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당
金甫當
? ~ 1173년(명종 3)
1. 개요
고려의 공부시랑, 간의대부 겸 동북면병마사 등을 역임한 문신. 김보당의 난의 주모자.
본관은 영광(靈光)#.
2. 상세
1170년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옹립한 무신정변이 일어났으나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의종의 실정에 대해 평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몇 안되는 문신이었다. 1171년 김신윤, 이소응, 이응초 등과 함께 최윤의, 이원응, 오중정, 이준의,[1] 문극겸 등의 비행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준의, 문극겸을 제외한 나머지는 처벌받았으나 김보당을 비롯해 상소를 올린 간관들은 이준의가 순검군을 사주해 모욕을 주었으며, 이에 명종이 이준의를 불러 위로하고 김보당을 비롯한 간관들은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공부시랑으로 옮겼다가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겸 간의대부가 되었고 동계에서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해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소위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는데, 김보당은 의종을 모셔다가 계림에 기거하도록 했으나 10월에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에 의해 의종이 시해당하고 만다.
한언국, 장순석 등이 김보당에게 호응했지만 모두 붙잡히고 결국 김보당도 안북 도호부에서 체포되고 개경으로 압송되어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김보당이 모든 문신들이 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불어버리면서 무신정변에 이어 또 한번 문신들은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3. 평가
비록 반란을 일으켜 실패하고 입을 잘못 놀려 또다시 문신들을 몰살시켜 버렸다는 부정적인 기록도 있지만, 경대승을 제외한 무신정권 권력자들이 반역 열전에 기재된 반면 김보당은 제신 열전에 기록되었다. 다른 무신정권 권력자들과 달리 반무신 정권을 표방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근왕 반란인 점을 고려하여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애초에 왕에게 불만을 가진 것도 평소 백성의 삶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향락과 사치를 즐겼던 것 때문이었기에 더 그런 평가가 내려진 듯하다.
4. 관련 문서
[1] 이의방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