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파

 


1. 개요
2. 등장 배경
2.1. 위정척사론과 의병투쟁
2.2. 화서학파
2.3. 노사학파
2.4. 한주학파
3. 긍정적 평가
4. 부정적 평가
5. 다른 의미(?)


1. 개요


구한말에는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일제가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탈하는 시기에는 항일의병 활동으로 바뀌었다.

2. 등장 배경


1860년대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으면서 위정척사파가 등장한다.

2.1. 위정척사론과 의병투쟁


읽다가 파악하겠지만, 이 항목에 언급된 세 학파 모두 주리론적 이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구한 말의 성리학에서 주기론적 이기론을 전개한 간재학파도 있지만, 위정척사파와는 다소 거리가 먼 편이기 때문에 제외했다.
사실 주기론으로 끝나면 안되고, 호락논쟁에서 인물성이론을 펼친 호론의 분파로 보는게 이해하기 더 쉬울 것이다. 호론을 인성과 물성으로 나누었고, 양자의 우열을 인정했다. 노론중에서도 송시열의 직계가 노론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에 속했다. 단, 세 학파들의 이기론에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편이다.

2.2. 화서학파


화서 이항로의 학설을 토대로 한 학파로 경기 지방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 화서학파는 흔히 유리론(唯理論)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이야기되나, 사실은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이 혼합된 이기론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이 있다.
이항로는 주자의 학설을 확고히 하고, 우암 송시열을 공자, 맹자, 주자를 뒤이은 도통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을 자신의 화이론과 연결하였다. 그의 이기론은 이이와 성혼의 학설을 절충했는데, 이(理)와 기(氣)가 상호적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理)가 기(氣)에 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이기론을 바탕으로 이를 지향하는 문화는 중화의 문화임을 강조하고, 중국과는 다른 이질적인 문화는 이(理)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사악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항로는 서양의 학문이 통화통색(通貨通色, 재화를 유통시키고 색정을 통한다)을 추구하는데, 이는 인욕(人慾, 전통적인 성리학적 관점에서 인심(人心)의 악한 부분이라 해석되는 개념)의 핵심으로 파악[1]하였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적(夷狄)보다 못한 금수(禽獸)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파의 서양과의 통상 반대의 기반이 되었다.
이항로는 단순히 이런 통상반대론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방법론인 내수외양(內修外攘)을 제시했다. 그는 서양의 물건들은 인간의 사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욕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입을 금지하고, 더불어 서학에 동조하는 이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항로는 단순히 척화론이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 말한다. 그가 바라본 근본적인 해결책은 성리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천리와 인욕을 분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항로는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의 마음가짐 여하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음을 역설한다. 인(仁)을 바탕으로 군주가 덕치를 펼 것을 강조했는데,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에서 덕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다. 병인양요 이후에 올려진 이 상소에는 조정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무력 증강을 꾀하고, 인망 있는 자를 중용할 것을 요청했으며, 특히 여기에 쓰여진 의려책(義旅策)은 이후 유림들의 항일 투쟁의 실천적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하의 유학자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리고 알려진 것과 달리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2.3. 노사학파


노사 기정진의 학설을 토대로 한 학파. 호남 지방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2.4. 한주학파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토대로 한 학파.영남학파를 총결하는 학파로, 퇴계학파를 계승하고 남명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한주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주 이진상과 그의 문인 중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리는 곽종석, 이승희, 허유, 이정모, 윤주하, 김진우, 장석영, 이두훈이 있으며, 곽종석 문하의 이인재, 이병헌, 김창승이 대표적이다.

3. 긍정적 평가


성리학적 질서의 유지와 개화에 반대하는 입장과 존명사대의 실천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일반인에게는 수구꼴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평가는 세계와 동떨어져 있던 조선에서 그들의 주장은 봉건적 전통의 수호였던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위정척사파를 수구꼴통으로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삼정의 문란 등으로 썩어있는 당시의 조선 사회를 그대로 두자는 의미가 아니라 유교적 이상향인 대동사회를 구현하자는 의미를 담아 유교적 질서의 유지를 주장했다. 이는 '''현 집권층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반성 및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를 포함한 유교적 의미의 사회개혁론을 포함한 것이었다.
급한 사람들은 '1보 나아간 걸 10보 나아가지 않았으니 아무 소용 없다'고 비난만 하면 홀로 탈조선해서 선지자가 되는 줄 아는, 쿨병 걸린 패배주의 식민사관에 홀려 있는 것 뿐이다. 모든 진전에는 과거부터 기반이 되어줄 정책들이 밑거름이 되는데, 걸음마할 시간에 100m 달리기를 요구하는 꼴이다. 조선의 경우는 단지 수십년에 걸친 외세 침략으로 시간이 따라주지 못한 게 결정적인 문제였다. 주변국에서도 비슷한 위정척사파 파벌이 생겨났는데, 일본의 경우는 미국의 남북전쟁 후 한동안 해외 문제에 신경쓸 겨를 이 없던 사이, 일본 전국토에서 벌어진 무진전쟁 때 살해당하거나 패배해서 세가 위축된 것뿐이며, 중국은 한번에 먹기 너무 커서 천천히 개화가 스며들다가 전국에서 군벌끼리 나뉘어 수십년간 싸워댔다.
실제로 기정진의 경우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삼정의 문란, 특히 환곡제도의 심각한 실태를 지적하고 개혁책인 임술의책을 내놓을 정도로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위정척사론자는 당대 조선에서 크게 다루던 조선책략에서 친미, 친일, 반러를 표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경계해야 하고, 러시아는 이웃 나라인데 혐의가 없이 경계하면 위험하고, 미국은 허점을 노리고 뭘 요구할지 모르는데 어찌 믿습니까?'''라는 시각이었다. 현대적 시각으로도, 조선책략의 저자가 '청나라의 외교관'이기 때문에 의도를 의심할 소지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자국의 헤게모니 권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전근대의 조공 외교 관계를 근대의 속령이나 식민지 관계로 바꾸려는 시도도 분명 있었다. 이런 청나라의 입장을 해외에 대표하는 관리인 외교관이 우리에 대해 하는 '조언'을 곧이 곧대로 듣는 걸 경계했던 것이다.
위정척사론자의 주장이 단순히 구시대적 발상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없다. 위정론에 대해서는 내수위양이라는 방법론은 거의 동일하지만, 척사론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항로의 척사론은 척양론에 중점을 두는가 하면, 최익현은 처음에는 척양론에 덧붙여 왜양일체론을 전개하는데, 나중에 가면 서양에도 의리는 있다고 얘기를 바꾼다.(...)
실제로 매천야록에서 보면 보어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어인들이 힘껏 저항하자 영국이 이를 존중하여 몰살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서양 세계에서도 의리와 도덕이 있음을 언급했다. 또, 을미사변과 개혁 때의 상소를 보면 공법조약[2]을 통해 국모 시해를 각 국에 알리고 왜적을 처단하자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도덕적 당위성이 충분하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속성상 정작 열강들은 준식민지화되는 조선의 사정은 알 바 아니고 조선에서 이권을 뜯어먹기 위해 조선의 혼란상을 이용하기만 하였다. 상당수의 개화파들은 친일, 반러였다.물론 친일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가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었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바람에 일본의 주장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반러 행보를 보인 것.

4. 부정적 평가


위정척사론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종교, 학문을 배척하고 대외통상을 반대하는 주의'로, 극단적 배타성을 담고 있는 주의이다보니 '''처음부터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고와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시대의 변화를 전혀 쫓아가지 못한 채 헛물만 켰고, 시기상으로 흥선대원군쇄국정책과 뒤섞이며 조선은 더욱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척사론에서는 전근대적 생산 방식에 머물러 있는 조선의 사정과 이미 산업화를 거친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산력 차이를 인지하여 "서양의 물건은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 한계가 없는데 우리의 물건은 땅에서 나와 한계가 있다."[3]는 관점을 가졌는데 부족한 조선의 물산으로 함부로 교역하다가는 당장 조선 백성들의 삶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즉 이것이 서양과 교역할 때 불리한 점이라고 넘겨다 본 것인데, 이것은 사실 경제학에서는 데이비드 리카도비교우위론만으로도 쉽게 부정되는 초보자의 오류에 속한다. 다만 비교우위론에 입각해서 당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보기에도 무리인 게 서구 열강들의 통상 목적은 경제적인 침탈에 가까웠다.당시 조선은 농업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당장의 주요 생산품이라고 해 봤자 농산물이나 광물 등인데 이마저도 풍부하지 못해 대규모로 수출해 이윤을 벌어들이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 무역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차익이 적어서 기술 등을 도입하거나 생산력을 늘릴 수 있는 자본을 형성시키는 것이 어려웠다.실제로도 일본은 조선의 쌀을 값싸게 수입하면서 자신들의 면포를 비싸게 팔아 조선을 조금씩 경제적으로 예속시켰고, 다른 서구 열강들도 이런 방식으로 식민지를 만들었다.[4]
큰 틀에서 볼 때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명적인 단견(短見)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신미양요 이전 조-미 양국이 주고받은 국서를 통해 조선왕실의 공식입장이기도 함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조선의 경제학이 뒤처진 수준이었다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전근대적 생산 방식에 머물러 있던 일본 또한 생산력이 압도적인 서양과의 교역으로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순탄하게 부국강병에 성공한 것을 보면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단편적인 식견으로 주장하는 숭일주의자들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는 서로 무진전쟁,서남전쟁이라고 한바탕 전국토에서 전쟁을 벌여 의견이 맞지 않는 반대파를 묵살해버리고, 오키나와, 홋카이도 침략과 나아가 조선의 침략을 통해 근대화의 비용을 겨우 충당한 것이다.그리고 사실 그 일본도 청일전쟁,러일전쟁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기도 했다.사실 청일전쟁의 경우는 그래도 나름 배상금을 두둑히 받았지만 러일전쟁은 아예 한 푼도 못 받았다.
다만 일본의 근대화가 순조롭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한테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서구 열강들에게 억눌려 지내던 후발국가였다. 애당초 철도와 조선소,공장 같은 산업 인프라부터 철갑선과 대포 같은 무기, 의학과 공학 등의 각종 학문에 이르기까지 절대 공짜가 아니라 서양에 막대한 금과 은, 각종 이권을 지불하면서 얻어낸 것이고 일본은 이 때문에 빚더미에 앉았다가 막대한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살아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아직 헌법도 없던 1873년부터 벌써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선을 상대로 불공평 조약을 맺어 조선의 피를 빨아서 차근차근 국력을 키워간 것이었다. 아울러 메이지 유신 무렵의 일본은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나라 안의 광산이나 각종 이권은 이미 유럽 열강에 상당수 팔아먹고 빚을 진 상태였었고,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는 이미 서구 열강에 장악되어 시장 침투를 할 수가 없었서 일본이 돈 벌 수 있는 곳은 조선 밖에 없었다. 출처 조선에서 얻는 이익이 과연 일본을 근대화 시켜줄 정도로 막대했는지는 의문이고 출처로 제시된 글에서도 구체적인 이익수치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사실 조선은 미국과의 수교를 거절할때도 우리는 너무 가난해서 내다팔 물건은 커녕 자급자족조차 안된다고 할 정도로 궁핍한 경제사정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도 한일병합을 해보니 막상 독립운동 진압하고 군대를 이동시킬 철도 깔고 하면 남는 돈이 없어서 조선 총독부는 해방 직전까지도 만성 적자에 시달렸었다. 아울러 조선과 일본보다 일찍 서구 열강들과 수교 및 개항을 한 중국 청나라는 부국강병은 커녕 오히려 서구 열강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며 그들에게 이권을 빼앗기는 반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청나라는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로 외세에 개항을 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인 1860년 영국은 또 다시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침략하고 베이징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아편전쟁의 경과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조선이 서구와의 개항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이 요구하는 대로 개항을 하고 수교와 무역을 했으나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는데, 과연 조선에서 우리도 어서 서구와 통교를 해야 한다고 나설 사람이 많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제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 사회에서는 곧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와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보따리를 싸들고 산과 계곡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불안한 민심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글인 권학가와 포덕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요망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중략) 서양은 싸워서 승리를 취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서양이 천하를 진멸하니 순망지탄이 아닐 수 없다."라며 두려워하였다.(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권/ 김탁 지음/ 북코리아/ 351~352쪽) 청나라 이외에도 서구 열강들이 원하는 대로 수교와 개항을 했지만 근대화나 부국강병은 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신세로 전락한 베트남이나 이집트의 경우도 있다.
이 부정적인 항목에서는 일본이 순조롭게 일본이 순조롭게 서구 열강에 개항을 해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고 기술했으나, 그것은 19세기 세계사를 통틀어 서구 열강에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일본의 사례가 매우 특이하고 운이 좋았다는 역사학계의 보편적인 통설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근대화나 부국강병도 결코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흔한 인식과는 달리, 일본이 조선 침략을 결심하던 메이지 시기는 극심한 혼란기로 해마다 민란이 곳곳에서 수백건씩 일어났고 일본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집도 절도 팔아먹고 밤마다 술마시고 혼음 난교를 벌이는 촌락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각종 사이비 종교들이 난립하였다. 바람의 검심 등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찬 새 나라 꿈을 꾼다는 소리는 당시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고, 오히려 다카하시 츠토무의 만화 Sado(士道)에서 보여준 혼란이 그 시대 정황과 맞았다. 출처 이 부정적인 항목에서는 일본이 순조롭게 서구 열강에 개항을 해서 근대화를 이루었는데 왜 조선은 그렇게 못했느냐고 폄하하고 있으나, 그런 생각은 19세기 구한말로부터 150년이 지난 훗날에 와서 과거를 재단하는 시각일 뿐이며, 정작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를 살아갔던 동아시아 사회의 민중들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언제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가득 찬 혼란과 불안의 시기를 살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는 대표적인 열강으로 부동항을 원했고 조선엔 원산 등 부동항이 많아 눈독을 들이기도 했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자기만의 세상에 고립된 무식꾼들에게는 비교적 최근에나 갑툭튀 나온 나라라고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유라시아를 관통하여 거대한 영토를 확장한 나라로써, 조선의 사정상 러시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경계할 합리적인 이유는 있었다. 이이제이를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이제이는 재정에 여유가 남아도는 과거 중국이 가난한 유목민들에게 돈을 주고 그것을 미끼로 서로 싸우도록 이간책을 쓰는 것을 말한다. 좀더 큰 청나라도 서양 열강에 대해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실패했는데, 사르데냐 왕국이 성공시킨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간의 경쟁을 잘 이용해 안 먹히고 서로 견제하면서 홀로 부흥할 시간을 벌어준 경우도 있다. 그리고 병력과 자금이 많다고 그걸 전부 조선에 꼴아박을 계획도 없었고 이 당시 동남아 식민지들을 소화시키느라 바쁜 상황이어서 일본마저 친서양 매국노 심어서 빨대 꽂고 먹을 시기를 놓친 경우였다.[5]
그리고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는 완충지대로 만주가 있었지만 러일전쟁 직전에 러시아는 이미 대군을 만주에 주둔시키고 실질적인 통치권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청일전쟁과 함께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히 증가했을 때 만주에서 러시아의 존재는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무산시킨 결과를 낳았다.
앞서 영국, 러시아와 맺었던 조약처럼 미국의 경우에는 조선과 서로 위험이 닥치면 중재에 나서준다는 내용을 조약에 넣었으며 미국은 청일전쟁 때 최익현의 주장처럼 허점을 노리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쟁 종결을 주선하는 등 한 번은 도와주었다. 물론 조선의 멸망까지는 막아주지 않았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데 애초에 조약 자체는 통상 조약에 불과했었고[6] 미국이 중재를 하려고 해도, 고종이 미국의 호의를 가능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 일본 두 세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완충지대로써 독립을 보존해도 모자랄 판에, 고의로 당시 미국의 최대 경계 대상인 러시아를 끌어들여 러일전쟁을 유발했던 결과였다.[7] 시대적으로 러시아의 만주, 몽골 및 베이징까지의 진출이 고조되던 시점에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던 미국으로서는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조선에 대해 따로 이해 관계가 없었던 미국이 최익현의 뇌피셜과 달리 정말로 순수하게 한 번은 중재에 나서주기는 했었지만, 한번 성과를 보고 간덩이가 부어서 미국이 조선을 돕기 위해서 순순히 자기 발등까지 찍는 호구로 취급하는 망동은 국제 외교에서는 완전한 패착이었다.[8]
즉 위정척사파는 처음부터[9] 해외 사정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편협한 뇌피셜만으로 행동하던 사람들이 맞다. 이들은 상소를 올리며 만국공법을 인용하였지만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적용되는지에 대한 해석 능력이 없었으며, 교역에 반대한 것도 오랑캐들과 교류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경제학의 기본인 리카도비교우위론도 무지한 채로 경제적 침탈론까지도 억지를 쓰며 전개하고 있었다.[10] 이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의견에는 분명 폐쇄적이고 고립되어 낙후된 촌구석에서 바라본 편견이나 선입견이 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홍재학은 상소에서 서구랑 친해지면 우리도 오랑캐 된다며 거름구덩이 등의 욕설을 넣었다. 당연히 이들이 서구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통적 봉건국가의 식자층에서도 극단적인 수구 꼴통에 속한다.
위정척사론에서 이야기하는 중화(中華)는 한(漢)족의 유교적 정신을 의미하는데, 청나라가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에 한족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당대의 관점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중화사상의 변방적 의미의 계승자이자 한족의 나라가 복원될 떄까지의 임시 거점인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중화 숭배의 정신을 벗어난 일은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소중화로서 청나라에 예속된 번국으로서가 아닌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체성의 선언이기도 하였다. 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청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결국 만주족의 나라가 아니라 한(漢)족의 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가 될 뿐이었다.[11] 이에 대해서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당장 화서학파의 사상적 기반에는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이 있다.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최익현이 흑산도로 귀양가서 지장암에 새겨놓은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剛山 洪武日月) 이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반도는 기자가 중국에게 책봉받고 명나라의 홍무제의 해와 달이 뜨는 땅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만을 한민족의 합법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12] 이것과 비슷한 소중화 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금까지 주나라 무왕에게 조선의 제후로 책봉된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 빼고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지 않고 한반도의 땅을 도둑질해 제멋대로 세운 유사국가라고 비난하면서 기자조선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국가라고 칭찬하며 조선이라는 이름을 정해 준 명나라의 홍무제를 찬양하는 삼봉집이 있다.[13][14] 그리고 또 다른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유인석은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 쑨원에게 '우리나라는 대중화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중국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며 한족의 중국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이 그렇게 했으며 중국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내용의 흥중화국정부서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한마디로 소중화 유교소농주의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지배층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변하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 지금까지처럼 쭉 소중화 유교소농주의 사회가 유지되길 원한 것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15]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위정척사파는 이들을 의병을 사칭하여 향촌사회를 약탈하고 자신들의 향촌지배권에 반대하는 폭동이 다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본군과 협력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했는데도 이들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은 물론 화적죄로 몰아서 생매장하기도 했으며 관리가 귀순한 동학농민군들은 죄를 묻지 않기로 했는데도 아득바득 색출살해하면서 토지문서를 약탈해 가기도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엄연한 외세이며, 제국주의 침략국인 일제와도 손을 잡은 것이다. 이미 일본은 침략 의지를 드러냈는데도 이를 등한시하거나 외면하다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의병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변명이 안 된다. 더 어이없는건 그럼 또 이 시기에서는 뭐가 달랐냐면 그것도 아니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동비라 불렸는데 이 시기에 이들도 의병이 되려고 했다. 문제는 해당시기 의병장들은 대개 양반이었고 이들은 "어딜 동비 따위가!" 라며 안 받아주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들 위정척사파 민보군은 1894년 이후 정치적 입장차이로 분열하기도 했는데 반외세를 외치며 의병으로 활동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의병 활동을 하는 세력도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때 전투력을 확실히 증명했지만 정작 중요한 항일전선에서는 내부분열로 인해 적재적소에 활약하지 못하고 의병전쟁의 실패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애당초 이들이 말하는 '정'은 소중화 유교사회이고 '사'는 서양의 사상이었다.

5. 다른 의미(?)


[image]
(...)[16]
여기에서 의미가 와전되어 다른 성적이 다 좋은데 유독 외국어 성적만 낮은 경우, 또는 외국어가 아예 안 되는 사람들을 비꼬는 의미로 쓰기도 한다. 그 외국어가 '''영어'''라면 더더욱 그렇고, 자학의 의미로 쓰이는 일도 있다. 요즘은 영포자란 말로 대체되어 거의 안 쓰이지만.
그 외에 한식을 먹으면 괜찮은데 양식을 먹으면 장 트러블을 일으키는 경우에 위정척사파라고 하기도 한다.

[1] 화서의 경우, 통색보다 통화의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교역을 통해 상업이 발달하면 백성들이 사리사욕만을 추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북학파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2] 이 무렵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에서도 전통적인 경전을 인용한 것처럼 '만국공법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국제법을 근거로 삼아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당시 많은 동양의 지식인층들이 이 국제법을 보고 감탄하였다. 나라 간의 지켜야 할 의리를 상세히 적어놓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3] 최익현의 지부복궐척화의소[4] 그리고 위정척사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비교우위론을 들었지만 비교우위론 자체도 비판할 점이 많다. 그나마도 굳이 조선에 적용하자면 조선은 정부 관료나 위정척사파가 인정할 정도로 거의 모든 산업이 낙후되어 있었고 이 와중에 무역을 위해 그나마 내세울게 있다면 결국 1차산업의 생산물이었고 그 중에서도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쌀이 많이 차지했다. 문제는 쌀이 '''식량'''이었고 정작 그 쌀과 교환해온 것들은 당시로서는 생필품까지는 아니었다는 것, 즉 꼭 필요한 물건을 주고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물건을 들여오는 것이 개항 후 조일간 무역이라 할 수 있는데(그리고 이것은 다른 무역도 비슷했을 것이다.) 조선이 쌀이 넘쳐나는 나라였다면 몰라도 조선도 당시 쌀이 그렇게 넘쳐나고 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즉 자국민 먹여살리기에도 빠듯한 쌀을 사치품 구입을 위해 사들였다는 얘기인데 설상가상으로 쌀이 풍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에 쌀을 소비할 수 있는 이들은 보통의 민중들에게는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결국 또 들여온 물건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퍼져 개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는 공업화를 하거나 상업 작물의 생산을 권장하여 쌀 유출을 막는 방법도 있고 방곡령이라 하여 흉년이 든 지역의 쌀 등의 유출을 막는 방안도 있었지만 전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고 후자는 어디까지나 흉년이 들었을 때 내릴 수 있는 조치다. 애초 조약체결 당시 무관세가 얼마나 독으로 작용할 지 모르던 정부 관료들이 이런 대책을 내놓으리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민간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는 방법을 내놓는 것도 아니고[5] 페리 제독의 개항인 1854년부터 서남전쟁이 종결된 1877년까지를 보면 1850년대는 크림전쟁, 1860년대에는 남북전쟁, 제2차 아편전쟁, 사이공 조약 1870년대는 보불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벌어져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일본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다. 기껏해야 일본과 일어난 사쓰에이 전쟁, 4국함대 포격이나 조선에 일으킨 병인양요, 신미양요처럼 잠깐 깔짝하다가 마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적어도 일본의 정부 역할을 하던 에도 막부는 개항을 했고 어느정도 비위를 맞춰주었고 웅번들은 초기엔 존왕양이를 외쳤지만 사쓰마는 사쓰에이 전쟁, 조슈는 4국함대 포격사건으로 인해 똑같이 개항으로 선회했다. 즉 일본은 청나라나 조선에 비해서 일본은 돌아가는 눈치도 잘 본 편이기도 했다.[6] 겨우 통상 조약만으로 남의 나라의 전쟁에 무한정 개입이 의무화된다면, 국가간의 관계에서 안보 동맹 조약을 도대체 왜 체결하겠는가? 국제 관계에서 조선의 무지는 심각하여 이 정도로 간단하고 상식적인 이치도 몰랐다.[7] 물론 고종의 힘으로 둘 다 배제하는 것이 가능할 지 그리고 을미사변까지 일으킨 일본을 러시아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지를 따져놓고 보면 고종의 사정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특히나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문제를 일으켰다면 많은 개화인사들은 일본과 너무 친밀했다. 을미사변까지 겪고도 상당수 개화인사들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지나치게 낮았다.[8] 현대의 국제사회에서도 이런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힘 약하면 먹히는게 당연한 시대라서 힘도 없는 나라는 내다버리는게 당연한 풍토였다.[9] 동서양 막론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벼운 제노포비아 수준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자. 서양에서 인종 청소하고 우월론 펼치고 사회진화론으로 나아간 침소봉대하는 식견은 옳지 않다.[10] 허나 앞서 말했듯 비교우위론에도 문제점이 있으며 산업이 뒤떨어진 조선 상황상 내놓을 것이 식량인 쌀 등 얼마 안 되었고 실제로 개항 후에 쌀이 대량으로 유출되었으며 그랬기에 조선에서는 쌀이 부족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이들의 말을 단순히 비교우위론에도 무지한 채 경제적 침탈론이라는 억지만 썼다고 보기에는 현실이 꼭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11] 조선의 양반 지배세력은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을때도 '명나라'로 대표되는 중화로부터의 이탈을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도 정계를 지배한 논리는 존명의리였다. 대한제국이 내세운 구본신참도 결국은 존명의리, 즉 사대주의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겠다는 것이었고 고종이 칭제한 것도 '''중화의 황통이 한나라,당나라,송나라,명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고종은 마땅히 칭제할 자격이 있었다는 논리였다.''' 정작 위정척사파 유생이었던 유인석은 "이미 대명제국의 황제가 있으니 천하의 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고종의 칭제에 반대했지만. [12] 물론 조선이 기자조선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기자 숭배는 이미 7세기 고구려부터 시작되고 쭉 이어진 일이라 조선만 탓할 순 없으며 심지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단군과 기자의 숭배 중 기자 숭배가 우위였다. 오히려 조선에 들어서야 단군이 부각되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도 기자가 더 우선이었으나 국가에서는 둘 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고려시대 전까지만 해도 없던 단군 사당을 건립했다. 심지어 유학자들도 개인 성향에 따라 단군과 기자 중 누가 우위인지 달리하기도 했다.[13] 헌데 이 말이 맞는지 의문, 정작 정도전은 홍무제와 끝장나게 대립했고 또 삼봉집도 이런 이유만이 아니라 산문, 철학, 제도 개혁 등 여러 목적으로 냈기 때문[14] 또한 조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삼국의 시조 세명 모두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마저도 애초에 신하들이 "신라가 고려로 고려가 조선으로 이어졌으니 신라의 조상에게만 제사지내죠." 라고 한걸 세종이 "셋 다 조상인데 셋 다 지내자" 라고 한거다. 신하들조차 조선은 신라에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기자조선 빼고는 다 유사국가라고 여겼을지 의문 무엇보다 책봉만 안 받고 건국했을 뿐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모두 시기는 달라도 중국 역대 왕조들의 책봉을 받았다. 하다못해 조선마저 기자조선마냥 중국 황제가 "너 한반도에 가서 왕 해라" 라고 건국한 나라는 아니지 않은가?[15] 더럽게 웃긴 것은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짓밟으라고 청나라군을 불렀는데 호남 쪽에서 동학농민군을 모집하던 서상철은 " '''천하의 대세를 논해보더라도 위대한 청나라는 100년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묘사직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청나라를 배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니 의리에 이어 어찌 밝다고 하겠습니까?'''(중략) '''그리고 청나라 병사 10만명이 지금 인천항에 와 있고 또 싸우고 있으니 이것은 일대 쾌거입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돌렸으며 '''"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으니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자."''' 라는 글까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후대에 지어낸 얘기에 가깝다. 또한 쇄국정책 이미지가 너무 커서 흥선대원군도 위정척사파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실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정척사파는 대외 정책을 제외하고는 원납전() 강제 징수•당백전 주조•묘지림 벌채•호포제 실시•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오죽하면 최익현을 위시한 유림 세력이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