 반숭은 태사가 되었다.[2]
2.2. 치세
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아무튼 이런 유혈 사태를 거치면서 왕위에 오른 초 목왕은 성왕의 장례를 치르고, 영(靈)이라는 시호를 바치려했으나, 영은 어둡다는 뜻이 있다하여, 어둡지 않다는 뜻이 있는 성(成)을 바쳤다고 한다.[3] 그는 중원 진출의 야욕이 강했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 중원 진출을 엿보았다.
초 목왕 3년(기원전 623년), 진(秦)나라와 함께 진(晉)나라에 맞서 싸웠으며, 즉위 초부터 공격한 강(江)나라를 멸망시켰다.
초 목왕 4년(기원전 622년), 육(六)나라[4] 와 요(蓼)나라를 멸했다.[5]
초 목왕 5년(기원전 621년), 진(晉)나라 군주. 진양공이 죽자 조돈이 그 아들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영공이다.
초 목왕 6년(기원전 620년), 진(晉)의 대부 조돈은 강대해지는 초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진(陳)나라, 정나라, 허나라, 조나라 등과 동맹을 맺었다.
초 목왕 8년(기원전 618년) 여름에 진(陳)나라가 진(晉)나라를 따르자 열받은 초 목왕은 진(陳)나라를 쳤다. 호구 땅에서 크게 싸워 공자 주를 이기고, 공자 벌을 포로로 잡았다.
초 목왕 9년(기원전 617년), 송나라, 정나라, 진(陳)나라 등을 굴복시켰다.
초 목왕 10년(기원전 616년), 장군 성대심을 보내 균나라를 쳤다. 그리고 균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중원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초 목왕 11년(기원전 615년), 영윤 성호가 죽자, 성가를 그 후임 영윤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에 서(舒)나라가 초나라를 배신하자 초 목왕은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 서나라를 치니 서나라 군주는 포로로 잡히고, 덤으로 종(宗)나라 군주도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이왕 공격한 김에 소(巢)나라도 쳤다. 그렇게 하여 초나라는 강회 지역에 세력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
초 목왕 12년(기원전 614년), 초 목왕이 죽으니 그 아들 웅려가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춘추오패인 초장왕이다.
[1] 근데 이 투월초라는 양반이 초장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양유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2] 바로 동탁이 자칭한 바로 그 벼슬이다.[3] 그런데, 일설에는 초 성왕의 시신이 영이라는 시호를 바치자 눈을 감지 않으니 성이라는 시호를 바치자 눈을 감았다는 말도 있다.[4] 훗날 초한지에 등장하는 영포의 고향인 육현의 이름이 바로 육나라에서 나온 것이다.[5] 당연히 이때는 거란족이 없었으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는 엄연히 다르다. 한자도 여기에 언급된 요나라는 蓼(여뀌 료(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遼(멀 료(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