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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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내에서 천마총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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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경주역사유적지구[1]
Gyeongju Historic Areas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i)[2], (iii)[3]
天馬塚
1. 개요
2. 발굴조사
3. 관람
4. 천마도
5. 이름의 논란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7. 기타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고분. 과거에는 '경주 155호분'이라고 했지만 1973년에 발굴된 후로는 '천마총'이라 불린다. 전형적인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인데, 무덤의 주인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지증왕이라고 추정한다. [4]

2. 발굴조사


1970년대 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로 고분 조사, 그리고 새로운 국보급 유물이 홍보효과도 크고 민족주의 교육수단으로 유용함에 주목하여[5] 경주관광개발사업을 지시했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경주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졸속이었던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좀 더 계획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정권 차원에서도 관심이 상당히 높아서 천마총 발굴 전 과정을 촬영해 홍보용 영화로 제작할 정도였다. 역대 대통령 중 박근혜 이전까지 고고학 발굴현장을 직접 찾은 유일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1973년 박정희는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아와서는 현장에서 일하는 단원들에게는 금일봉을 무려 100만 원[6]씩이나 지급하는 등 지원을 했다.[7]
사실 처음에는 옆에 있는 더 큰 황남대총을 발굴하려고 했다. 황남대총은 신라와 경주는 물론이고 국내를 통틀어 가장 큰 고분이기 때문에 역대급으로 중요한 유물이 반드시 나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발굴기술도 미진했고, 거대한 무덤을 제대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하기에는 경험도 너무 부족했다. 천마총 이전에 신라 대형고분을 한국인 학자들이 발굴조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8]에게 협조받아 발굴한 호우총과 은령총 정도뿐이었다. 게다가 1971년 우연히 발견해 발굴한 무령왕릉은 발굴조사가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끝났던 일이 있어서 고고학계는 이런 발굴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의지는 확고했고 학자들은 대통령의 뜻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형분을 발굴하긴 하되 다짜고짜 황남대총을 파지 말고, (훗날 천마총으로 명명되는) 경주 155호분을 먼저 시범 삼아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하필 천마총을 선택한 것은 천마총이 경주의 고분들 중 고유번호 마지막인 155번이었던 것도 한 이유였고, 황남대총 바로 옆에 있어서 시대 양상이나 무덤 양식도 크기의 차이만 있지 비슷하리라 추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마총도 황남대총보다 작을 뿐 대형고분이었지만, 천마총에서 어지간히 유물이 나오면 박정희도 만족하여 황남대총 발굴을 강요하지 않길 기대한 것이다.
근데 시험 삼아 발굴한 155호분이 대박을 쳐버렸다.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국보 제207호),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 천마총 관모(국보 제189호), 천마총 금제 허리띠(국보 제190호) 등 부장품 1만 1297점이 출토된 것.[9]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크다고 하며, 단군 이래 한국인이 고스란히 발굴해낸 최초의 금관이다. 천마도자작나무[10] 수피로 만들어 천수백 년간 산성 토양 속에 묻혔는데도 보존된 것이 기적. 2010년 11월 13일 방송된 역사스페셜에서 천마총 발굴 당시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직접 보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천마총 발굴이 대박을 치자 박정희는 (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더욱 황남대총 발굴을 압박했다. 그리하여 황남대총도 발굴을 시작했는데, 역시 대박이 터졌다.

3. 관람


대릉원 입장권(성인 3천 원)에 포함된다. 대릉원의 여러 무덤 중 유일하게 발굴조사 후 내부를 신라왕릉의 구조를 설명하는 전시관의 형태로 열려있다. 역덕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거대한 언덕들만 있는 공원처럼 보이는 대릉원 관람의 핵심이 천마총 내부인 셈이다. 단 천마총 입구가 잘 안 보이는 뒤쪽 담벼락 쪽에 있어서 대충 보고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천마총 내부의 전시는 원래는 수십 년 전 구성이라 좀 낡은 느낌이 있었지만 개선하고자 2017년 8월 18일부터 기존의 고분 내부 관람공간을 폐쇄하고 내부시설 보수와 매장주체부 재복원, 전시매체 개선에 들어가 2018년 7월까지 임시 폐쇄했다. # 다만 공사기간 동안 관람객의 볼거리가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해 당시 대릉원 입장료를 무료로 바꿨다. 처음에는 2018년 4월 16일까지 완료한다고 하였으나 6월 24일로 연장하더니, 또 연장되어 7월 27일에야 "천마 새터에 다시 모시다."라는 슬로건(?)으로 준공식을 마쳤다. 내부 전시가 예전에 비해 매우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바뀌었고, 부장된 문화재들의 복제품[11]과 터치스크린으로 관람객의 볼거리가 충실해졌다.

4. 천마도




5. 이름의 논란


천마총이란 이름은 발굴 당시 출토된 천마도 그림 때문에 지었는데, 이를 두고 지금까지 논란이 약간 있다.
우선 고분을 천마총이라 명명할 때, 신라왕의 무덤에 말 이름을 붙인다고 경주 김씨 문중에서 국회에 이름 변경 청원까지 낸 사건도 있었다. 문중이 변경하길 원했던 이름은 '천마도 왕릉'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은 문헌내용상이나 발굴조사의 결과로 고분의 주인이 왕임을 확신할 수 없다고 판단, 그대로 천마총이란 이름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천마도 그림에 그려진 동물이 천마, 즉 말(馬)이 맞는지도 논란이 되었다. 2009년 9월 적외선 촬영 결과 천마의 머리에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기린의 특징인 뿔이 등장했다.[12] 그래서 천마도에 그려진 동물은 천마가 아닌 기린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무덤 이름도 기린총으로 바꿔야 한다든가 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기사[13] 이 논란에 대해서는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문서의 해당 논란 단락 참조.
2014년 보존 처리와 복원 과정을 거친 새로운 천마도 장니 2점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기사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주요 출토 유물



7. 기타


북한남한의 체제경쟁(?)에 엮인 적이 있다.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북한 측 설명에 따르면, 북한 평양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의 봉분 높이는 원래 9 m 정도였는데, 김일성이 '1500년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이니 원래 높이는 얼마나 더 컸겠느냐.'는 이유로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이라'''고 교시를 내렸다. 그 바람에 과학자들이 1400년 동안의 기후변화 같은 것을 계산해서 지금의 높이 11 m를 제시했다고.
하지만 동아일보 등 당시 기사에는 동명왕릉 개건 2년 전인 1992년 당시 남쪽을 방문했던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이 포항시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이어 옆 도시 경주시를 방문해 천마총을 보고는 "'''이 무덤을 보니 동명왕릉의 높이를 높여야겠다.'''" 하고 발언했다는 것으로 보아[14] 딱히 과학적인 고증을 살리겠단 목적보단 그냥 당시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의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15] 63빌딩 보고 열폭해서 더 높은 류경 호텔 건설에 뛰어든 것처럼 별의별 사소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북한의 집착을 알 수 있는 부분들.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6세기 초, 백제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했다고 본다. 피장자 옆에서 발견된 환두대도에 왕을 상징하는 봉황무늬가 있어서 6세기 초 무령왕과 시기가 비슷한 왕의 무덤일 텐데,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지증왕이다.[5] 박정희 본인이 한때 교사였던 만큼 상당히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후임 대통령 전두환은 이쪽에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자마자 거짓말처럼 발굴조사 지원이 확 줄어들었다. 사실 원래대로 돌아간 것에 가깝지만...[6] #[7] 당시 인부들 하루 인건비가 600원, 발굴조사원이 1200원, 소갈비 1대가 500원이었다.[8] 생몰년: 1907-2011.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박물관장이었다. 광복 이후에 일본으로 귀국하여 1957년 교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71년에 은퇴하고 1980년에는 나라현립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 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9] 출토유물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언급된 4점이나 되고,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천마총 금제 관식(보물 제617호), 천마총 금제 관식(보물 제618호), 천마총 목걸이(보물 제619호), 천마총 유리잔(보물 제620호), 천마총 환두대도(보물 제621호), 천마총 자루솥(보물 제622호) 등 총 6점이나 된다.[10] 실제로는 자작나무가 아니라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일 가능성이 높다.[11]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진품은 대부분 근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12] 사실 그 전에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기린 도상 연구에서 천마의 뿔에 주목해 사실 기린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음도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가 추후에 밝혀졌다.[13] 기린도 고대에는 봉황이나 용과 마찬가지로 제왕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천마총보다는 그나마 격이 높다.[14] 출처 동아일보 1992년 7월 23일자 보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5] 북한 정권은 현재의 북한 영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고구려에 지금 북한의 상황을 대입해, 초강대국(당나라, 미국)과 남쪽 같은 민족(남한, 신라)에게 핍박받는 상황을 동일시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즉 고구려 대표 고분이 신라 대표 고분보다 크기가 작다는 것을 북한이 남한한테 밀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참고로 신라는 진흥왕 이후의 전성기에 들어서 임금의 권위와 나라의 체계가 안정되면서 국력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지만 고분의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즉 무덤 크기=국력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