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
1.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수
樛
생몰연대 미상
1.1. 개요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수. 진소양왕 재위 시절에 활약하였다.
진소양왕 51년(기원전 256년), 한나라를 공격하여 양성과 부서를 취하고 4만명의 병사의 목을 베고,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20여개 현을 점령하고 9만여명의 군사의 목을 베었다. 서주가 진과의 동맹을 깨고 양성을 공격하자 반격에 나서 서주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이듬해 주나라의 백성들이 도망쳐 나라가 자멸하자 서주에 가서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을 가지고 돌아왔다.
진소양왕 53년(기원전 254년)에 진나라의 방문요청을 위나라가 거절하자, 위나라를 공격하여 오성을 빼앗았다.
열국연의에서는 구정을 가지고 귀국하는 길에 9개중 한개의 솥을 강물에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꿈속에 나온 주 무왕의 노여움을 사서 등에 채찍을 300대 맞고 일어나보니 등창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나온다. 진의 왕족이었는지 열국연의에서는 영규(嬴樛)라고 나온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소양왕 후반기에 활약한 장수이며, 국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상징뿐이었지만 중원의 천자였던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의 상징을 진나라에 가져왔다는 점에서 주나라에 의한 봉건시대를 상징적으로 종결지은 장수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1.2.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인 킹덤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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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는 타카하시 아오
육대장군중 한 명으로 등장하여 강력한 포스를 보여주었다. 극중에서는 여성으로 등장하여 소왕의 후궁이 몰래 낳아서 권력투쟁에 희생되길 원치 않아 왕의의 하녀로 보내진 왕녀로 나온다.[1] 왕의의 하녀이자, 제자이자, 연인으로 자랐고 이후 작중 인물들 중에 최고 수준의 미인으로 성장한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군사적 재능을 보여 왕의군 출신의 사병에서 시작해 장군이 된다.
그리하여 소왕과 재회하게 되는데, 서로 한눈에 혈연임을 알아보고 그 후 신분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게 되었다. 규는 장군이 된 뒤 5년 만에 다섯 명의 대장군과 맞먹는다는 평가를 들었으며, 여섯 번째 대장군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2] 이후 육대장군의 일원으로 맹위를 떨쳤다. 왕의는 왕에게 많은 자식들이 있지만 가장 전신의 피를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고 평했을 정도. 젊은 나이에 이만한 능력자냐면서 다들 천재라고 불렀고, 고참 세대였던 장당과 몽오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던 천재라면서 진절머리를 쳤다. 왕전은 잠재적 반역자 낙인 때문에 배제된 것이고.
조나라 마양성에서 어린시절 왕의와 약속했던 마지막 숙원을 풀기 직전까지 갔으나[3] 갑작스럽게 등장한 방난의 난입으로 공격을 저지하다 살해당한다. 방난과 싸우면서 방난에게 몇 번 치명타를 가하지만[4] 방난이 규의 발을 밞아 기동력을 봉쇄하곤 무기의 간격을 이용해 규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한다.[5] 이 일은 후에 왕의에게 방난과 오랜 원한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 당시 일이 너무 황당했던지라 왕의와 창문군은 병사한 걸로 꾸몄고, 그 때문에 여불위조차 병사한 걸로 알고 있었다. 진상을 알던 외부인은 염파 정도.[6]
이후 왕의는 방난과의 일전에서 얻은 부상으로 최후를 맞으며 저 세상에서 마중나온듯한 규의 환상을 보며 최후를 맞게 된다.
킹덤 가이드북에서 공개된 능력치에 따르면 통솔, 무력, 지력순으로 97/94/95로 능력치 총합이 왕의와 똑같다. 경험치는 다른 육대장군들과 달리 젊어서 A랭크다. 여담으로 꿈은 신부가 되는 것.
여담으로 규는 전술이 매우 공격적이었다고 나온다. 진왕 영정은 가장 격렬한 싸움을 펼쳤다 들었다고 했으며 규에 대한 묘사에서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승리할 때까지 공격을 퍼붓는 가열찬 싸움이었다고 묘사된다. 규와 상대한 염파의 사천왕 강연은 공격 중시파라서 늘 많은 피가 흘렀다고 회고했으며 염파도 정말 지겨운 공격이었다고 말했다.
2. 규(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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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인물의 손에 들고 있는 하얀색 막대가 규(圭)이다.
사극에서 임금이 즉위할때 입는 금관과 조복과 함께 등장한다.
글자를 보면 흙 토(土)자가 두개를 겹친 모양으로 임금이 제후에게 땅을 하사한다는 뜻으로 이 규(圭)를 주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쓰여졌다고 하며 직위에 따라 만드는 재질이나 크기가 각각 다르다고 한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왕의 '규'를 죄다 "홀#s-7"로 번역하는 오역을 범한 바 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이를 모두 "규"로 바로잡았다. 여담으로 홀은 관복과 한 세트로 딸려오는 막대인데, 그 중 옥으로 만든 것만을 규라고 불렀으며 임금과 왕족이 사용했다.
한반도에는 고려 때 중국의 면복을 수용하면서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관련 기록 중 정확한 것은 공민왕 때에 명나라로부터 길이가 아홉 치가 되는 걸 받았다는 것뿐이다.
조선시대에도 태종(조선) 이후 수 차레에 걸쳐 명나라로부터 받아 왔으며 관련 기록이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7] 길례(吉禮) 제복도설(祭服圖說)에 실려 있다. 그런데 면복은 명나라 친왕(親王)이 입는 것[8] 이었고 규는 명나라 군왕(郡王)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때 고종이 칭제를 하며 명나라의 황제와 같이 1자#s-4 2촌(36~40cm)짜리 백옥규를 사용하였다.
[1] 다만 소양왕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허락 없이 후궁에서 아이를 빼낸 것이 알려지면 잘못된 전례를 만들기에, 오히려 관계자 전원을 처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규 본인도 이제 와서 공주가 될 수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래도 아버지의 정이 있어서 도와주기는 했던 모양.[2] 소양왕도 딸을 전장에 내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 하다.[3] 어린 시절 규는 하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왕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대장군이 되어 성을 백 개 빼앗는 전공을 올리면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척 진지했기 때문에 강해졌고, 동료들도 있고 아버지도 보살펴줬기 때문에 노력해서 이루어낸 것이라고 한다. 조나라 마양성이 백 개째 성으로 왕의는 규를 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 뒤 마지막 하나라고 말해서 규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4] 이때까지는 가면이 날아갔을 뿐 자신은 공격을 한 번도 받지 않고 검의 찌르기로 계속 공격을 맞추고 있었다. 즉 이때까지는 규가 유리했던 상황.[5] 규는 검을 쓰고 있었고 방난은 언월도였다.[6] 웬 개뼈다귀에게 죽었을 때 분노했다는 걸 보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감평원 전투 직후에 왕의가 찾아왔을 때 왕의가 말했거나 염파의 정보력으로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다.[7] 국조오례의의 상세 해설집[8] 문양 9개가 그려진 구장복(九章服). 황제는 12장복을, 황태손과 왕세자는 7장복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