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조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혁조는 1923년 6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상동(현 예천읍 상동리)에서 아버지 권오환(權五煥)과 어머니 개성 고씨 고맹훈(高孟勳)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주오대학에 재학하던 중 1944년 1월 20일 소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대구 제24부대[3] 에 배속되었다. 그후 그를 비롯한 한국인 학병들은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한 후 일본군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당시 제1대대 제3중대에 편성된 문한우·김이현(金而鉉) 등의 한국인 학병 6명과 함께 8월 8일 집단 탈출에 성공한 후 팔공산에 입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조선군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고쿠라(小倉)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출옥, 귀국하였으며, 2002년 1월 14일 별세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맏형 권일(權逸)[4] 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와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7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1940년 만주국 연길지방법원 심판관#, 1943년 대정익찬회 조사부#, 1945년 1월 태평양전쟁 협력 단체인 지하공장건설일심회 총무부장#@을 지내는 등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일본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고,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67년 귀국하여 제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를 지냈다.
권일은 생전에 동생 권혁조의 독립운동 경력을 논하면서,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나처럼 일본에 협력하는 입장에 있던 장남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 일로써 세상을 대하는 면목도 섰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