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캄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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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2. 생애[4]
2.1. 축구 선수
2.1.1. 클럽
캄파날은 1929년, 당시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이었던 스포르팅 히혼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2만5천 페세타에 같은 세군다 디비시온의 세비야 FC로 이적했고 1934년까지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의 승격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강팀이었지만 라리가에 승격하기는 조금 힘든 그런 팀이었고 캄파날이 군대에서 돌아온 1933-34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 우승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승격을 이뤄냈다. 그는 그 시즌에 같이 승격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시합에서도 1골을 넣어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이렇게 17경기에서 28골을 넣어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지며 하드캐리를 했다.
꿈에 그리던 1군 무대에 올라온 캄파날은 세비야가 승격하자마자 팀의 주포 역할을 하며 1935년 코파 델 레이의 우승을 이끌었다. 결승전에서도 캄파날은 2골을 넣으며 3대0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여느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캄파날의 커리어도 스페인 내전으로 중단되었다.
1939년, 다시 시작된 시즌에서 세비야는 한 번 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캄파날은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1939-40 시즌에 세비야는 준우승까지 성적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가 두고두고 아쉬울 한 판이었는데 세비야는 21라운드 시점에서 11승 5무 5패, 승점 27점으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을 골득실차에서 앞서고 있었다.[5]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틀레티코가 레알 마드리드 CF를 3대1로 꺾을 때 세비야는 에르쿨레스 CF와 3대3으로 비기며 첫 리그 우승 타이틀 도전에 실패했다.
1940-41 시즌에 세비야는 5위에 그쳤지만 FC 바르셀로나를 11대1로 박살내며 클럽 역사상 라리가 최다 점수차 승리 기록을 쓰기도 했다. 캄파날은 이 경기에서 5골을 넣었다. 이 시즌에 캄파날은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해트 트릭,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골을 넣는 등 18경기에서 17골을 넣으며 뜨거운 득점 감각을 보였다.[6]
1942-43 시즌이 되면서 캄파날의 득점 페이스는 떨어져 갔다. 그 이후로 그는 출전 시간도 줄어들면서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어갔지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해트 트릭도 기록하는 등 가끔은 클래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45-46 시즌에 세비야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라리가 챔피언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세비야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리그 우승이고 캄파날은 4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다.
캄파날은 17시즌을 뛰며 214골을 기록, 현재까지 세비야 클럽 역사상[7] 최다 득점자로 남아 있다.
2.1.2. 국가대표
세비야가 아직 세군다 디비시온에 머무르던 1934년, 캄파날은 아마데오 가르시아의 부름을 받아 월드컵에서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대표팀의 센터 포워드 자리에는 이시드로 랑가라의 자리가 확고해서 캄파날의 출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캄파날의 데뷔전은 이탈리아 월드컵 8강 재경기였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에 0대1로 패했다.
이후 캄파날은 오랫동안 대표팀과 인연이 없다가 1941년, 포르투갈과의 친선 2경기에 참가했다.
캄파날은 3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다.
2.2. 감독
1946년 선수에서 은퇴한 캄파날은 그 해 11월, 말라가 CF에서 깜짝 감독 데뷔를 했다.
그러다 1949년, 친정팀 세비야 FC의 감독으로 돌아온 캄파날은 4시즌 동안 팀을 지휘하면서 1950-51 시즌 세비야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 시기에 캄파날은 자신의 조카 마르셀리노를 세비야에 데려오기도 했는데 마르셀리노는 이후 16시즌 동안 세비야에서 수비수로 활약했다.
캄파날은 1957년에 세비야의 다시 건너와서 마지막 경기를 맡아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무승부를 이끌면서 팀의 통산 4번째 리그 준우승[8] 을 이끌었다. 이로서 세비야는 유러피안 컵 진출권을 따냈고 캄파날은 오프 시즌에 세비야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면서 사투르 그레크(Satur Grech)에 감독직을 넘겼다.
1959년에는 정반대로 강등 위기에 몰린[9] 세비야의 감독직을 맡아 12위로 시즌을 마쳐 세비야를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고 기술이 뛰어나면서 득점 감각을 갖춘 스트라이커.
세비야 FC에서는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 받는다.
4. 수상
4.1. 클럽
-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5–46(세비야 FC)
-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1935, 1939(세비야 FC)
- 세군다 디비시온 우승 1회: 1933-34(세비야 FC)
-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39–40, 1942–43(세비야 FC)
- 코파 안달루시아 우승 7회: 1929–30, 1930–31, 1931–32, 1932–33, 1935–36, 1938–39, 1939–40(세비야 FC)
- 테레사 에레라 트로피 우승 1회: 1946(세비야 FC)
4.2. 개인
- 세군다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33-34(세비야 FC)
4.3. 감독
[1] 흔히 마르셀리노로 알려진 조카는 캄파날 2로 불린다. 퍼스트 네임은 조카와 같지만 삼촌은 기예르모로 더 알려져 있고 피파 월드컵 보고서에서도 기예르모 캄파날 1으로 기록되어 있어 항목명을 그에 따랐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은 21라운드까지 13승 1무 7패라 승점은 27점으로 같았지만 세비야는 +16, 아틀레티코는 +12였다. 당시는 승리팀에게 승점 2점이 주어졌다.[6] 하지만 당시 스페인 리그에서 득점왕이 되려면 20골 정도는 넣어줘야 했다.[7] 라리가로 한정하면 캄파날의 기록은 후안 아르사, 후안 아라후오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8] 15라운드에서 2대1로 세비야가 바르셀로나에 승리했었다. 승점이 같고 골득실에서 세비야가 밀렸지만 승자승 원칙으로 세비야가 2등을 차지했다.[9] 14라운드까지 꼴찌에서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