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image]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조경이다.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의 출생설화와도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의 인공호수 월지(안압지)보다 40여년 먼저 만들었으며, 신라 안압지 조경 역시 궁남지로 대표되는 백제식 조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관련기사
2016년 8월 KBS 대전총국은 '백제정원 궁남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영상의 초반부까지는 지역 명소에 대한 자랑과 스토리텔링이 담긴 평범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였으나... '''영상의 20분 부터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곳이 궁남지라고 단정지을 발굴성과도 없었고, 섬위의 정자(포룡정)와 다리는 문헌자료에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이후의 발굴조사에서도 백제시기의 유물은 발굴되었지만, 왕궁 정원의 흔적이라고 할만한 유물들은 없었다는 사실등을 근거로 현재의 궁남지는 사실상 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정원이라 주장했다.
고고학계와 조경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사안이지만, 아직 다큐멘터리나 대중서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적은 없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나... 지역방송 영향력의 한계인지 큰 반응은 없었다. 부여군에서조차 큰 이슈는 되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이 방송을 보고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이를 익산천도론의 근거로 삼기 위해 조사용역을 실시했다는 후문이... 전북도민일보 기사
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조경이다.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2. 세부내용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의 출생설화와도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의 인공호수 월지(안압지)보다 40여년 먼저 만들었으며, 신라 안압지 조경 역시 궁남지로 대표되는 백제식 조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3. 현재의 궁남지는 백제의 궁남지가 아니다?
관련기사
2016년 8월 KBS 대전총국은 '백제정원 궁남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영상의 초반부까지는 지역 명소에 대한 자랑과 스토리텔링이 담긴 평범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였으나... '''영상의 20분 부터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곳이 궁남지라고 단정지을 발굴성과도 없었고, 섬위의 정자(포룡정)와 다리는 문헌자료에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이후의 발굴조사에서도 백제시기의 유물은 발굴되었지만, 왕궁 정원의 흔적이라고 할만한 유물들은 없었다는 사실등을 근거로 현재의 궁남지는 사실상 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정원이라 주장했다.
고고학계와 조경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사안이지만, 아직 다큐멘터리나 대중서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적은 없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나... 지역방송 영향력의 한계인지 큰 반응은 없었다. 부여군에서조차 큰 이슈는 되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이 방송을 보고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이를 익산천도론의 근거로 삼기 위해 조사용역을 실시했다는 후문이... 전북도민일보 기사
4. 여담
5.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궁남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궁남지
- 고고학사전 : 궁남지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 궁남지
- 대한민국 구석구석 : 궁남지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궁남지
- 두산백과 : 부여 궁남지
6. 사적 제135호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궁남지 → 부여 궁남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