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1. 설명
2.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2.1. 구성
2.2. 반달리즘의 피해
2.3. 기타
3.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1. 설명


이탈리아어: Piet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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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피에트로 페루지노, 1483~1493년, 우피치 미술관
아비뇽의 피에타, 앙게랑 카르통, 15세기 중반, 루브르 미술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예술의 주제 중 하나로, 14세기경 독일에서 처음 다루기 시작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슬피 우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주제를 나타낸 그림도 많이 있고 조각도 그것에 못지 않게 많이 있지만...

2.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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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98~1499년, 대리석, 174cm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뭐니뭐니해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위 사진)이 가장 유명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달랑 '피에타' 단어 하나만 사용했다면 십중팔구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의미한다. 당장 구글 검색에 'pieta'를 치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제일 먼저 뜬다.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그의 무덤을 장식할 조각상을 제작한 것이 바로 피에타다. 정작 미켈란젤로는 주문자가 계약 완료 시점보다 이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보수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서명을 새긴 작품이다.

2.1. 구성


조각상의 구도를 보면 성모 마리아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삼각형 형태인데, 성모 마리아를 예수보다 훨씬 크게 조각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는 이전까지의 피에타는 물론이거니와 동시대에 그려진 페루지노의 피에타와 비교했을 때 어색하지 않은 구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반영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지만,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취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이를 두고 '피에타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작품이기 때문에, 90도 각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신체비율이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만들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피에타 상을 위에서 본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교한 예수의 근육묘사와 마리아의 옷주름을 보면 가히 조각으로 이렇게까지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조각 완성 당시부터 있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기를 쓴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 1525~1574.12.10)에게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특히나 이 피에타가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으로,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BONAROTVS·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의하면 피에타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롬바르디아 출신의 2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화가 나 밤중에 몰래 성당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하지만 그날 성당을 나서는 길에 본 아름다운 밤풍경에 '''"하느님께서도 이런 아름다운 작품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는데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라고 깨달아 뒷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서 이후에 자신이 만든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2. 반달리즘의 피해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에 있었던 피에타는 교황 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여러 차례 이동했다가 1749년에 현재의 위치에 놓여졌다. 1736년에는 피에타의 아름다움에 혹한 한 남성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왼쪽 손가락이 부서져 주세페 리리오니(Giuseppe Lirioni)가 깨진 부분을 갈아서 접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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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1일, 라슬로 토트가 자행한 반달리즘
피에타가 겪은 최악의 피해는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라슬로 토트가 저지른 반달리즘으로 인해 박살났던 것이다. 당시 그 반달리스트가 외친 구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I am Jesus Christ)"'''였다고. 주변에 있던 관광객에게 흠씬 두들겨맞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끌려나가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 파티마의 계시를 밝혀야 한다"고 계속 외쳐댔다. 기사 일부 파편은 당시에 있던 사람들이 가져가 버렸다. 대부분은 찾았지만 못 찾은 부분 역시 있었는데, 성모 마리아는 다시 찾지 못해서 에서 일부를 떼어와 복원했다. 복원된 상은 방탄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유리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덧붙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복원작업에 대한 1973년 1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복원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리석 가루와 조각을 붙일 접착제로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사용했고, 절단된 팔 부분은 산화 방지 철근을 끼워 넣어 몸체와 접합시켰다. 또한 1749년 피에타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깨져서 절단면을 갈아 붙였다가 1972년에 다시 깨진 손가락 부분은 최초 조각 당시의 길이와 관절의 모양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대리석보다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복원 사실이 드러나게 처리했다. 토트가 휘두른 망치에 입혀진 녹 방지 물질이 성모 마리아의 눈썹에 묻어 생긴 얼룩은 화학 용제로 녹여내거나 칼로 긁어낼 경우 대리석에 더 큰 타격이 가해질 수 있었지만, 의외로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바로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내''' 얼룩을 제거한 것.

2.3. 기타


세계 각지에 피에타의 복제품이 모셔져 있는데(링크), 바티칸의 감수를 받은 정교한 복제품 중 하나가 천주교 수원교구 분당요한성당에 2001년부터 보관되어 있다. 기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경기도 안성시미리내 성지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의 피에타 상이 2017년에 세워져 있다. 정식 이름은 '순교자의 모후'상.
2018년 문재인 티모테오 대통령의 바티칸 방문 당시에 유리를 걷은 채 피에타를 관람하도록 교황청에서 배려하였다.[1]
만화 상남2인조에 나오는 카데나 나오의 등에 이것을 새긴 문신이 있다.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베드로 본인이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다 반팔 티셔츠, 반바지, 샌들 차림이라는 지나치게 가벼운 복장이라서 경비원에게 제지당하는데, 이 때 피에타를 가리키면서 “저기 장발 수염은 팬티 한장 입고 있는데 나는 왜 못들어가냐”고 따졌다.
아스가르드 밀레스 데일리 퀘스트 퀴즈 문제 중 하나로 출제된다.
액션 게임 Blasphemous에서 피에타에서 모티브를 따온 텐 피에다드라는 보스가 출현한다. 이름 Ten Piedad는 스페인어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피에타와 같은 뜻이다.
2008년에 폴란드 출신의 아티스트가 마리오 시리즈 버전으로 패러디 하기도 했다. 재질은 스티로폼이라고 한다.

3.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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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Mutter mit totem Sohn), 케테 콜비츠, 청동, 독일 베를린 노이헤 바헤[2]
미켈란젤로 피에타가 완성된지 500년 후, 독일화가, 판화가, 조각가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7.8~1945.4.22)가 피에타를 모티브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38.0 × 28.5 × 39.0cm, 1937~1938년)를 만들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는 주로 노동자 계층의 고된 노동, 질병, 가난을 주제로 삼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이 전사한 이후에는 반전평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다.
콜비츠는 "예술에서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다"라 할 정도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때문에 위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다르게 나이 든 어머니에 품에 안긴 아들의 모습을 표현해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모습 또한 표현하고 있다.콜비츠 개인적으로도 아들과 손자를 전쟁으로 잃은 아픔이 있어 그 고통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독일이 통일된 후인 1993년, 독일 정부는 노이헤 바헤(전쟁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를 재개관하면서 콜비츠의 이 작품을 1.6배 크기로 확대해 노이헤 바헤에 전시했다.[3] 조각 앞에는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Den opfern von krieg und gewaltherrschaft)'이라는 독일어 명문이 새겨졌다. 천장에 뚫린 천창을 통해 떨어지는 눈비를 맞고 있는 어머니는 품에 안은, 잔뜩 웅크린 자식을 놓지 않으며 이를 통해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긴 미약한 인간의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1] 씨브라더 영상에 보면 관람장면 뒤에 유리가 보이는데 해당 유리가 그 방탄유리로 보인다.[2] 구 프로이센 왕세자궁(현 베를린 국립미술관 별관)의 경비초소[3] 동독 시절에는 저 자리에 공산진영 특유의 추도 시설의 현태를 좇은 '영원의 불'이 있었다. 독일 통일 후 철거하고 설치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