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백제)

 


'''백제 제30대 건길지'''
'''武王 | 무왕'''
[image]
정부표준영정 / 2001년, 최웅 作
'''시호'''
무왕(武王)
'''별호'''
무강왕(武康王)
'''성씨'''
부여(扶餘)
''''''
장(璋)[1]
'''왕후'''
사택왕후(沙宅王后),[2] 선화공주(善花公主)(?)[3]
'''왕자'''
부여의자(扶餘義慈), 부여새상(扶餘塞上)[4], 부여교기(扶餘翹岐),부여충승(扶餘忠勝)(?)[5]
'''부왕'''
법왕(法王)(?) / / 귀실씨(鬼室氏)(?)
'''생몰연도'''
음력
580년경[6] ~ 641년 3월
'''재위기간'''
음력
600년 5월 ~ 641년 3월 (41년)
'''능묘'''
금마저 쌍릉
1. 개요
2. 생애
2.1. 출신 성분
2.1.1. 법왕 서자설(삼국사기)
2.1.2. 위덕왕 서자설(북사)
2.1.3. 진사왕 후손설(오우치씨 족보)
2.1.4. 문주왕 후손설(신찬성씨록)
2.1.5. 동성왕 후손설(삼국유사 기이편)
2.1.6. 고조선 준왕 후손설(고려사)
2.2. 서동 설화
2.2.1. 서동 설화 신빙성 논란
2.3. 전쟁과 외교
2.4. 토목 공사
2.5. 금마저 천도 계획
2.6. 죽음과 유골 발견
3. 평가
4. 삼국사기 기록
5. 미디어에서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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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 上弘正法, 下化蒼生.

대왕 폐하(大王陛下)의 연수(年壽)는 산악(山岳)과 같이 견고하시고, 보력(寶曆)[7]

은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하소서. 위로는 정법(正法)[8]을 널리 알리시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소서.

미륵사를 세우며 무왕을 위해 바친 기도문. 미륵사 사리함기에서 발췌.

백제의 제30대 국왕이자 건길지. 서동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재 유골이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 왕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신 성분


출신이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정설이지만 이 설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 사서인 《북사》의 오기로 인해 생긴 오해로 판단하고 있다.[9] 대체로 지방 귀족 출신[10]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11] 여러 가지로 보아 신분은 어쨌든 혜왕 내지 법왕 때까지만 해도 무왕의 처지가 중앙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만은 분명하다.
용의 아들설이라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왕이나 왕족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2.1.1. 법왕 서자설(삼국사기)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며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법왕의 아들이 맞다는 가정하에 서동 설화를 유추하자면 적자가 아니고 서자 혹은 얼자이거나 양자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 분명히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기에 서동 설화와 종합해보면 몰락 왕족의 후예 또는 법왕의 서자나 얼자로 익산 지방에서 태어나[12] 마(麻)를 캐며 살다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된다.[13] 당시 상황을 유추해봤을 때 큰할아버지인 위덕왕의 슬하에 아좌태자가 있는데 아좌태자에게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있는지는 기록이 없고 할아버지인 혜왕 역시 아버지 법왕과 무왕 본인 말고는 다른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무왕이 왕위를 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있는데 이 설에 따르면 용이란 바로 법왕을 뜻하는 것으로도 여길 수 있다.[14]
《북사》를 제외한 중국 측 일부 사서[15]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부여융의 후손인 부여문선의 비석에는 부여관(夫餘寬)의 아들 부여장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문제는 원본인 부여문선의 비석이 현재는 소재 불명이고 실학자 이규경이 비문의 내용을 필사한 기록만이 있어서 논란이 있다. 부여관의 정체에 대해 그가 백제 법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관(寬)이라는 글자가 법왕의 이름인 선(宣)을 관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라는 주장이 있다.

2.1.2. 위덕왕 서자설(북사)


《삼국사기》의 주장과 달리 《북사》에 근거한 위덕왕 아들설도 존재한다. 또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외에 금강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해서 무왕을 얻었다는 설과 무왕이 밖에서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었다. 무왕(장, tiang)이 위덕왕(창, thiang)의 이름과 유사한 것도 무왕이 위덕왕 계승 의지를 표현했기 때문. 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 쪽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하지만 정작 《북사》에는 혜왕과 법왕의 존재가 빠지고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통이 바로 넘어간 것으로 나오는 까닭에 왕통이 잘못 기록된 정황이 명백하다.
참고로 SBS 사극 서동요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 덕분에 무왕이 역사상 자기 아버지인 법왕을 강제 자살시키는 패륜 행각이 나온다.

2.1.3. 진사왕 후손설(오우치씨 족보)


위덕왕 아들설과 법왕 아들설 등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견이 분분했지만 1398년 일본 규슈의 영주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정종에게 자신의 조상이 부여명농의 셋째 아들 부여의조라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오우치 씨의 족보[16]를 보내면서 새로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진이왕진손왕의 현손이다. 그러나 해당 족보는 직계가 아닌 왕계상 계승을 나타내고 있어서 정말 그가 무왕의 아버지인지는 논란이 많다.

2.1.4. 문주왕 후손설(신찬성씨록)


노중국 계명대학교 교수가 주장한 설로 위의 삼국유사 기사 외에도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지명에 아버지인 의자왕, 할아버지인 무왕의 이름만 있고 당시 일반적인 귀족 묘지명과 달리 증조부의 이름이 없는 점을 근거로 무왕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귀실씨인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점을 들어 무왕도 방계왕족 귀실씨의 일원이었으나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여씨로 환원했다는 설이다.# 귀실씨는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문주왕의 후손이 부여씨에서 분적하여 만들어진 가문이다.

2.1.5. 동성왕 후손설(삼국유사 기이편)


삼국사기에는 '493년 3월 동성왕(東城王)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이다.'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름으로 '말다(末多)'라는 이명도 나왔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딸이 둘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동요에 나오는 진평왕 셋째딸 설은 일연만 주장하는 여자다. 즉, 서동요에서 '마동' 혹은 '서동'은 '모대', '마모', '말다'가 이름인 동성왕이고 서동요는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의 혼인 설화가 가계 전승 및 우상화 차원에서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일본서기삼국사기를 대조해볼 때 명확하게 출자가 차이나는 사람은 문주왕/부여곤지무령왕이다. 문주왕/부여곤지는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해놨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무령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 또는 부여곤지의 아들로 명시되어 있다. 일본서기 측 기록을 신뢰하고 본다면 개로왕과 부여곤지의 관계가 형제에서 부자 관계로 변경된 것은 무령왕의 생부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해서 양자 모두와 직계로 연결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동성왕과 무령왕의 관계가 형제/사촌형제에서 부자 관계로 변경된 것은 명확한 사유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부여곤지는 동생이 아들로 위조된거지만 무령왕은 형이 아들로 위조된거다. 이에 이들의 관계가 훗날 즉위하는 동성왕의 후손인 무왕에 의해 무령왕의 직계 후손을 동성왕~무왕 사이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1.6. 고조선 준왕 후손설(고려사)



2.2. 서동 설화


서동 설화의 주인공 서동이 무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무왕(서동)은 본래 백제 왕족의 혈통이지만 가문이 몰락한 방계 왕족으로 어릴 적에 가난하게 살며 를 캐고 살다가 신라에서 아내도 구하고 이후 도 구하고 인심도 얻는 과정을 거친 뒤 백제에서 왕에 오른다.
위와 같이 흔히 무왕과 서동이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본(古本. 옛 기록)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고 하였지만 일본의 여러 문헌에 의해 오히려 무강왕이 무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7]
무왕과 관련된 걸로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유명하지만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이 정말 무왕인지는 불분명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이나 이 역시 불분명한 상태. 이에 대한 상세 내용은 서동요 항목 참조.

2.2.1. 서동 설화 신빙성 논란


2015년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자가 무왕의 비인 사택왕후(沙宅王后)로 기록되어 있다. 즉, 무왕에게 익산(금마) 지역의 호족이던 사택(사탁)씨 집안 출신의 왕비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발굴 결과 확인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관련 내용에 등장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백제 무왕이 신라 왕족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설의 신빙성 역시 덩달아 높아진 상황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의 국왕들에게 결혼이란 정치적 행동의 일부였고 따라서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호족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거나 동시에 여러 비를 두는 일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사항 때문에 무왕의 비는 신라 공주가 아니라 익산 호족의 딸이었다고 보는 것은 당시의 결혼 개념을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다. 그냥 왕비가 둘이나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8]
무왕의 능은 충청남도 공주시(웅진)도 아니고 충청남도 부여군(사비)도 아닌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나 이 역시 서동 설화와 관련된 논란거리다. 고려 시대에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 시대의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신왕리에서 나온 발굴품들을 2016년에 대한민국 학자들이 재조사해보니 출토된 유골이 20대~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제 토기가 있어 매장자가 신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왕족급 여성인 선화공주가 아니냐는 추정이 새로 나왔으며 추정을 따르면 사택왕후와 선화공주가 서로 모순이 없게 된다.기사
하지만 이 주장을 하는 이주헌은 신라 고고학의 고분 연대에 관해 화두인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를 왕(마립간)이 아닌 갈문왕에 비정하는 등 학계에 파격적인 설을 주로 전파하여 언론의 관심을 끄는 학자이므로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쌍릉 보고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치아 분석 결과는 마모흔 분석에 의해 도출된 결과로 그 한계를 치아 분석 보고자 스스로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쌍릉은 정식 발굴 조사된 무덤이 아니며, 따라서 그 치아에 대한 고고학적 정황도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자연 과학적 분석 기법은(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목륜 연대 측정, 인골의 DNA 측정 등) 고고학적 정황과 부합하여야 그 결과가 고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고학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즉, 쌍릉의 치아 분석 결과는 그 측정 방법의 한계와 고고학적 정황의 부재 때문에 크게 취신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전주 박물관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대왕릉 출토 신라 토기라는 토기가 연질의 명(그릇)으로, 이러한 토기로 신라니, 백제니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되며, 실제로 세미나 당시에 토론자 최완규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즉,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쌍릉능산리 고분군의 석실분과 같은 구조이면서도, 그 중에서도 현실이 좁아져 관이 1개씩 들어가는 후기 형식의 무덤 2기로 되어 있다. 7세기 말에는 능산리 동하총 처럼 사각형이 되는 최후기 형식의 바로 직전 단계에 해당한다. 즉 고분의 고고학적 형식 편년과 무왕의 몰년이 일치하고 있는 점과 능산리에서도 쌍릉과 같은 규모의 무덤은 드물다는 점에서 무왕릉으로 봐도 무방하며, 출토된 목관 장식구들과 장식못들 그리고 목관 자체의 수종이 일본산 '금송'인 점에서 무령왕릉, 능산리 고분군과 일치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면서도 능산리와 다른 점은 무덤이 산 정상부에 입지하면서도 그 봉분의 규모가 현격히 커졌다는 것이다. 능산리 왕릉군이 봉분이 신라나 고구려와 달리 고대하지 않고, 산록의 남사면에 입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이러한 입지는 모두 중국 남조의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입지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나라당나라 황제릉의 영향으로 보인다. 무왕은 대 고구려 견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인정받기 위해 수나라 및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전개했으며, 대왕릉 내에서 출토된 옥제 과대장식구도 북조나 수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이여서 이럴 방증한다. 그리고 639년 봉안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사리외호와 내호에 찍힌 어자문이나 그 밀집도를 볼 때 수나라 말, 당나라 초의 어자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이처럼 수나라 및 당나라와 무왕의 관계는 문헌사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활발한 교류 관계에 있었음이 방증된다.
그러므로 무왕릉의 입지가 산정상부로 변하고 봉분이 고대해진 것은 수당의 황제릉, 그 중에서도 635년 사망한 당 고조 이연의 헌릉이나 636년 사망한 당 태종 이세민의 황후와 이세민의 합장릉인 소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소릉의 영향이 돋보이는데, 당 태종은 황후가 죽으면서 산 자체를 릉으로 삼는 '산릉제'를 처음 창안해낸 황제이기 때문이다. 즉, 익산 쌍릉의 입지 및 봉분 크기의 변화는 당나라 헌릉, 소릉의 영향으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18년 7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쌍릉 중 대왕릉에서 나온 인골은 사실 '''60~70대의 건장한 남자 노인 인골'''이었다는 결과를 발표하고 이 인골이 사실상 무왕의 유골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 방사성 탄소연대를 의뢰한 결과, 620~659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키가 160~170cm로 추정돼 풍채가 건장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한다. 하지만 이 남자 노인 유골은 대왕릉이 도굴당한 후에 누군가 투장한 유골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나, 2018년 이 유골이 무왕의 유골이 맞다고 판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쪽 문단 참고.

2.3. 전쟁과 외교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19][20]
[image]
무왕 재위 당시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신라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재위 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21], 가잠성(椵岑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여러번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과는 의외로 관계가 안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 推古天皇 16年(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 했던걸로 보인다.[22]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무왕의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무왕 초기에 백제와 왜의 관계가 굉장히 안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562년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백제의 낙동강 진출로 이어져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23] 혜왕 - 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관산성 패전 이후 계속 패전만 했던 것과 달리 신라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함으로서 쇠락해가던 백제가 안정감과 함께 자신감을 찾아갖고 이에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무왕의 업적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중외교에서는 중원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간보기를 거듭하며 신뢰를 잃었는데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수나라가 충돌했을 때 무왕은 위덕왕과는 달리 수나라를 돕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군대는 신라로 보낼 뿐이었다. 이런 행보는 당나라가 백제가 아닌 신라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된다.

2.4. 토목 공사


이로 인해 외부적으로 백제가 안정되자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단행했다.
629년에 익산의 사찰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미륵사가 왕흥사라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24]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하였고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궁남지'''다. 궁남지가 통일신라안압지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634년 궁남지를 건설하면서 왕흥사와 같이 언급되지만, 현재 발굴된 부여 왕흥사는 위덕왕 대에 건축된 것이다. 이 왕흥사가 건립되었다는 언급이 위덕왕, 법왕, 무왕의 3명의 왕 항목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익산 등지에 동명이찰의 왕흥사가 건립된 것이 아니라면 왕흥사의 건립자는 위덕왕이다.

2.5. 금마저 천도 계획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저, 오늘날의 익산)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25]

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 (후략)

《관세음응험기》[26]

백제 기사 제석사본탑조.


익산은 무왕의 별도였다.(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

《대동지지》, 김정호

재위 후반기에 무왕은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그는 왕궁 평성을 축조하였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27]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28] 한 가지 확실한건 익산 지역이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것.[29]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완벽한 도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왜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지에 대해 첫째, 고대 왕조가 지배 세력의 교체 차원에서 천도를 단행하던 전례에 비춰보면 무왕이 기존의 사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의 출생지 또는 세력 근거지인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 둘째 대 신라 가야 지방 공격의 전초 기지로서 익산을 활용했다는 의견이 있다.[30]
그러나 의자왕 대에 익산 천도를 포기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의자왕의 등극 과정에서 사비 세력과 타협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선 무왕의 익산 천도가 백제의 지배층 분열의 뿌리가 되어 백제 패망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재위 말기에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 공사가 빈번한 것도 이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규모 행사를 계속 진행함으로서 왕권을 과시하고 지배 계층 인사들을 권위로 내리 누르려는 의도였다는 것.

2.6. 죽음과 유골 발견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승하했다. 사후 당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이후 청룡이 되어 백제를 수호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당나라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러 가던 중에 백마강의 청룡이 일으킨 바람에 막혀 건너지 못하게 되자 소정방이 직접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청룡을 낚아올렸고 결국 청룡을 죽이고 건넜다는 설화가 남아있는데 이곳이 부여 백마강 기슭에 위치한 조룡대(釣龍臺)다.
익산에 있는 익산 쌍릉이 무왕과 무왕 비의 능일거라는 설이 있는데 연구결과 익산 쌍릉이 무왕릉으로 거의 확정되었다. 기사 발굴된 유골이 60-70대 나이에 키가 161-170cm의 건장한 남성이라는 것이 가장 큰 근거이다.
결국 2018년 7월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왕묘에서 출토된 유골은 젊은 여성이 아니라 60-70대 남성이며, 이 유골은 바로 무왕의 유골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2018년 7월 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무왕의 유골이 맞다는 판정을 내렸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원광대 교수의 제의로 무왕의 뼈앞에 학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고 한다.
유골을 연구한 결과 젊은 시절 낙마로 추정되는 척추 부상을 입었고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3. 평가


42년간 즉위하여 혜왕 - 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여 백제의 중흥기를 구축하였다는 호평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무리한 토목 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 또한 받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 치세 전반기까지도 신라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이러한 국력 소모를 백제의 멸망과 관련짓는 것은 다소 지나친 지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한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킨 준수한 치적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동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쇠락해져만 가던 백제의 국력을 되살린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문제는 '''외교적으로 국제적 신의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분명히 백제 역시 수,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나중에 결국 당나라는 백제의 주적 신라와 국가 간 동맹을 맺게 되는데, 위덕왕 때에 비해[31] 무왕은 간을 보는 타산적인 행보를 이어나갔고 그것이 백제의 대중 외교 신뢰도를 깎아먹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이 자신들을 돕겠다고 하면서도 신라를 공격하기만 한 이중적인 모습을 문제삼기 시작한 것은 무왕 때가 아니라 의자왕 때의 일이었지만 중국이 이를 문제삼을 단초를 제공해 버린 건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실제로 당과 백제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는 시점은 무왕이 아닌 아들 의자왕 때다. 의자왕 초창기까지도 당-백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후 백제가 당과의 약속을 져버린 채 여제동맹을 맺어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당과의 사이가 파탄나고 말았다. 특히 655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대놓고 연합해 신라 북방전선을 초토화시키는데, 이 시점부터 당은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이전에 신라와의 동맹에 훼방놓는 백제를 손봐줘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 외에도 재위 후반기에는 무리한 토목 공사로 국력을 소진하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백제 중흥의 군주면서도 결과적으로 백제 파멸의 씨앗도 적잖이 뿌려버린 실로 상반되는 면모를 지녔던 임금인 셈.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무왕 본기'''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 산성을 공격하다
六年春二月 각산성[32]을 쌓다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토우)가 내리다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5. 미디어에서



5.1. 삼국기


KBS의 드라마였던 삼국기에서는 원로배우 최정훈[33]이 맡았다. 신라왕이었던 장인 진평왕이 죽자 신라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오지 않음을 한탄하며 그리됐다면 자신이 백제, 신라 양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호방했다는 사서에 기록된 성격과는 다르게 근엄한 이미지이고 대부분의 정벌은 의자왕자와 그 측근들이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5.2. 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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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사극 서동요에서는 주인공이며 조현재가 연기했다.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 이병훈 PD 사극의 주인공답게 온갖 역경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이겨내고 왕이 된다. 그러나 하필 가장 소수설인 위덕왕의 아들설을 따라 위덕왕의 서자이자 아좌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나오며, 오히려 역사적으로 무왕의 아버지임이 가장 유력하다고 인정받는 법왕은 위덕왕과 아좌태자를 위협하는 악역이자 서동의 적으로 나온다.[34] 결국 법왕의 손에 위덕왕과 아좌태자가 암살당하지만 서동은 와신상담 끝에 법왕을 물리치고 백제의 왕이 되어 백제를 부흥시킨다.
이 사극에서 선화공주[35]는 설화대로 실제 신라의 공주(진평왕의 셋째 딸, 선덕여왕과 천명공주(김춘추의 어머니)의 동생으로 나온다. 서동이 어린 시절 법왕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신라에 피신해 있을 때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 서동이 속해 있는 백제의 기술 집단 태학사가 정변으로 신라에 망명한 뒤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신라 궁궐에 납품을 해, 백제인에다 평민인 서동이 신라 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선화공주는 서동이 평민인데다[36] 백제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서동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백제로 건너간다. 그 뒤 서동이 온갖 역경 끝에 백제 왕이 되자 왕으로서 신라의 공주인 선화 공주에게 정식 청혼해 백제의 왕비[37]가 된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인 진평왕이 선화공주가 백제 왕후가 된 뒤에도 계속 백제에 전쟁을 걸어(...) 백제 신료들이 선화공주를 폐비하자, 사형에 처하자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무왕은 이 상황에서 선화공주를 지키기 위해 친히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다. 무왕이 전쟁에 나갈 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지켜보는 선화공주와 괴롭게 뒤를 돌아보는 무왕의 모습이 인상적. 이후는 실제 역사대로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는 한편 각종 기술들을 연구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했지만, 선화공주는 아버지와 남편의 나라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의 병을 얻게 되어 요절하고 말았다. 다만 드라마의 목적이 무왕의 치세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데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적절한 결말인 데다가, 신라 공주라는 설정과 무왕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 둘 다에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5.3.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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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은 배우정화예술대학교 교수인 최종환. 드라마 계백에서도 초반부에 선화공주가 등장한다. 사택비를 필두로 한 반신라파에게 간첩으로 몰리면서 선화공주는 계백의 아버지와 더불어 신라로 달아나다시피 출궁된다. 그러다가 추격하는 위제단(사택비 휘하 자객단)에게 따라잡히고 종국에는 아들 의자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다. 이런 전개는 선화공주와 대립하는 사택비라는 인물이 무왕 대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을 2009년에 해체하다가 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 중 백제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라고 쓰여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등장 인물이다. 그래서 기존의 무왕 왕비로 알려진 선화공주와 최근에 밝혀진 무왕의 왕비 사택왕후의 대립 설정으로 하여 2005년에 제작된 드라마 서동요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위 부분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의 부여장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나약한 군주 포지션으로서 지못미라는 한 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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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최후의 순간 아들인 의자왕에게 자신보다 강인하고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며 나름대로의 군주론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잘 표현했다는 호평을 듣기는 했다. 그마저도 권력을 쥐고 있던 사택비와 대립하고 살며 사택 가문의 전횡 아래서 자기 권력을 지키기 급급했던 무왕의 피해 의식에 불과하다며 까이는 평이 더 많기는 했다.[38]

5.4.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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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박철호[39]가 연기하는데 신라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던 역사 속 무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재위 내내 신라를 호시탐탐 노릴 만큼 호전적이며 현명한 아들 의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용맹스럽고 호방한 기질을 지녔던 실제 무왕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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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호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처세술과 지모 역시 뛰어나서, 아들 의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계략을 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임하는 장수에게는 막대한 병권을 선뜻 쥐어주는 쿨가이스러운 모습 역시 보여준다.
결국 숙업인 신라 정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 채, 아들 의자왕에게 자신의 과업을 물려주고 눈을 감는다.

6. 관련 문서


[1] 삼국유사 왕력 편에 기록된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헌병이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으로 원래는 파른본에서 或云武康'''名璋'''(혹은 무강이라 하며 이름은 장이다.)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후에 임신본에서 잘못 인쇄하여 或云武康'''獻丙'''(혹은 무강, 헌병이라 한다.)이라고 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다. # 일기사덕의 경우 어릴 때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덕 계통의 백제 관직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2] 대성팔족 중 하나인 사씨. 금석문에서 등장.[3] 삼국유사 기이편.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동성왕비 김씨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4] 부여새성(扶餘塞城)이라고도 한다. 의자왕의 동생, 일본서기에만 등장.[5] 의자왕의 동생이라고도 하고 아들이라고도 한다. 의자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6]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7] 무왕의 치세.[8] '올바른 법도'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올바른 불교'를 뜻할 수도 있다.[9] 《북사》에는 혜왕과 법왕의 존재에 대한 기록없이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걸로 기록되어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과 법왕이 재위 기간이 짧기에 《북사》의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으로 여기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10] 왕족이 아니고 귀족이라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방계 왕족들은 분가하여 독립된 가문을 세우는 경우가 세계사를 막론하고 종종 있었다. 물론 왕족이 아닌 귀족으로 신분이 격하되지만 엄연한 왕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왕실로부터 견제도 많이 당하고 왕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면 해당 가문의 적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왕국부르봉 왕조카페 왕조의 분가였는데,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부르봉 가문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국민공회에 의해 처형당한 루이 16세 처형 판결문의 주문#s-2은 "시민 루이 카페를 단두대 형에 처한다."였다. 즉 부르봉 가문 역시 성씨 자체는 '카페'였다.[11] 일부 학자들은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이 아닌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12] 서동 어머니의 집터와 인근에 있었다는 마룡지가 지금도 존재한다.[13] 사실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조선 철종만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형과 함께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몰락 왕족이라 하더라도 전대의 국왕이 대를 이어줄 왕족이 없다면 양자로 입적되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철종도 항렬상 5촌 당숙뻘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고로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문조)와는 6촌 형제쯤 되고 헌종에게는 7촌 재당숙쯤 된다.[14] 보통 동양에서 또는 이 여성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라고 할 때의 용이나 범은 왕 혹은 왕족이 암행나왔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본다.[15] 《후주서(後周書)》, 《풍속통(風俗通)》,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 등.[16] 오우치 씨의 후손은 오우치(大內) 씨와 오우치씨 종손 가문의 방계인 도요타(豊田) 씨가 현재 존재한다.[17] 마한의 왕으로 알려진 무강왕과 시호가 같은 것으로 보아 마한의 무강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마한의 무강왕은 고조선의 왕 준왕이라는 설도 존재. 그리고 선대의 무령왕일 수도 있다. 녕(寧)과 강(康)이 뜻이 같기 때문.[18]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백제는 관산성 전투성왕이 참살되고 뒤이어 신라와 그야말로 원수와 같은 관계였는데 일개 지방 호족인 사람이 신라 땅에 넘어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19] 때문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백제와 신라 간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20] 선화공주가 신라의 권력다툼에서 패해서 백제로 온것이라 가정하면 선화공주가 신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당장에 기록상으로 신라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쫓겨난 탓에 신라에 엄청난 적대감을 가진 인물이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다.[21] 모산성(母山城), 아영성(阿英城)이라고도 불린다.[22]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태자의 관위와 憲法 시행과 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23] 이는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 신라가 당과 더 긴밀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24] 위덕왕 대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진 부여 왕흥사와 동명이찰이 익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무왕 대에 지어진 왕흥사는 미륵사를 언급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 왕의 원찰을 왕흥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25] 639년, 무왕 40년.[26] 해당 서적은 익산 왕궁리 석탑에서 출토된 세가지 유물을 정확히 맞추었다. "정관 13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 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만은 타지 않았고, 그것을 다시 절에 봉안했다."[27] 다만 제석사는 창건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벼락을 맞고 완전히 불타버렸다.[28] 익산의 왕성은 유적 상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엔 기록이 없다.[29] 전 수도인 웅진성 - 현 수도 사비성 - 별도 금마저 이 세 도시가 후기 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30] 익산은 수도 사비가 있던 부여보다 동남쪽인데 이는 한강 유역보다는 경상도인 신라 내지 영역을 공격하기에 더 유리하다.[31] 다만 위덕왕대와 무왕대는 상황이 많이 달랐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위덕왕대는 바로 전 왕이 신라군에게 전사했으므로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었던 반면 무왕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32] 현재 학계에서는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에 위치한 성미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33] MBC 공화국 시리즈에서는 이한림 장군, 정일권 전 총리 역을 했고 최근작이 2010년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할아버지 역이다.[34] 드라마 상의 설정만으로 보자면 무왕은 혜왕의 조카이자 법왕의 사촌동생이 된다.[35] 이보영이 연기했다. 아역은 최진리인데, 이후 설리라는 아명으로 유명해졌으며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36] 이때는 서동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자신이 평민인 줄 알았다.[37] 본작에서는 신라나 백제의 군주를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극중에서는 황후라 불린다.[38] 여기서 무왕은 아들 의자왕에게 작중 아들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동생인 계백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백은 강렬한 용맹과 현명한 지혜로써 전쟁외교에서 승리하면서도 자애로운 인격과 의로운 성품으로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오직 나라의 주인인 임금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어야 할 능력이고 신하된 자가 가져서는 안될 능력이다. 또 아비는 너의 마음 속에 친동생처럼 생각하면서도 너보다 뛰어난 계백에 대한 우애심과 질투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걸 아는데 네가 아비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다음에는 너의 왕권을 위해서 그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계백이 만고의 영웅이 되었어도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를 제일 따르고 좋아한다면 그럴 필요 없겠지만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보다도 계백을 더 따르고 좋아한다면 마음이 아파도 선택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나라의 우두머리인 임금이 중심에 있던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혼동은 시작되는 법이다. 너는 이 아비가 평생 사택 가문과 권력을 두고 싸우고 살며 어떤 고통과 치욕을 감내했는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지 않았더냐.'라는 유언을 남긴다. 겉보기에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멋져보이는 군주학으로 보일지 몰라도 속뜻을 풀이해보면 '백성들이 왕인 너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충신을 좋아하면 너의 왕권을 위해 상대가 절친한 친구거나 아무리 존경받는 충신이라고 해도 죽이도록 해라. 넌 왕이니까 너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게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인륜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임금의 왕권을 위해서라면 계백처럼 훌륭한 의인을 죽이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올바를 수는 없다. 물론 위덕왕, 혜왕, 법왕 때까지 3대에 걸쳐 무너져가던 백제 왕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혼자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막강한 사택 가문과 30년이 넘게 싸우고 살며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던 무왕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피해 의식이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완벽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있는건데 오히려 이 유언 때문에 의자왕이 능력있는 충신들인 계백, 흥수, 성충을 믿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장군이 계백뿐이냐, 어째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느냐'는 궤변으로 계백을 사실상 유배보내 12년 동안 김유신에게 털린다. 정작 악역으로 나온 무열왕 김춘추는 어린 아이들이 왕인 춘추를 몰라도 유신은 안다고 김유신의 군사적 능력을 부러워하지만 유신이 "허면 폐하께서 신의 칼을 잡고 직접 전장으로 뛰시지요?"라고 말하자 그럴까라며 서로 웃으며 농담하는 사이다. 무왕 논리의 가장 큰 헛점을 보여주는 대사인 셈.[39] 이후 징비록에서는 김성일 역할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