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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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무신. 100년 동안 이어질 무신 정권의 첫 번째 집권자이다.
본관과 출신지 모두 전주다. 전주 이씨로 그의 동생인 이린은 이성계의 6대조다.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걸렸는지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의방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한편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2] 이다. 그의 15대 후손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대장군 직위를 가졌던 이용부(李勇夫)이고 어머니는 정승 이형(李珩)의 딸 이씨로 부계는 무신 집안이고 모계는 문신 집안이다. 숙부 이단신(李端信)은 문하시중, 사촌 이작산(李作山)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형으로는 이준의, 동생으로는 이린과 이거, 여동생이 있었다.
벽상공신(璧上功臣)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니 이들 세 명이 무신정변의 주동자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정권의 첫 번째 집권자로 본다. 이고가 잡은 권력이 이의방보다 강했던 때가 잠시 있었으나 이고가 권력을 잡았던 기간이 너무 짧았고 이고가 권력을 잡았던 때는 사실상 이고, 이의방, 정중부 세 명이 서로 눈치보며 견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무신정변 당시부터 집권 이후에도 정중부가 더 높은 자리에 있었고 대외적으로 무신들을 대표하는 위치였다. 이의방, 이고는 처음에 무신정변의 대표로 우학유를 내정하였으나 우학유가 "죽어도 따를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자 정중부에게 제의하고 정중부는 이를 받아들인다.[3] 둘은 성향 차이도 확연한데 정중부가 온건파[4] 이었던 데 반해 이의방은 문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강경파의 인물.
2. 생애
2.1. 무신정변을 주도하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당시 이의방은 근위대의 대장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 직에 머물고 있었다. 견룡군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위하는 친위 부대로서 로마 제국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의 예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근위 부대는 왕실에서 정변을 일으키기 가장 적합한 위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는 그런 견룡군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직접 동원할 수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한이 매우 컸다. 특히 견룡행수는 이군(二軍) 즉 응양군, 용호군의 상장군, 대장군이 아닌 왕에게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유사시에는 왕의 허락 하에 다른 부대들에 대한 지휘권도 행사할 수 있을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의방은 이고, 채원 등과 함께 하급 장교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정중부 등 고위 장군들이 온건론을 주장할 때 '''"문신의 관을 쓴 놈들은 한낱 서리(胥吏)일지라도 죽여서 씨를 남겨 두지 마라"'''면서 문신들을 철저히 색출한 뒤 싸그리 쓸어버렸다.[5]
의종은 곧 이의방에게 응양군과 용호군의 직위를 동시에 주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의 형 이준의는 승선(承宣)[7] 직위에 봉해져 형제가 무관과 문관의 요직을 차지했으나 결국 의종을 폐위하고 거제도에 유폐시켰다. 의종의 태자 홍도 폐한 후 유배보내고 태손을 죽였다.
9월에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옹립한 후 대장군 겸 전중감에 올라 정권을 장악해 최초의 무신 집권자 자리에 올랐다.
10월에는 외가 쪽 고향인 금구를 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정중부, 이고와 함께 벽상공신(璧上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171년 1월에는 자신을 살해하려고 대장군 한순과 장군이었던 한공, 신대예, 사직재, 차중규 등이 모의하자 차중규를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죽였다.
의종의 사저 3채를 이의방, 정중부, 이고가 나누어 가졌다. 이의방은 천동댁(泉洞宅), 정중부는 관북댁(館北宅), 이고는 곽정동댁(藿井洞宅)을 각각 나누어 가졌다.[8]
이의방이 중방에 기녀들을 데려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렸으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2.2. 정권 장악
1171년 1월에 모반을 도모하던 이고를 암살하고[9] 직후인 4월에 다시 모반을 도모한 채원마저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고와 채원의 반역이 연달아 일어났던 것을 본다면 둘 다 이의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천하 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의방은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급 무신들을 끌어들이는 유화책을 펼쳤다. 애시당초 하급 무관 출신이던 이의방이 자신의 상관들이었던 중방의 대장군들과 상장군들을 끌어들이기 애매했기 때문에 중방에 유화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이때 중방의 수장이며 원로 무신들의 리더인 정중부와 연합해 중방의 지지를 얻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에는 이고, 채원이 연이어 제거되자 이의방 형제를 의심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던 정중부를 이의방이 술을 들고 찾아가 대화를 나누니 부자 관계를 맺고 서로 연합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방의 수장이었기에 중방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하급 무관들의 지지가 필요한 정중부와는 반대로 하급 무관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본인도 하급 무관 출신이다보니 중방의 지지가 필요한 이의방은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2.3. 의종 시해와 계속되는 반란
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과 살아남은 문신들이 의종의 복위를 내세워 9월에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의방은 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10월에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시해하면서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 된다.[10] 이로 인해 조정 여론 등이 악화되었고 개경 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이 연달아 일어났다.
1174년 1월에 귀법사의 승려 100명이 성 북문을 침입하자 이에 반격을 가해 그들을 학살하여 격퇴했으며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등 여러 절의 승려들 2천명이 모여서 성문을 공격하자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승려들을 죽이면서 절까지 모두 전소시켜 버리고 절의 재산을 빼앗았다. 귀법사는 광종, 홍호사는 선종이 창건한 절이다. 이 절들은 개성 부근에 위치한 근왕 사찰로서 근왕의 의도로 이의방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11]
이를 말리는 형인 이준의와 말다툼하다가 이준의가 이의방이 저지른 악행을 말하며 질책하자[12] 격분하여 이준의를 죽이려고 했지만 문극겸과 정중부의 만류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이때 이준의를 죽이려다가 이준의가 달아나서 실패하자 화를 참지 못했는지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졌다고 한다. 사실 정중부 역시 이준의를 체포해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의 부인이 굳이 다른 집의 형제 싸움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고 만류했고 정중부가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서 이준의는 무사히 넘어갔다.[13] 이 살벌한 형제 싸움은 나중에 둘이 조용히 화해해서 해결했다고 한다.
2.4. 처참한 말로
이렇게 정적들을 없애는 한편 정중부의 연합으로 중방에게까지 지지를 받아내면서 정치적으로 세가 커진 이의방은 아예 좌승선에 오른 후 딸[14] 을 왕태자비로 왕태자[15] 와 정략 결혼까지 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은 이의방의 계속된 전횡으로 말미암아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1174년 북계 40여 성이 가담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으로 향하던 도원수 윤인첨[16] 이 대패하고, 동북면으로 향하던 도지휘사 최균[17][18][19] 이 죽자, 다시 동북면으로는 두경승을 보내어 진압하였으나,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턱밑까지 도착한다. 대노한 이의방은 내통을 의심하여 서경 사람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덕재 등 1백여명을 북문 앞으로 불러 모은 후 이들을 모두 참살하고, 이들의 수급을 저자에 효수하였다. 이후 이의방 자신이 직접 출정하니 예성강을 넘어 최숙을 선발대로 보내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이르렀으나 조위총의 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공성전을 펼치며 추위로 인해 전황이 어려워지자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삼아 귀환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재출정을 준비하던[20] 1174년 12월에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과 그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 등(僧宗旵等)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21] 결국 조위총의 난이 한창인 어수선한 정국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때 이의방은 정중부 세력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아무런 호위도 거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갑오정변(甲午政變)이라 부른다.
결국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고 딸 또한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 태자비에서 폐출당했다.[22] 무신들은 문신들이 승군을 사주하여 일어난 일로 여기고, 문신으로서 원정군 지휘관인 윤인첨을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가 설득하여 겨우 막았다. 이후에도 직속 부하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도 이의방의 복수를 하려다 발각되어 모두 붙잡혀 귀양가게 된다. 반면에 정중부는 문하시중에 임명되며 동시에 무신 집정에 오른다. 이의방의 죽음을 계기로 그 동안 이의방의 무력에 눌려있던 중방의 원로 무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하며, 정중부는 그들을 기용하면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문신들을 우대하여 문신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진다.
일설에는 십팔자위왕[23] 의 도참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고자 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동생인 이린이 이의방이 척살당한 후 전주로 도망가 전주 이씨 집안을 존속시켰고, 결국 '''이린의 집안에서 태조 이성계가 탄생'''해 고려를 무너뜨리면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친형인 이준의와 함께 무신정권으로 고려사 반역 열전에 올랐기 때문에 훗날 국성이 된 전주 이씨는 족보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 관계를 단절하고자 했다.
3. 집권기에 일어난 반란의 영향
무신정변의 주동자이자 무신정권의 첫 번째 집권자이기도 해서 그런지 무신 정권 후대의 집권자들과 비교해봐도 유난히 비정상적으로 이의방의 집권 기간 동안 반란이 꽤 많이 일어났다.
서경(평양)이 1174년 9월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으로 완전히 초토화되는 바람에 묘청의 난 이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오던 서경 세력이 완벽히 몰락해버린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진압은 정중부 집권기에 되었으나 이 때의 서경은 개경에 이은 고려의 제2 도읍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종교가 국가 정책에 정면으로 클레임을 걸어 집권자를 살해하려 하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의방 집권기 때부터이다.
이의방의 집권기에 각지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당해 무신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이에 동조하는 기존의 구세력들이 세트로 사라지면서 후대의 집권자들은 '민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반란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기존의 반란이 중앙 정부에 반감을 가진 지방 핵심 세력에 동조한 지방군대의 군사행동이었다고 정의한다면, 민란의 성격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주동자부터 군대를 형성하고 있는 병사들까지 전부 백성들인 형태였다.
진압 과정 또한 달랐는데, 기존의 반란이 주동자를 포함한 핵심 세력만 제거하면 의외로 쉽게 진압되는 형태를 지니는 반면, 민란의 경우에는 핵심 세력을 제거한다고 해서 진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란군의 세력이 늘어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4. 창작물
5. 같이보기
[1] 현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2] 참고로 고려 시기 다른 반역자 중 하나였던 이자겸의 증조부 역시 이한(李翰)이라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항목 참조.[3] 김부식 휘하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한 우방재의 아들이다. 우방재는 무신이지만 공로가 많아 형부상서와 우복야를 역임했고 생전 아들에게도 문신들과 다투지 말라고 타일렀다. 우학유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어 정변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는데 마침 아내가 이의방의 누이이기도 해서 큰 화를 입지는 않았다. 혼인한 시기가 흥미로운데 무신정변이 성공한 직후이다. 우학유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걸로 추측된다.[4]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은 이복기, 한뢰 등 4~5인이다"며 대대적인 문신 숙청을 만류한 대장군 진준의 입장이 당시 고위 장군들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진준은 이의방이 죽고, 정중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참지정사로 중용되었다.[5] 그런데 이 말은 굉장히 모순적인 것이 당장 이의방 본인의 외할아버지 이형은 정승이었다. 즉 이의방의 어머니는 문신 집안이며 이의방의 남동생들 이린, 이거 또한 문신이었다. 당연히 이의방의 동생들은 이러한 숙청에서 제외되었는데 이의방이 문신들에게 분노해서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말을 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문신 집안이라 다른 무신들에게 의심받을지도 모르니 문신들에 대해 더욱 강경하고 잔혹한 태도를 보여 다른 무신들에게 "저놈의 어미가 문신 집안 여식이라 문신들을 싸고 돈다."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된다.[6] 고려의 무관직은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등등 순이다.[7] 지주사와 함께 임금의 선지(宣旨)를 선포하고 임금에게 올라오는 문서를 관리 및 감독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8] 원래 궁(宮), 별궁(別宮)으로 불렸는데 의종이 소유한 별궁이 너무 많아서 댁(宅)으로도 불렸다. 의종이 별궁을 소유하고 짓는데 그 수도 많지만 이를 환관이 주관하면서 사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9] 이 때 직접 궁문 밖에서 대기타다가 철퇴를 사용해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10] 이의민 역시 평생 동안 왕을 시해한 대역죄인이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경대승이 편전에서 대놓고 "선왕을 시해한 역적이 있는데 이대로 있을 거냐"라며 일갈했을 정도. 결국 경대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향인 경주로 낙향하게 된다.[11] 고려 시대의 절은 승려들이 참선하는 이미지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고려에서는 승군(僧軍)을 국가에서 관리할 정도로 승려 집단은 무력을 갖춘 집단이었다. 때문에 호족들이 후원하는 사찰의 승려들이 호족들 간의 권력 다툼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만불향도(萬佛香徒)' 같은 무리가 나타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12] 의종을 살해한 것, 의종의 저택을 빼앗고 의종의 후궁을 첩으로 삼은 것, 태후의 여동생을 겁탈한 것.[13] 하지만 나중에 이의방이 살해될 때 이준의도 정중부한테 살해된다.[14] 시호는 사평왕후.[15] 훗날의 강종.[16] 윤관의 손자로 문신 출신이다. 윤관은 문신이지만 무신들에게도 존경받았기 때문에 윤인첨은 무신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17] 동북면 도지휘사이자 동북면 병마부사 최균(崔均)이 동북면 병마사 이의(李儀)를 만나기 위해 함경도 화주성에 머무는데, 한 낭장이 성문을 열어 서경 출신 장군 김박승, 조관이 이끄는 서경유수군(西京留守軍)이 들이닥친다. 조위총 측에 가담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를 꾸짖자 최균 이하 제장들까지 전원을 몰살한다. 다시 동북면으로 향한 두경승이 함경도 의주성을 함락하고 최균과 제장들을 죽인 김박승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18] 최균은 조위총의 난에 맞서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였다며 완주백(完州伯)에 봉해지고, 전주 최씨(全州 崔氏) 사도공파(司徒公派)의 시조가 된다. 그런데 훗날 1세기에 걸친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상황이 바뀌어 당시 성문을 열어준 낭장은 정변을 일으킨 반란군에 맞서 서경유수군을 도왔다며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지고, 하빈 이씨(河濱 李氏)의 시조이자 전주 이씨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당시 무신정변에 반대하며 성문을 열어준 이 낭장이 바로 이의방의 동생이자 문극겸의 사위인 이거(李琚)이다.[19] 문극겸의 두 딸이 이의방의 동생 이린, 이거와 혼인하였다. 즉 문신들의 대표격이던 문극겸과 무신정변 주동자 이의방은 겹사돈이다. 겹사돈을 맺을만큼, 서로에게 파국적인 상황을 막기 위한 어떤 정치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20] 1174년 11월 27일, 원수 윤인첨, 후군총관사 두경승을 지휘부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이 구성된다. 그런데 여기에 승려들로 구성된 승군(僧軍)도 참여하게 된다. 승군(僧軍)이 원정군을 구성하기 위해 개경으로 모였다. 이들은 이의방이 암살된 후에도 명종이 이의방 딸인 태자비 폐출을 주저하자 보제사(普濟寺)라는 절에 모여서 태자비 폐출 관련 상소를 올렸다.[21] 이의방을 암살한 승려 종참은 그 이후로도 정균에 빌붙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다가 1183년 경대승에 의해 정중부 일파가 모두 쓸려나간 후 승려의 신분으로 함부로 조정에 드나들고 권세를 취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22] 훗날 희종(熙宗)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자 즉위하는 이가 바로 이의방의 딸과 혼인한 강종이다. 강종(康宗)이 왕위에 오르자 폐위된 태자비는 복위되었고, 사후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된다. 둘 사이에 수령궁주(壽寧宮主)라는 딸이 하나 있다.[23] 李를 파자(破字)하면 十八子가 되니, 이씨(李氏)가 왕(王)이 된다는 도참이다. 고려 왕실에서도 이 도참이 꽤나 신경쓰였던지 '이왕도한양(李王都漢陽), 즉 이씨가 왕이 되어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 등을 믿어 한양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을 부윤(府尹)으로 삼아 운(運)을 지나가게 하고, 삼각산 아래에는 오얏나무(李)를 심어 번성하면 벌리사를 보내어 오얏나무(李)를 베고, 이 일대의 지명은 벌리(伐李)로 하여 이씨의 기를 누르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서울 강북구 번동의 지명이 이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도참은 현실이 되어 조선 왕실의 문양은 오얏나무 이화(李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