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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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척리 고분군의 남쪽 전경. 가장 좌측에 보이는 고분이 가장 큰 48호분이다.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43호'''
'''경주 금척리 고분군'''
慶州 金尺里 古墳群
Tombs of Geumchuk-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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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92-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146,243㎡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1. 개요
2. 주요 고분
3. 여담
4. 바깥고리
5. 사적 제43호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에 위치하는 신라의 고총 고분군. 사적 제43호.
건천 금척리 일대는 신라의 수도의 9시 멀티로 경주의 관문과 같은 지역이다.[1] 지금으로치면 서울과천 같은 셈. 4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6세기에 완성된 신라의 대형 고분군으로써 대릉원 일대의 고분군 다음으로 고총들이 많다. 가보면 대릉원을 거니는 느낌으로, 대릉원의 미니어처라 할 수 있다.
사실 꽤나 중요한 부분은 외관만 대릉원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대릉원이 경주 분지에 형성된 후, 7세기 이후부터 의 영향으로 방리제(方里制)[2]를 시행, 규격화된 거리로 구성된 도시를 만들었다는 것이 금척리 고분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로 뒤에 방리제의 흔적들이 발굴[3]조사를 통해서 나타나 경주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무덤이 있는 특유의 형태로 도시경관이 형성된다. 관련 기사
다소 함정인 부분은 발굴이 된건 일제시대에 원래 형성되있던 도로를 가도로 만들면서 훼손된 일부 고분에만 수습조사한 게 전부라는 것이다. 특히 보고서도 없다. 해방 이후에 또 조사를 했지만 그 역시 정식 보고서가 없다.[4] 이를 제외하면 금척리 고분군에는 발굴과 보고의 체계가 정립된 90년대 이후의 발굴은 없다.
위의 맥락에서 금척리 고분군은 관광자원으로 정비되어 활용될 여지가 많다.

2. 주요 고분


금척리 고분군은 52기의 크고 작은 무덤으로 구성된 고총 고분군으로써 5~6세기 신라의 지방진출과 지배 방식의 일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발굴자료가 많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없지만 개요의 내용처럼 이 지역 일대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또한 신라의 지방 고총들 가운데서 금척리 고분군이 가장 크다.
  • 금척리 48호분
금척리 소재 여타 고분들도 대릉원 고총들마냥 발굴이 된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유물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 가운데서도 황남대총의 미니 버전인 금척리 48호분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다른 신라 고분들처럼 적석목곽묘일 확률이 매우 크고 황남대총이 대릉원에서 가장 큰 것 처럼 48호도 금척리 고분군에서 가장 크다. 크기는 천마총 정도. 또 황남대총과 마찬가지로 연접분이다.

3. 여담


금척리 고분군의 지명과 형성에는 금자(金尺)와 관련이 있다. 신이한 힘을 지닌 금자를 이용해서 이득을 많이 봤는데 중국에서 그걸 달라고하니 여기에 큰 무덤들을 여러개 만들어 숨겼다는 것. 하지만 이 금자의 메타포는 조선시대에 추가된 설화라는 분석이 있다.[5] 금척 항목 참고.
금척리 고분군이 있는 건천읍상주시 은척면과 자매결연을 했다. 위의 금으로된 의 설화의 다른 버전에는 은으로된 자의 이야기가 있다. 기사 참고
금척리 고분군은 경주사람들만 아는 경주 진입 루트인 4번 국도가 양분해 놓은 형국이다. 고분군이 본격적으로 정비되면 서울 석촌동 고분군처럼 교통로와 관련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금척리 고분군과 근처 버스정류장 사이에 시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4. 바깥고리



5. 사적 제43호


경주 근교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30여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아직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무덤 2기를 조사하였다.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유물은 금귀고리와 굽은 옥 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경주시내의 평지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1] 그러한 맥락에서 4세기 이전부터 건천읍 주변에는 사라리 고분군이라는 대형 목곽묘 고분군이 형성되기도 했다. [2] 바둑판처럼 도로를 만들고 도시를 구획하는 제도. 도로에 의해서 사각형의 공간이 생기므로 모날 방(方)자를 쓴다.[3] 방내리라는 곳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동네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방의 안의 마을, 즉 도시의 안쪽 마을이란 뜻이다.[4] 그런데로 보고서가 약소하게 있긴하다. 다만 찾는 것이 힘들 뿐. 그 내용은 금척리 고분군이 4세기에 축조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단서를 주는 발굴이라는 것이다.[5] 태조 이성계와 금자가 관련된 설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