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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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한성백제 시절 적석총(돌무지 무덤)이다. 사적 제 243호.
2. 역사
2.1. 일제강점기
1911년 일제에 의해 처음 유적 현황 조사가 이루어졌고 한성백제의 무덤으로 인식되었다. 1912년에는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제작된 분포도에 따르면 무덤을 크게 갑총(甲塚)과 을총(乙塚)[1] 으로 나누어 표시해 놓았으며 갑총이 23기, 을총이 66기로 나타나고 있다.
1916~1917년 정밀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무덤에 대한 내부조사와 실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17년 작성된 도면은 무덤의 위치와 대략적인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제작되었는데, 자그마치 '''29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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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가영, 2012, 석촌동 고분군의 축조 양상 검토, 한국상고사학회)
위의 도면이 1917년 제작된 도면으로 '''거뭇하게 색칠된 것들이 모두 무덤이다.'''
석촌(石村)이라는 지명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2. 광복 이후
대부분의 유적이 그러했듯 석촌동 고분군 역시 광복 이후 사회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으로 사실상 잊혀졌다.
그 결과 '''상당수의 무덤들이 흔적조차 없이 파묻혀서 사라졌다.'''[3] 그러다가 1975년 잠실 개발이 이루어지자 1974년부터 잔존해 있는 무덤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87년 민가[4] 가 철거되면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매우 극소수의 무덤만이''' 살아남아 고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무덤이 얼마나 파괴되고 사라졌는지는 위의 1917년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겹쳐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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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2017, 서울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3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1917년 지도를 현재의 지도에 겹쳐본 도면. 왼쪽부분에 1호, 2호, 3호, 4호, 5호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그러니까 '''280여개의 무덤들이 제대로 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온갖 건물들 밑에 깔려버린 것이다.''' 한성백제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한성백제의 역사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 번 멸망하고,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또 한 번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석촌동 고분군은 소수의 무덤만을 제외하고 모두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으며 풍납토성은 다행이 성 내부에 유적이 잔존하고는 있지만 이미 현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전체를 다 발굴하는 모습을 보는건...우린 안될 거야 아마 그나마 몽촌토성이 (상당히)온전히 남아있고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점은 위안이 된다.
이미 파괴되었다고 하나 대부분 시멘트층에 파묻혀있기 때문에 도시화된 구간을 철거하고 시멘트층을 제거하면 이들 고분을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애매한 것이 보통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지하까지 굴착하여 지반을 다진 후 건물을 올리게 된다. 따라서 현재 건물들이 들어선 곳은 남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풍납토성의 경우에는 백제유적이 지하 4~5m 깊이에 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5]
2015년 석촌동 고분공원 내에서 싱크홀이 발생하여 원인파악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 싱크홀이 아니라 우물이 있던 자리가 함몰되어 생긴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던 중 적석 유구와 백제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분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장 공개를 통해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여러 무덤이 서로 붙어있는 연접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관련 기사
3. 특징
여기서는 1970~80년대 이루어진 발굴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하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조사에 대해서는 추후 발굴조사 보고서가 간행되면 추가하도록 한다.
3.1. 즙석 분구묘
3.1.1. 석촌동-76 파괴분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촌동 고분공원의 남쪽 경계에서 남쪽으로 150m 떨어져 위치했던 고분이다. 1917년 작성된 고분분포도에도 표시되어 있으며, 1970년대의 항공사진, 1971년 문화재관리국이 촬영한 2장의 사진, 1972년 작성된 지적도에 그 존재가 나타난다.
1917년 일제의 고분분포도에 따르면 그 규모는 둘레 140m에 이르는 타원형 봉분으로 확인되나, 1976년 제 3차 잠실지구발굴조사사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미 1970년 토지정리구획사업과 경지 평탄화 작업으로 봉분이 삭평된 상태였다.
서울대의 석촌동 재보고(2013)에 따르면, 1976년의 조사는 전체 분형의 북쪽 1/3에과 중앙부 극히 일부에만 편중되었다. 조사결과 석촌동 고분군의 대표적인 묘제중 하나인 즙석분구묘이며, 5개의 토광묘(아마 목곽묘였을 것이다)가 확인되었다. 이같은 조사결과를 볼 때, 본 고분은 적어도 15개의 목곽묘가 분구를 잇대면서 거대한 한개의 봉토를 이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별 토광묘의 규모는 장축 7.5m~5m에 달할 정도로 대형목곽묘이며, 출토된 토기들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반으로 비정된다(이러한 연대관에는 논란이 있다).
3.1.2. 석촌동 5호분
3.1.3. 가락동 2호분
3.2. 적석총
3.2.1. 석촌동 1호분
북분과 남분이 서로 붙어있는 연접묘로 길이가 22.3m이다. 북분과 남분은 축조방식의 차이가 확인되는데 북분은 고구려 돌무지 무덤(적석총)의 축조방식을 따르지만, 남분은 백제화된 돌무지 무덤의 축조방식을 따르고 있다.[6]
남분과 북분이 판축기단부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사자는 남분의 북벽이 정연하지 못한 점을 근거로 북분이 먼저 축조되고, 남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분 서쪽과 남쪽, 그리고 북분의 북쪽에 모종의 이유로 적석기단이 추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북분의 북서벽에는 1호 석곽묘가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7] 이 외에 남분의 남쪽에 위치한 3호 석곽묘가 1호분과 거의 붙은 상태로 조사되었다.
전술했다시피, 북분은 내부를 할석으로 채운 이른바 고구려식 적석총이며, 후에 축조된 남분은 속이 점토부로 된 백제식 적석총이다. 혹시 이러한 점이 소위 백제식 적석총의 출연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현 댄계에서는 2015년, 2016년 조사구역의 조사성과를 기다려야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길이 4cm 정도의 귀이개로 보이는 은제품과 승문타날 심발형토기 저부가 있다.
1호분에서는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대신에 북분의 상부에 축조된 1호 석곽묘에서 비교적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1호 석곽묘의 축조연대가 1호분의 하한연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유물군에 대해서는 대체로 4세기 중엽으로 비정되는 듯 하며, 따라서 1호분의 연대는 4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해당 고분위 위치와, 외형을 통해서 그 대략적인 축조연대를 추정할 수는 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대형분은 서쪽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면서 조영된 것으로 축조된다. 또, 외형이 계단상을 이루면서 연접된 적석총 및 허튼층 쌓기로 축조된 점이 고구려의 적석총인 산성하 동대파 묘구 356호분과 유사하다. 해당 고분이 4세기 전엽 정도로 비정되고 있으므로, 만약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의 축조배경이 고구려 적석총과 관련이 있다면, 석촌동 1호분은 석촌동 고분군에서 가장 이른 형식의 대형 적석총으로 그 시기는 산성하 동대파 356호분과 동단계 혹은 비슷한 단계일 것으로 추정된다.
3.2.1.1. 1호 석곽묘
1호 석곽묘는 1호분 북동쪽의 단 위에 축조된 위석봉토묘이다. 1호분의 1단상과 그 밖으로 석축 높이 만큼 쌓인 적석부에 걸쳐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1호분 동북쪽 기단에서 확인되는 두꺼운 재층이 1호 석곽묘 아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1호분이 선축되고, 그 다음에 1호 석곽묘가 조성된 것으로, 토층상으로는 양자간의 선후관계는 비교적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무덤의 규모는 남북 3.8m, 동서 2.4~2.8m 정도가 잔존하고 있으며 외곽은 40~60cm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방형의 현실을 만들었는데 1단 석축만이 확인되었고, 현실 내에는 잔 자갈을 깔았다. 그리고 상부를 봉토로 씌운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호분에 비해 유물이 아주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내부에서는 직구단경소호, 직구호, 완, 대각, 난형호 등의 토기와 철정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 편차는 크지만 대체로 4세기 전엽 혹은 중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유구의 성격이다. 보고자는 1호분이 축조된 뒤 상당기간이 지나, 1호분의 북동쪽 기단 밖으로 1호분의 석재와 퇴적된 토사가 상당한 높이로 형성되었고, 그 위를 정면하여 1호석곽묘가 위석봉토묘 형식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따른다면 1호석곽묘와 1호분의 조영시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호석곽묘를 후대에 조영된 매장시설로 보지 않고, 1호분과 거의 시기가 동일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이에 따른다면 1호분과 1호석곽묘는 동시기로 보아야한다.
이처럼 80년대 발굴 조사자료가 워낙 엉성하고, 보고수준도 낮아 정확한 양상을 알기 어려우나, 최근 싱크홀과 관련하여 진행된 발굴 성과가 기존 자료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양상에 해답을 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따르면 1호 적석총에 연하여 부가된 기단들은 연접된 다른 적석총의 시설일 가능성이 높고, 1호 석곽묘라 추정된 유구도 1호 적석총, 혹은 인접한 적석총과 함께 형성된 매장주체부, 혹은 제사시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 최근 조사성과가 보고서로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1호분과 1호석곽묘의 관계를 더 추정하기는 어려우며, 단지 1호석곽묘의 축조연대가 1호분의 축조하한과 관련있다는 사실만 명확하다.
3.2.1.2. 3호 석곽묘
3.2.2. 석촌동 2호분
2호분은 5호분에서 북쪽으로 약 180m, 북단의 3호분에서 남쪼으로 약 100m 떨어져있다. 2호분 주변에서는 2호분과 함께 2호석곽묘, N5W4 적석유구가 같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이전에 높이 3~4m의 타원형 봉분이 잔존하고 있었다. 고분의 규모는 남북 16.2m, 동서 17.2m의 방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드러났다. 원래 이 고분의 자리에는 목관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상부를 정지하고 할석과 소형천석을 쌓아 기단부를 조성한 후점토와 사질토를 10~30cm 두께로 쌓아 채운 3단의 계단식 적석총으로 추정된다.
3.2.2.1. 2호 석곽묘
3.2.3.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돌무지 무덤으로 가로 50.8m, 세로 48.4m, 높이 4.5m[8] 의 규모로 가장 거대하며 조성시기와 규모로 보아 근초고왕 혹은 근구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9]
3.2.4. 석촌동 4호분
17.2m 내외규모의 백제형 돌무지 무덤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4. 의의
백제의 건국신화에서도 나오듯 석촌동 고분군을 통해 백제의 건국자 집단이 고구려계 유민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어느 정도 정확성도 입증해주고 있다.
허나 형성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후엽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적석총의 축조 연대는 고구려 적석총 구조적 상관성으로 볼 때 4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온조, 비류 집단의 남하가 사실이라면 그 연대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가 될 가능성이 높아 삼국사기의 남하 및 건국 연대와는 300년 가까운 차이가 나게 된다. 300년 차는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다.
5. 여담
송파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백제고분로의 이름은 방이동 고분군이 아닌 석촌동 고분군에서 따왔다. 헌데 고분공원의 주소는 가락로7길. 심지어 석촌고분역도 생긴다.
백제고분로는 지상으로 달리다가 도로 중간에 석촌동 고분군이 막고 있어 지상으로 달리지 못하고 석촌지하차도를 뚫어 고분공원 부분만 지하로 달린다. 여담으로, 이 터널은 석촌동 3호분 지하를 통과한다.[10] 애시당초 3호분이 있던 자리에 석촌동 고분군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가로질러 이미 길이 난 것을 3호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미 나 있는 길을 막거나 우회로를 뚫기에는 이미 주변에 주택가들이 들어서버렸고 백제고분로가 송파구의 주 도로 중 하나가 된지 오래라 궁여지책으로 밑에 지하차도를 뚫는 것으로 해결했다. [11]
석촌지하차도 바로 앞에서 싱크홀 사고가 났었고, 인근에 많은 동공(洞空)들이 있어 지반이 침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바로 서울 지하철 9호선 공사때문에 지하수가 유실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보강공사를 실시했다. 9호선은 3호분 지하를 지난다.
자전거 주행 시, 고분군 내로 진입하면 자전거에서 내려서 이동해야 한다. 물론 이걸 지키는 구민들은 거의 없다.
고분군 서쪽을 따라서 길냥이가 다수 서식하는데 매일같이 사료를 챙겨주는 동네 주민들 덕분에 발육이 남다른 뚱냥이가 많다.
여느 유적이 그렇듯이 고고학이나 역덕후 혹은 외지인들은 신기해하지만 동네 주민에게는 그냥 돌무더기인듯 하다.
6.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서울 석촌동 고분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석촌동고분군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석촌동 고분군
-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석촌동 고분군
- 고고학사전 : 석촌동 고분
- 시사상식사전 : 서울 석촌동 고분군
- 두산백과 : 서울 석촌동 고분군
7. 사적 제243호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 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3호 무덤은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기단식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었는데,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5호 무덤은 조사가 완전하게 되지 않아 구조와 유물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무덤 주변에는 무덤을 두르고 있는 돌을 2단으로 쌓았다.
내부구조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서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의 주인보다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 같고, 독무덤(옹관묘)이나 작은 돌방무덤(석실묘)에 묻힌 사람들 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분포도와 함께 기록된 내용을 종합했을 때 갑총은 봉토분, 을총은 적석총으로 추정된다.[2] 강남일대는 명당이어서 예로부터 무덤을 이 곳에 많이 지었다고 한다. 현대의 강남과 생각하면 상상 할 수도 없지만.[3]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 역시 고구려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지상에 축조되기 때문에 도굴 및 훼손에 상당히 취약하다.[4] 고분 위에도 민가 몇 채가 있었다.[5] 물론 전부 다 양호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조사된 부분 중에서도 현대 건물로 인해 파괴된 부분이 존재하며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은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6]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다듬은 돌로 계단을 축조한 후에 그 내부를 강돌 또는 산돌로 채우는 방식이다.(계단이 상당부분 무너진 태왕릉을 보면 그 내부에 있던 돌들이 노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중심부에 담장 형태로 돌을 쌓고 내부를 채운 후 면적을 넓혀나가면서 계단형태를 만드는 계장식(階墻式) 축조방법도 존재한다. 백제화된 돌무지 무덤은 무덤 중심부에 점토부를 먼저 만든 후 계단을 만들며 면적을 넓혀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고구려 적석총의 계장식 축조방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백제화된 돌무지 무덤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구려 돌무지무덤에 토착세력의 무덤이 결합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7] 그런데 왕릉급 분묘 위에 하위 분묘가 과연 들어설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으며, 이 유구를 분묘로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8] 참고로 장군총의 규모가 한 변이 31.5~ 33m이며 높이가 14m인 걸 생각하면, 이 무덤은 밑변이 장군총보다 크고 장군총과 같은 비율로 만들었을 경우 높이가 21m가 넘는 규모가 된다. [9] 이 무덤은 조성 시기나 출토 유물의 연대, 그리고 능의 규모에 비춘 왕의 위상 등을 근거로 추정할때 근초고왕이나 아들 근구수왕 두 왕의 무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일단 출토된 중국계 동전이 4세기 중후반 무렵의 것인데 이 시기 죽은 왕이 이 둘이고 또한 이 둘 모두 당시 백제에서 위상이 매우 높은 인물들이었기에 능의 규모에도 걸맞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말할 것도 없고 근구수왕 또한 고국원왕을 직접 전사시켰고 일왕에게 칠지도를 자신의 명의로 직접 전해준 인물이기에 위상이 매우 높다.[10] 지하도로를 설계할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1] 문화재로 인해 생기는 갈등은 부동산 문제만이 아니다. 경주의 금척리 고분군도 고분군을 관통하여 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이용률이 매우 높은데 장차 금척리 고분군 정비계획에 있어 갈등이 붉어질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건 서울처럼 우회도로 낼 여유가 없지 않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