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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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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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내에서 황남대총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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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북분 금관
皇南大塚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위치한 대형무덤으로, 대릉원 내 고분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4] 남분과 북분 두 무덤을 연결한 쌍릉이다. 피장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보통은 5세기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정도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 중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가 5세기 중엽, 즉 삼국사기 기록상 눌지왕의 사망년도인 458년과 일치해 눌지왕릉설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고고학적 비정에 관한 내용은 신라왕릉#s-5 문서 참조.
금관도 출토되어 천마총과 마찬가지로 신라고분들 중 인지도가 높다.
황남대총은 사적 제512호인 '경주 대릉원 일원'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2. 구조와 내용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신라 고분들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대릉원에 있는 고분들의 봉문과 달리 황남대총은 봉분이 표주박 모양이라는 특징도 있다. 쌍릉인데, 남분이 먼저, 북분이 나중에 축조되었다. 그리하여 발굴할 때에는 '유적이 겹칠 경우 나중 것을 먼저 발굴한다.'는 원칙에 따라 북분부터 발굴하였다.
1973년 북분에선 금관이, 남분에선 그보다 한 등급 낮은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금관이 나온 북분에서 금제 허리띠도 발굴되었는데, 여기에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이 있어서 큰 파장이 있었다. 금관이 나왔으므로 피장자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부인대라고 쓰인 명문이 나왔으니 여자 아니냐는 것이다. 남분 발굴을 정리하고 1975년에 남분을 발굴하였을 때에는 특히나 더욱 금관의 유무에 학자들이나 언론들도 주목하였다. 쌍릉이므로 부부묘라고 생각하는데, 여자가 묻힌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면 남자가 묻혔을 남분에서도 반드시 금관이 나오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남분에서는 은제 무구와 (금관보다 격이 낮은) 금동관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남분에서 피장자의 유해 일부가 나와 검사하니 60대 남자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이쪽이 남자임도 의심하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피장자가 누구인지 미궁에 빠졌다.[5] 아무튼 금관에 금동관이 나왔으며 보기 드물게 큰 무덤이므로, 왕릉이거나 왕에 준하는 고위귀족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 서구권 학자들은 피장자가 여왕과 그 남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6]
황남대총에서는 금관 외에도 유물이 무려 5만 8천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글라스 스타일 유리병[7] 도 있었으며,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금동 말안장은 그 화려함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15세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유골도 나와 지증왕 3년(502)에 금지된 순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502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갈돌이 대거 나왔는데[8] 같이 출토된, 바둑돌을 담았던 그릇으로 추정되는 중국산 칠기에는 3~4세기 중국 서진시대의 바둑고수로 '기성(棋聖)' 칭호를 받았던 마랑(馬朗)의 이름이 씌었다. # 바둑용품이 황남대총에 부장품으로 묻힌 것을 볼 때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도 생전에 바둑을 좋아했던 듯하고[9] 이미 상대 신라에도 백제처럼 바둑이 이미 보급되었음이 확실해졌다.
3. 발굴 과정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를 촬영한 1977년 제작 영상
1970년대 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의 무령왕릉의 우연한 발견을 보고는 경주관광개발사업을 지시하였고 황남대총 발굴조사는 경주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새로운 국보급 유물을 이용해 얻을 수 있는 관광업 발전과 민족주의 고양의 수단으로서 제시된 사업으로, 졸속이었던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좀 더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정권의 관심도는 상당히 높았는데, 발굴 전 과정을 촬영해 홍보용 영화로 제작하였으며 무려 대통령이 직접 발굴 현장을 찾아 금일봉 100만 원[10] 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 이전까지 대통령이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유일한 사례였다.
박정희는 중요 유물이 나오는 성과를 얻기 위해 경주시는 물론 국내를 통틀어 가장 큰 고대 무덤인 98호분을 발굴하라 지시하였다. 하지만 고고학계는 신라 대형고분을 한국인 학자들이 발굴조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 교이치의 협조를 받아 발굴한 호우총과 은령총 정도뿐이었고, 직전인 1971년에 백제 무령왕릉을 터무니없이 졸속으로 발굴한 후유증 때문에 또다시 대형고분을 발굴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하였고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권력자의 독촉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록 학술적으로는 무모하지만 대형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일단 황남대총 대신 고고학계의 발굴 역량을 시험하고 기르자는 의미로 그 옆에 있는, 98호분보다 훨씬 작고 바로 옆에 있어 시대나 무덤양식이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던 155호분으로 먼저 경험을 쌓아보자고 제안하여 1973년 4월부터 8월까지 발굴하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었으므로 고고학계는 별다른 중요 유물이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한 듯하지만, 1973년 7월에는 금관이, 8월에는 자작나무에 하늘을 날아 오르는 듯한 말을 채색한 그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대성공에 힘입어 아직 155호분 발굴을 마무리 짓지도 않은 동년 7월에 98호분도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155호분이 오늘날의 천마총이고 98호분이 황남대총이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 황남대총 금귀걸이
- 황남대총 금맞새김판장식
- 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
-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 황남대총 남분 금반지
-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 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
- 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
- 황남대총 남분 앵무조개잔
- 황남대총 남분 유리잔
- 황남대총 남분 유리제곡옥부 목걸이
- 황남대총 남분 은관
- 황남대총 남분 은관모
- 황남대총 남분 은반지
- 황남대총 남분 은제 국자
-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 황남대총 북분 고구려식 금동못신
- 황남대총 북분 금관
- 황남대총 북분 금목걸이
-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 황남대총 북분 유리구슬 거푸집
-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 황남대총 북분 은잔
-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 황남대총 북분 청동 세발솥
- 황남대총 북분 커트장식 유리잔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띠드리개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발걸이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허리띠 꾸미개
-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화살통 장신구 및 멜빵
- 황남대총 야광조개국자
- 황남대총 은제 허리띠
- 황남대총 청동거울
- 황남대총 환두대도
5. 기타
황남대총도 원래는 천마총처럼 무덤 내부에 따로 시설을 만들 계획이 있었지만 취소되고 지금처럼 보존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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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황남대총의 뒷쪽, 정확하게는 황남대총 동쪽 포인트가 대릉원에서 인기 있는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원래는 역사 유적 전문 사진작가의 작품으로서 그 구도 #s-6가 알려졌는데, 이후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 저서의 표지에도 같은 앵글에 밤에 찍은 사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한참 후에 SNS를 통해서 사진찍는 포인트로 유명해져 지금은 줄 서면서까지 찍는 포인트가 되었다.
황남대총이 너무 유명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황남대총을 경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대릉원 지구 내에서도 황남대총보다 큰 봉황대가 있고, 외곽 지역에도 서악동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의 다양한 유적지에 황남대총과 비슷한 크기의 왕릉들이 꽤 있다. 다만 이중에서 현재까지 발굴이 이루어진게 황남대총 한곳 뿐이라 다른 곳은 다 듣보잡이 되어서 그렇다.[11]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높이가 가장 높지는 않다. 경주시에서 가장 높은 무덤은 노동동에 있는 봉황대다. 다만 그쪽은 아직까지 발굴된 적이 없어서인지 황남대총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5] 신라 초기에 종종 있었던 사위 계승 때문에, 아내 쪽이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아서 북분의 여성은 금관, 남분의 남성은 금동관을 쓰지 않았겠느냐는 설도 있다. 예를 들면 흘해 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어 사위 내물 마립간이 왕위를 이었다.[6] 다만 이에 대해 세라 넬슨 교수는 황남대총의 축조시기에 기록된 신라 여왕이 없다는 점을 들어 Ruling King이었겠지만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7] 이중에는 손잡이 부분을 청금석으로 염색한 봉수형 유리병도 있는데, 부러진 손잡이를 수리하지 못하자 금실을 감아서 땜빵을 해놓았다(...)[8] 자갈돌 유물을 실제로 보면 검은색과 흰색이 잘 구분되지 않는 자연석이라서 바둑돌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은 원래는 흑백으로 칠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고분 내 환경적 요인으로 칠이 벗겨졌거나 발굴 이후 세척 과정에서 칠이 지워졌다고 주장했다.[9] 여성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바둑용품이 출토되지 않았다. 당시 바둑이 남자의 전유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10]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21/0L0020070621.1035082608.html. "당시 인부들 하루 인건비가 600원, 발굴조사원이 1200원, 소갈비 1대가 500원"[11] 사실 황남대총도 4공 시절 국가 규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발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까지 동원해서 봉분을 통째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