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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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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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경주역사유적지구[1]
영어
Gyeongju Historic Areas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2000년
등재 기준
(ii)[2], (iii)[3]
지정 번호
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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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일원'''
慶州 大陵園 一圓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512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602,314㎡
'''지정연도'''
2011년 7월 28일
'''제작시기'''
신라
1. 개요
2. 역사
3. 고분군
3.1. 황남동 고분군
3.2. 노동동 고분군
3.3. 노서동 고분군
3.4. 황오동 고분군
3.5. 인왕동 고분군
4. 입장료
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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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陵苑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있는 옛 신라,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지역. 사적 제512호.
이름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부분에서 따 와 대릉원이라고 지었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일단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데다 경주시 시가지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어[4]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 중 하나다. 입장료는 2020년 성인 기준 3천원이다.[5]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하나인 대릉원 지구이다. 단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어 있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2. 역사


대릉원, 그리고 그 바로 옆에 붙어있는 쪽샘지구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시설과 건물지가 주변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당시에도 대릉원은 지금과 비슷하게 도시 한가운데의 국가 묘역공원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특수성 덕분에 많은 양의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고, 이 유물들을 토대로 측정해본 결과, 대략 서기4세기~ 6세기경에 걸쳐 조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이 대릉원 처럼 서라벌의 중심부에 축조되지 않고 산이나 도시 외곽쪽에 축조됨에 따라, 오래잡아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이상의 확장이 없었을것으로 추정된다.

3. 고분군



▲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군Ⅴ -G지구 분포조사 보고서
가장 좌측 위의 구역이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 가장 가운데가 지금의 대릉원(황남리 고분군), 대릉원의 동쪽이 황오동 고분군과 쪽샘지구, 가장 아래 쪽의 구역이 인왕동 고분군이다. 노서리 130호가 서봉황대, 노동리 134호가 봉황대라고 불리는 왕릉이며, 가장 가운데의 황남동 98호가 바로 황남대총이다. 그 아래의 106호는 전 미추왕릉이며 지도 가장 아래의 119호가 삼국유사의 기록[6]으로 인해 내물왕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인왕동 119호이다.[7]
대릉원 일원은 아래에 서술되있는 월성로 고분군(또는 구역)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미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위계가 높아서 내지는 왕족, 귀족들의 무덤군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성로 구역 및 황오동 일대에서 비교적 먼저 대형의 무덤들이 만들어지다가 5세기 중엽경부터 독보적인 규모의 봉분을 갖는 빼박 왕릉들, 황남대총 또는 인왕동 119호분, 전 미추왕릉이 만들어지고 가장 마지막으로 5세기 후엽, 6세기경에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이 있는 쪽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서리,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서봉황대 고분[8]을 끝으로 경주 분지 외곽의 서악동 고분군으로 왕들의 무덤은 이동하게 된다.

3.1. 황남동 고분군


  • 미추왕릉
  • 천마총
  • 황남대총
  • 계림로 고분군 - 지금의 대릉원의 담장 동쪽에 계림로 공사를 하면서 조사된 구역이다. 계림로 고분군이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이 계림로 공사 구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고분들을 계림로 00호라고 지칭한다. 특히 계림로 14호분 같은 경우에는 유명한 감옥(嵌玉)보검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대릉원 담벼락의 길을 거닐다보면 계림로 14호분의 위치에 대해서 아주 작은 안내판이 자리있어 황금보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3.2. 노동동 고분군



3.3. 노서동 고분군



3.4. 황오동 고분군


옛날 경주군 시절에 지어진 이름 황오리 고분군이라고도 불리며 위의 고분군들에 비하면 굉장히 마이너한 고분군에 속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덤이 일부깎여나간 것이 보이며 무덤 바로 옆에 민가가 있고... 인도 사거리 바로옆에 고분이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이 고분군의 존재는 모르고 위의 주요 고분군만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워낙 많아 인적이 별로 없고 한가하다. 시간이 나면 한 번쯤 산책삼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다만 조금 변두리에 있어서 불편하긴하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서 반대로 걷다보면 나온다.
일제강점기때 이곳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 기의 무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봉분이 깎여나가 무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10여 기의 고분만이 존재가 정확히 확인되어 있다. 발굴조사된 무덤은 1호분·4호분·5호분·16호분·33호분 등으로, 신라의 일반적인 무덤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이 근처도 건물을 지으려고하면 유물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봉분만 없어졌을 뿐 도굴까지는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견해도 있다.
  • 월성로 고분군 - 전체 대릉원, 지금의 월성 주변의 경주 시내 가운데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구역이다. 위의 계림로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팔우정 로타리에서 월성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해당한다. 신라토기의 전개 과정 상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대형의 봉토를 갖는 왕릉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 쪽샘지구 - 황오동 남쪽에는 '쪽샘지구'로 불리는 고분밀집지역이 포함돼 있다. 2002년부터 시작하였으며 쪽샘지구 44호분의 발굴을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발굴 전시관을 설치 하였으며 2010년대에 접어든 현재 정비가 상당히 많이 진전되었다.
황오동 고분군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출토유물도 적은 편이다.[9]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의 전 단계인 덧널무덤(토광목곽묘)를 비롯 다양한 무덤형식들이 조사되어 경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3.5. 인왕동 고분군


지금의 인왕동 일대의 고분군으로 위의 지도에서 가장 대릉원의 밖, 가장 아래에 남쪽에 동떨어져 자리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이전에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말하는 지점과 지금 현재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표현된 지점이 다소 차이가 있으며 특히 대릉원의 남쪽 월성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점은 원래는 교동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사적은 아니였다. 사적 512호로 일괄 통합 변경되면서 사적 구역에 해당하지 않았던 범위도 일부 포함되고 혼용되기도 하였고 고분군의 명칭이나 일대의 행정구역 명칭이 복잡하다보니 개편된 명칭을 떠나서 원래 이름대로 부르는 경향 때문에 "인왕동 몇 호분"이라는 식의 명칭은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 인교동 119호 - 인왕동 고분군 군집의 가장 대형분이자 경주 시내 신라왕릉들 가운데서도 빼박 왕릉으로 손에 꼽히는 고분이다. 대릉원 주차장에 들어가기전에 대릉원 안쪽은 아닌데 엄청나게 큰 고분이 보이는 데 그것이 바로 이 119호분이다.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묘주가 내물왕인가 눌지왕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 황남대총의 묘주가 눌지라면 내물왕의 무덤은 어디인가라고 했을 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인교동 119호분이다. 삼국유사에서도 내물왕을 첨성대의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인교동 119호분도 첨성대의 남쪽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록 발굴되지는 않은 고분이지만 황남대총의 묘주 문제로 인하여 생각보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된 고분이기도 하다.
  • 전 내물왕릉 - 위의 인교동 119호와는 별개로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비정은 조선시대 전승이나 종친회의 결정, 문화재의 관리차원 등에서 정해진 것으로 실제로 역사고고학적 맥락에서보면 인교동 119호분이 내물왕릉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지금의 경주 시내 왕릉들은 대부분 5세기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5세기 신라왕릉은 매우 크다. 전 내물왕릉의 크기로써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은 규모라는 점에서 진짜 내물왕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전 내물왕릉의 봉분에는 삐져나온 호석들이 일부 보이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서악동 고분군에서 보이는 것으로 비교적 늦은 시기인 6세기 신라왕릉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 교동 64번지 고분 - 정확하게 교동 64번지 고분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64번지 고분은 정식 발굴된 고분이 아니라 과거 도굴꾼이 소형 금관[10]과 귀걸이, 환두대도 등을 도굴하였던 경찰이 압수하면서 취조 후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도굴품들의 진위여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으나 지금의 대세론적인 결론은 진품으로 보는 편이며, 진품이라는 전제 아래에 금관의 크기로 보았을 때 왕족 남자아이의 무덤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입장료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경주시민(신분증 제시), 장애인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는 입장료가 면제된다.

5. 관련 항목



[1]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천마총 내부는 70년대의 그 구성이 계속 이어져 좀 낡은 감이 있었지만 2018년에 리모델링한 후 매우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바뀌었다.[5] 천마총 리모델링 공사를 했던 2018년 4월 16일까지는 관람객의 볼거리가 줄어든다는 점 때문인지 기간 동안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대신 무료입장 기간 동안 대릉원 안에 있는 천마총의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사가 지연됐는지, 2018년 7월 27일 부터는 다시 천마총을 복원하여 입장료를 걷는다.[6]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추정한 것은 지금의 '''전 내물왕릉'''이고 역사고고학적으로는 119호분이 해당한다.[7] 교동 119호라고도 불린다.[8] 겨울에 경주에 사는 어린이들이 눈썰매를 탄다는 그 카더라가 있는 큰 무덤이다.[9] 때문에 주로 왕족이 아닌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한다.[10] 교동 64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소형 금관은 교동 금관, 또는 교동 64번지 출토 금관, 전 교동 출토 금관 등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