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자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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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3세기에 제작된 귀자모 좌상[1]
1. 개요

鬼子母神

1. 개요


불교의 호법신. 아기의 탄생과 양육을 보호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여신 혹은 보살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하리티(Hārītī)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하리제, 하리저 등으로 음사한다.
귀자모신은 본디 왕사성(인도 라즈기르) 인근에 살면서 왕사성 사람들에게서 아기를 훔쳐 잡아먹는 잔혹한 야차녀였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 만 명[2]에게는 상냥한 어머니였다. 귀자모신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석가모니에게 하소연하자,[3] 석가모니는 귀자모신 슬하의 막내[4]의 모습을 감추었다. 자식이 안 보이자 귀자모신은 애타는 마음으로 세상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석가모니는 귀자모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많은 자식 중 겨우 하나 없어진 것 가지고 그리 야단법석을 떠느냐?"
귀자모신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존재라고 들었건만 아니신가 봅니다." 하고 울면서 따졌다. 부처는 다시 엄하게 훈계하였다.
"'''네가 그 많은 자식 중 하나 잃은 마음도 그리 찢어지게 아플진대, 네게 얼마 없는 자식을 잡아 먹힌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겠느냐?'''"
귀자모신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크게 뉘우친 뒤 부처의 법문에 귀의하였고, 이후 아기의 양육과 보호를 맡는 신이 되었다.[5] 후에 귀자모신의 자식들 중 딸 하나가 길상천이 되었다 한다.
귀자모신은 그림이나 조각 등에선 한 손엔 아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엔 다산을 뜻하는 길상과(吉祥果, 석류)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석류는 마(魔)를 없애는 과일이라고도 하는데, 부처가 훈계할 때 인육을 먹고 싶어지면 먹으라면서 석류를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와전되어서 석류에서 인육 맛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당연히 사실무근이다.
풍요를 상징하는 염소뿔이나 석류를 든 도상으로 보아, 본래 야차들이 그렇듯 비아리아계 인도인의 풍양신이었다고 추정한다. 네팔 카트만두의 스와얌부나트 사원 곁에 귀자모신을 모시는 작은 당이 있는데 인근 주민들이 매우 중요시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 상이라는 이유로 서양의 피에타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 듯.
<귀자모신의 꿈>이라는 쯔꾸르 게임이 있다.
쏜애플의 곡 '석류의 맛'은 이 귀자모신 설화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곡이라고 한다.
용과 같이 시리즈에는 '''귀자모신의 부적'''이란 장비가 있다. 장비의 효과는 거리에서 만나는 적과의 전투를 피할수있다.

2. 여신전생 시리즈에서



[1] 일본 시가현 온조우지(원성사園城寺) 소유. 카리테이모 좌상(가라제모 좌상 訶梨帝母 座像)으로 불린다.[2] 어디서는 백 명, 오백 명이라고 하는 등 구체적 숫자는 애매하다. 사실 동양에서 흔히 그러듯, 진짜로 1만이 아니라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좋을 듯.[3] 왕사성(라즈기르)을 다스리던 빔비사라 왕이 석가모니에게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죽림정사, 또는 왕사성 인근 영취산(영축산)에 상당기간 머물렀다. 지금도 죽림정사 터와 영취산에 석가모니가 머물렀던 자리(여래향실)의 터가 있다. 귀자모신이 왕사성 인근에 살았다면, 주민들이 석가모니에게 탄원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4] 이름이 핑갈라(Pingala) 혹은 프리얀카라(Priyankara)라고도 한다.[5]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이 일화가 언급되는데, 교고쿠도는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라면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도 하나의 번뇌이고 집착이니까 그것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저런 식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누구도 똑같다는 것을 헤아리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이는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자 스포일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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