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응(고려)

 

李紹膺
1109년 ~ 1180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


1. 개요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인물.

2. 생애


초반의 삶에 대해서는 서술된 기록이 없다. 『고려사』 「열전」에도 그와 같이 정변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상당수가 반역이든 아니든 간에 기록된 반면, 그 자체가 기록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자면 말이다. 1170년(의종 24년) 대장군으로 보현원에 행차하는 왕을 호송하였는데, 도중에 수박(무술) 대회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젊은 문신 한뢰가 이를 보고는 이소응의 을 때려서 거기에 맞고 나가떨어지는 큰 모욕을 당하였다.
당시 이소응은 대장군, 즉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지위[1]에 있었고 환갑을 넘은 노인이었다. 시대상을 생각하면 거의 최고참 원로 수준의 인물이었고, 그런 사람이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대등하게 겨루기 힘든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거의 갓 들어온 새내기나 다름없는 젊은 문신 한뢰가 때리고[2] 왕이랑 문신들은 그걸 보고 낄낄대기나 하니''' 결국 무신들이 폭발한 것이다.[3]
평소부터 무신들은 천대와 푸대접 때문에 불만이 쌓여있던 차에, 이소응 사건이 불씨를 지핀 셈이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무신정변 문서 참고. 결국 그는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마구 참살하고 마침내 의종을 폐위시켜 무신정권을 세웠다.
무신정권이 성립한 후 그는 참지정사에까지 올랐다. 정중부 파에 가까웠기에 정중부의 집권 시에 승승장구했으며, 이후 경대승 정권[4] 때도 경대승과 사돈 관계[5]였기에 경대승이 집권한 지 1년 후에 사망했어도 그의 가문은 이후에도 승승장구 했다고 한다. 딱히 실질 집권 세력가에게 도전하지 않은 데다, 무신들 중 손꼽히는 원로였기에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탓도 있다. 어쨌든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주요 인물들의 상당수가 영 좋지 않은 결말을 얻은 것을 고려해보면, 꽤 드물게도 거의 완벽한 수혜자로써 살다 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봉록(俸祿)과 지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나이 70이 넘어서까지 벼슬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들었다고 한다.

3. 대중 매체


2003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송용태[6]가 배역을 맡았다. 극에서는 정중부 세력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군 원로들 중 한 명으로 작중에선 이미 수박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7] 한뢰와 말다툼을 하여 그와 앙금이 있었고, 이후 수박 대련에서 석린이 상대 병사들을 줄줄이 쳐부수며 뛰어난 실력을 보이자 한뢰가 일부러 이소응을 대련에 내보낼 것을 의종에게 권한다. 이에 이소응은 놀라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련을 준비했으며, 석린은 연장자인 데다가 상관인 이소응을 봐주려 했으나, 이미 거사를 계획했던 이의방이 일을 크게 만들고자 석린에게 인정사정 봐주지 말라는 언질까지 내려 이소응은 간단히 패배했고, 그 후에 벌어진 일은 실제 역사와 같다. 정변 이후에는 별 비중은 없지만, 정중부 세력의 한 사람이자 중방의 원로 중 하나로서 자주 얼굴을 보였다가 정중부 사후 나레이션에서 1년 후에 숨을 거뒀다는 말로 하차.


[1] 가장 높은 건 상장군으로, 당시 정중부가 상장군이었다.[2] 때린 것마저도 뭔가 큰 원한 같은게 있어서도 아니라 그냥 모욕의 의미로 때린 것이다.[3]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국방부 원로의 뺨을 순전히 모욕주려는 의미로 새내기 서기관이 때린 셈이다. 이랬다간 지금 시대에는 큰일나겠지만 당시 고려는 대놓고 무신을 하대하고 무신의 이권을 계속 줄여나가던 상황이어서 이런 행각을 벌인 한뢰가 별 징계나 처벌을 안 받을 수 있었다.[4]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였지만,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은 오랜 세월간 친 정중부 세력이었다.[5] 이소응의 중 하나가 경대승의 동생과 결혼했다.[6] 이전인 태조 왕건에는 홍유를, 후속인 정도전에는 배극렴을 맡았다. 서인석, 이덕화 못지 않은 쿠데타 전문 배우.[7] 드라마 1화 초반 한겨울 속 행렬에서 임금과 김돈중, 왕광취, 한뢰가 탄 마차가 수렁에 빠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