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드로 랑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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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어린 시절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랑가라는 학교에서 축구 클럽을 만들고 축구를 즐겼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무렵 랑가라도 다른 소년들처럼 축구와 거리를 둘 것을 강요받았고 곡예단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8년, 랑가라의 삼촌이 그를 데리고 산 세바스티안으로 여행을 갔다가 에스페란사 클럽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고 랑가라는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 축구 선수
1.2.1. 클럽
1930년, 18세의 나이로 당시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이었던 레알 오비에도의 선수가 된 랑가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비에도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
데뷔전이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오비에도의 4대1 승리를 이끈 랑가라에게 세군다 디비시온은 좁은 무대였다. 결국 랑가라는 1932-33 시즌에 오비에도를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우승시키며 오비에도와 함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데뷔했다.
랑가라의 득점포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도 쉬지 않고 가동되었고 그 결과는 3년 연속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이었다. 그것도 당시에는 18경기(1933-34 시즌), 22경기(1934-35, 1935-36 시즌)으로 지금보다 경기 수가 훨씬 적어서 득점 2위 그룹이 20골 언저리로 골을 넣을 때 랑가라는 혼자서 26골 이상씩을 넣는 압도적인 골 기록을 선보였다. 현재의 38경기로 치환하면 1933-34 시즌에는 54.9골, 1934-35 시즌에는 46.6골[4] , 1935-36 시즌에는 48.4골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나온다. 물론 경기를 지속하다보면 페이스가 떨어질 수 있음을 감안해도 랑가라의 당시 득점력은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다른 공격수들보다 한두차원은 위에 있음은 분명했다. 그는 오비에도에서의 6시즌 동안 220회의 경기에 출전하여 281골을 넣었다.[5]
하지만 이 거침없던 골폭풍은 전쟁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랑가라는 당시 프랑코 정권에 위험인물이었고 전쟁을 피해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루이스 레게이로, 호세 이라라고리, 레오나르도 실라우렌 등과 유럽 투어를 다녔다. 그들은 경기를 치르며 바스크 난민들을 위한 모금과 바스크 정부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결국 빌바오가 팔랑헤의 손에 떨어지자 그들은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쿠바, 아르헨티나 등을 거쳐 그들은 멕시코에서 CD 우스카디(Uzkadi)라는 이름으로 한 시즌을 치른 후 팀은 해산했고 랑가라는 그의 전 팀동료였던 앙헬 수비에타(Ángel Zubieta)의 소개로 아르헨티나의 CA 산 로렌소에서 뛰게 되었다.
랑가라는 CA 리버 플레이트와의 아르헨티나 무대 데뷔전에서 전반에만 4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데뷔를 했고 4시즌 동안 리그 득점왕 1회를 포함, 110골[6] 을 넣으며 역대 산 로렌소 클럽 통산 득점 랭킹 7위에 올랐다. 다만 아르헨티나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1942년 산 로렌소의 멕시코 투어에서 랑가라는 9경기에 나가 23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43년, 랑가라는 멕시코의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로 이적했다.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에는 이미 이라라고리가 뛰고 있었고 실라우렌도 랑가라와 비슷한 시기에 동료가 되었다. 랑가라는 멕시코에서도 2차례 득점왕에 올랐고 한 차례씩 리그와 컵 대회에서 우승했다.
1946년, 프랑코 정권에서 바스크 선수들을 포함한 정권에 반대했던 선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드디어 랑가라는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친정팀 오비에도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복귀 시즌에 비록 30년대와 비슷한 골기록을 쌓지는 못했지만 18골을 넣으며 전체 리그 득점 4위에 자리했고, 다음 해에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축구화를 벗었다.
1.2.2. 국가대표
랑가라가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골폭풍을 몰아치던 1932년, 그는 이례적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첫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는데 랑가라는 선제골을 넣었고 그의 활약으로 스페인은 유고슬라비아를 2대1로 꺾었다.
랑가라는 1934년 월드컵 지역예선전에 참가해 포르투갈을 상대하게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1차전에서 랑가라는 무려 5골을 집어넣으며 포르투갈 수비수들의 자존심을 뭉개놓았고 스페인은 9대0이라는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리스본 원정 경기에서도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2대1로 제압했는데 이 경기에서 스페인의 득점자는 랑가라 단 한 명이었다.
스페인은 랑가라의 대활약으로 당연히 월드컵 본선에 참가했고 랑가라는 전반 29분, 브라질의 골문에 3대0으로 달아나는 쐐기골을 넣었다.
8강전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 거친 이탈리아 선수들과 그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심판 때문에 스페인은 경기를 어렵게 풀어나갔다. 후반 40분에 랑가라의 득점이 나왔지만 취소되었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1대1로 비겼다. 이 시합에서 스페인 선수들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고 재경기에서 스페인은 랑가라를 포함해 7명의 선수가 바뀐 채 경기를 진행해야했다. 결국 스페인은 이탈리아에 0대1로 패했다.
랑가라는 스페인 대표팀으로 12경기에 출전, 17골을 기록했다.
1.3. 감독
랑가라는 1948년에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아메리카로 다시 건너갔다. 랑가라는 칠레의 우니온 에스파뇰라, 멕시코의 클루브 푸에블라, 아르헨티나의 CA 산 로렌소 등지에서 감독을 맡았고 리그와 컵 대회에서 한 번씩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랑가라는 가속력, 기술, 피지컬[7] 등에서 강점을 보였고 득점 감각도 뛰어났지만 가장 특별했던 것은 중거리 슈팅 능력이었다.
오비에도는 1933-34 시즌에 FC 바르셀로나를 7대3으로 꺾은 적이 있었는데 랑가라는 50미터도 넘는 거리에서 프리킥으로 두 골을 넣었다. 이를 회상한 RCD 에스파뇰의 골키퍼 라사로 플로렌사(Lázaro Florenza)는 '그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불가능한 득점을 성공시켰다.'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몇 주 후, 라사로도 비슷한 골을 허용했다.
3. 뒷이야기
- 랑가라는 1933-34 시즌에 클럽, 대표팀 기록을 모두 망라해 총 60골을 넣었는데 이는 아직도 스페인 출신 선수들 중 최고 기록이다.
- 랑가라는 라리가에서 37경기만에 50골, 82경기만에 100골을 기록, 스페인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50골, 100골 기록 보유자이다. 이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조차 깨지 못한 기록이다.
4. 수상
4.1. 클럽
- 리가 MX 우승 1회: 1944-45(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코파 MX 우승 1회: 1943-44(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리가 MX 준우승 2회: 1938–39(CD 우스카디), 1943-44(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41, 1942(CA 산 로렌소)
- 세군다 디비시온 우승 1회: 1932-33(레알 오비에도)
4.2. 개인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3회: 1933-34, 1934-35, 1935-36(레알 오비에도)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40(CA 산 로렌소)[8]
- 프리메라 푸에르사 득점왕 2회: 1943-44, 1945-46(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세군다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31-32(레알 오비에도)
4.3. 감독
-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51(우니온 에스파뇰라)
- 코파 MX 우승 1회: 1952-53(클루브 푸에블라)
-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50(우니온 에스파뇰라)
- 캄페온 데 캄페오네스 준우승 1회: 1953(클루브 푸에블라)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이 시즌에 오비에도는 3위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오비에도 역사상 가장 높은 리그 순위 기록이다.[5] 공식 경기로 한정하면 160경기 230골이라고 한다.[6] 121경기 출전[7] 산로렌소 동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레슬러같은 피지컬의 소유자였다고 한다.[8]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와 공동 득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