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호
1. 자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재호
권재호는 1870년 6월 1일 평안도 자성군 군내면 읍내동(현 자강도 자성군)에서 태어났고, 1919년 무렵 중국 지린성 몽강현(濛江縣)[2] 에 거주했다. 그는 1919년 10월부터 1922년 8월까지 통화현(通化縣)[3] , 임강현(臨江縣)[4] , 유하현[5] 등지에서 광복단(光復團) 자성군감(慈城郡監), 한족회(韓族會) 통동지부(通東支部) 총관(總官)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교섭과장(交涉課長) 및 사령부(司令部) 분대장(分隊長), 특무부원(特務部員) 등으로 활동하하며, 주로 독립군의 양성과 군자금의 모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1925년에는 참의부(參議府)에서도 활동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권재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봉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권재호
권재호는 1854년 11월 1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춘양현 와단면 한수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서 아버지 권정도(權精度)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세열(金世烈)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6년 1월 권세연을 대상으로 추대한 안동의진의 중군장(中軍將)을 맡았고, 권세연이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뒤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김도화 의병장의 중군장을 역임했다. 또한 호남의 서상렬 의병장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예천 회맹에서 안동의진의 대표로 참석했고, 예천회맹군의 태봉전투에 참가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안동의진이 고종의 칙령을 받아들여 해산된 뒤 자택에 귀가했고, 1903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권재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재호
권재호는 1898년 5월 21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남문내리(현 밀양시 내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화학교(同和學校)에 재학하던 1919년 3월 교장 전홍표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김병환(金甁煥)·이장수(李章守)·윤보은(尹輔殷)·김소지(金小池) 등 동창생들과 함께 만세운동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에서 밤을 세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권재호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권재호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독립만세(獨立萬歲)'라 쓴 큰 기를 들고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부산으로부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밀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6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권재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