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훈(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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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勳
1911년 5월 15일 ~ 1951년 2월 3일[1]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2] , 호는 목원(木園)이다. 이명은 권봉민(權鳳民)이다.
1911년 경상북도 대구부 인흥면 대곡동(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3] 에서 아버지 권승렬(權承烈)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김해 김씨 김찬수(金燦洙)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화원공립보통학교(현 대구 화원초등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중국 국민당의 특무조직 남의사에서 활동한 바 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창당에 참여하였고 충청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대구부 대봉동에 주둔하던 육군 106연대 부연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부연대장 재직 중에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전도회 김우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1월 31일 저녁 7시 30분경, 대구시 남산동 명덕네거리에서 한 부녀자를 희롱하던 신원 미상의 주한미군을 말리던 중 주한미군 몇 명이 그가 소지하고 있던 호신용 권총을 빼앗으려고 카빈총으로 그의 복부를 쏘아 맞힌 후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권오훈은 시내 해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중태에 빠졌고, 결국 2월 3일 별세하였다.
당시 경찰의 미지근한 대응으로 범인을 검거하는데 실패했으며 유일한 증거물이었던 피투성이 옷을 가져 간 미 8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1964년에 유가족이 죽음과 관련한 정확한 조사 결과와 피해 보상을 미 국무성과 미 8군에 요청하였고, 국회로부터 '권오훈이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증명서까지 받아 첨부했지만 미 8군은 그 때 증거자료가 모두 없어졌다고 통보해 왔을 뿐이었다.
피살후 유가족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맏아들 권혁주는 아버지의 생전 업적과 죽음을 밝혀내는 일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미국, 한국정부는 끝내 권 씨를 외면했다. 이 후 정부가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하자 대구 동구청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진상규명 신청서를 접수한 권 씨는 "이름 모를 미군 병사의 만행과 이를 덮어 둔 미국, 한국 정부 때문에 지난 시간을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며 "제발 올해 만큼은 과거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눈물지었다. #
생전 모든 재산을 일제 시대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 비밀 자금으로 댔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조차 제외됐다. 가족들은 대전 국가기록원까지 찾아가 그의 독립 운동 기록을 찾았지만 관련 서류가 하나도 없었고, 독립 운동을 증언해 줄 그의 지인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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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勳
1911년 5월 15일 ~ 1951년 2월 3일[1]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2] , 호는 목원(木園)이다. 이명은 권봉민(權鳳民)이다.
2. 생애
1911년 경상북도 대구부 인흥면 대곡동(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3] 에서 아버지 권승렬(權承烈)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김해 김씨 김찬수(金燦洙)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화원공립보통학교(현 대구 화원초등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중국 국민당의 특무조직 남의사에서 활동한 바 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창당에 참여하였고 충청남도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대구부 대봉동에 주둔하던 육군 106연대 부연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부연대장 재직 중에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전도회 김우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1월 31일 저녁 7시 30분경, 대구시 남산동 명덕네거리에서 한 부녀자를 희롱하던 신원 미상의 주한미군을 말리던 중 주한미군 몇 명이 그가 소지하고 있던 호신용 권총을 빼앗으려고 카빈총으로 그의 복부를 쏘아 맞힌 후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권오훈은 시내 해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중태에 빠졌고, 결국 2월 3일 별세하였다.
당시 경찰의 미지근한 대응으로 범인을 검거하는데 실패했으며 유일한 증거물이었던 피투성이 옷을 가져 간 미 8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1964년에 유가족이 죽음과 관련한 정확한 조사 결과와 피해 보상을 미 국무성과 미 8군에 요청하였고, 국회로부터 '권오훈이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증명서까지 받아 첨부했지만 미 8군은 그 때 증거자료가 모두 없어졌다고 통보해 왔을 뿐이었다.
3. 여담
피살후 유가족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맏아들 권혁주는 아버지의 생전 업적과 죽음을 밝혀내는 일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미국, 한국정부는 끝내 권 씨를 외면했다. 이 후 정부가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하자 대구 동구청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진상규명 신청서를 접수한 권 씨는 "이름 모를 미군 병사의 만행과 이를 덮어 둔 미국, 한국 정부 때문에 지난 시간을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왔다."며 "제발 올해 만큼은 과거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눈물지었다. #
생전 모든 재산을 일제 시대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 비밀 자금으로 댔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조차 제외됐다. 가족들은 대전 국가기록원까지 찾아가 그의 독립 운동 기록을 찾았지만 관련 서류가 하나도 없었고, 독립 운동을 증언해 줄 그의 지인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