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무신정변 주도자 / 제2대 무신 집권자'''
'''관향'''
해주 정씨(海州 鄭氏)
'''이름'''
정중부(鄭仲夫)
'''아들'''
정균(鄭筠)
'''출신지'''
고려 해주
'''사망지'''
고려 개경 민가
'''신장'''
166cm
'''생몰연도'''
1106 ~ 1179
1. 개요
2. 생애
2.1. 무관이 되기 이전
2.2. 무신들에 대한 차별
2.2.1. 초급 장교 시절
2.3. 무신들의 쌓이는 불만
2.5. 이의방의 몰락과 집권
2.6. 권력 다툼과 처참한 말로
3. 이모저모
3.1. 두터운 인망
3.2. 평민 출신의 문하시중
3.3. 정여립과의 관계?
3.4. 후손에 관한 사항
4. 창작물
5. 관련인물
6. 같이보기


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무신정권 시대를 연 인물로 무신정권의 2번째 집권자.[1]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며 그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무관이 되기 이전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
공학금군(控鶴禁軍) 소속 장병
공학군은 국왕의 친위대로 이름은 당 천자의 친위대 이름을 가져 온 것이다.
정중부는 해주 출신의 사람이었다. 비범한 외모를 지닌 거구미남이었다고 하는데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중부는 용모가 우람했으며 눈동자는 네모졌고 이마가 넓었다. 또한 얼굴 빛은 백옥 같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키가 7척(약 166cm)[2]이고 거구였던지라 위풍이 늠름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도 그의 외모를 기록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중부가 군문에 몸을 담그면서 출세하게 된 계기도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의 덕이 컸다. 처음에 정중부가 살던 고을에서 정중부를 군적에 올려놓고는 그의 팔을 매어 수도인 개성으로 보냈는데,[3] 재상인 최홍재가 군사들을 가리다가 그의 풍채를 보고 비범하여 여겨 팔을 맨 것을 풀어주고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시켰다고 전한다.
이 공학금군이란 공학군(控鶴軍)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 임금이 조회나 연회 등을 위해 행차할 때마다 동원되었던 국왕 호위 부대였다. 아무래도 정중부가 키도 크고 용모도 잘생긴 편이라 왕의 위엄을 발하는 자리에 세우기는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정중부는 이처럼 멋있는 용모 덕분에 공학군에 편입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2.2. 무신들에 대한 차별



2.2.1. 초급 장교 시절


'''정중부의 초기 관직'''
'''직위'''
견룡대정(牽龍隊正)
견룡군 소속 대정이며 대정은 부사관급 직위다. 견룡군은 공학군과 함께 국왕의 친위대 중 하나다.
교위(校尉)
교위 역시 낮은 직위로 아마 견룡군 소속이었을 것이다.
정중부는 이후 인종(재위 1122년~1146년) 때 초급 장교 정도의 직책인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때에 정중부에게 있어서는 평생토록 가슴 속에 원한을 심어준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제석: 除夕)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을 때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 자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장기 자랑은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귀신 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에 따라 왕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던 내시, 다방, 견룡[4] 등이 함께 춤을 추며 놀았었는데 그 와중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를 만만히 보고는 '''그 수염촛불로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다룬 여러 창작물에서는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이 길고 멋지게 생긴 것을 보고 "무신 따위에게 저렇게 멋진 수염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질투하여 태웠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곤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김돈중이 과거에 1144년에 급제했고 국왕 인종이 1146년 승하했으니 대략 이 시기 사이의 일로 추측된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쥐어박아서 욕을 보였다. 여기까지는 젊은 관료들이 만취하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더 커졌다. 김돈중의 아버지였던 김부식이 아들이 정중부에게 두들겨맞은 것을 알고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꾸짖기는 커녕 오히려 노발대발하며 자기 가문의 대한 도전으로 여겨 왕에게 정중부를 똑같이 고문해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5]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인종은 대학자이자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를 허락하기는 했으나, 정중부를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그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비록 정중부는 임금의 총애 덕분에 매를 맞지는 않았으나 이 일을 계기로 김부식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6][7][8]
그 후 정중부는 다시 승진을 거듭하여, 인종의 아들인 의종 즉위 초(1146년 즈음)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어사대에서 왕의 명령으로 수창궁 북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정중부와 산원인 사직재가 이를 마음대로 열고 드나들자 1147년 12월에는 어사대에서 정중부를 탄핵하여 이를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의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1170년대 정중부의 관직'''
'''직위'''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
2군 6위 중 가장 높은 편제인 응양군 소속이며 최고위 무관직인 상장군을 직위로 받았다. 상장군은 정3품 직위이다.
이후로도 정중부는 승승장구하여 훗날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 즈음에는 그 지위가 무신 최고직으로 반주(班主)로도 별칭된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다혈질적인 성격에 막나가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의종 부자가 모두 정중부를 좋아하며 특별히 우대해준 것을 보면 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던 인물로 보인다. 사실 정중부는 젊은 시절부터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호위하는 직책을 지냈기 때문에 포지션으로 치자면 내시들과 더불어 국왕의 최측근 포지션에 가까웠다. 여기에 그의 위풍당당한 외모가 플러스 요인이 되어 유독 왕들이 정중부에게 큰 호감을 보였던 듯 싶다.

2.3. 무신들의 쌓이는 불만


이후로도 문신들은 계속 무신들을 얕봤고 멸시하였는데 특히 좌부승선인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가 왕의 총애만 믿고 무관들을 업신여기자 더욱더 분노하였다.
한편 임금인 의종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점점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러만 다니게 되었고, 주로 불교‧음양설‧선풍(仙風)등 실제 통치하는 것과는 연관이 먼 것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의종이 강대한 개경 문신들의 힘에 짓눌려서 현실도피적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그전부터 의종은 왕으로써의 모습보다는 예술가 기질을 자주 선보였다.
하여튼 의종은 놀러다니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 탓에 1164년에 인지제(仁智齊)라는 곳에 간다. 그런데 법천사의 승려인 각예가 대접하겠다고 해서 의종은 달령원(獺嶺院)까지 또 다시 가서 술 대접을 받았으며, 1166년에는 왕이 성수원(聖壽院)에서 각예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성수원은 각예가 창건한 절이다.). 의종은 각예와 죽이 잘 맞았던 모양으로 이 때 의종은 여러 학사들과 놀러다니며 끝없이 시를 짓고 화창하였는데, 정중부를 포함한 호위 부대 소속이었던 여러 무신들은 먼 길을 질질질 끌려다니며 피곤하게 호위나 서게 되었다. 이에 들러리가 된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서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왕이랑 문신은 시나 지으면서 노는데 무신들은 거기에 끼지도, 먹지도 못하니 무신들의 불만이 저절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1170년 8월에는 왕이 연복정에서 출발에 흥왕사에 놀러갔고, 이 때 결국 무신들이 폭발했다.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의종도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모양인지 보현원으로 출발하려던 오문(五門)에서 갑자기 멈추고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수박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줄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이 때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난다. 이때에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빠져나왔는데,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을 조롱하며 그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난다.[9] 이때에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정중부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나고는 하나, 이소응은 3품 벼슬을 지내고 있는데 너 따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외쳤다. 이런 정중부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대장군은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종3품 품계며 한뢰의 직책 기거주는 종5품으로 이후의 사관에 가까운 직책이므로 대장군인 이소응보다 당연히 품계가 낮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든 무신이 백주 대낮에 젊은 문신에게 맞는다는 것은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문신들이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은 무신들의 권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밑에 계산을 깔고 하는 행위였다고 볼 여지도 꽤 많다. 왕의 입장에서는 무신을 키우고 무신의 불만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의종이 수박 대회를 연 것인데, 갑자기 문신이 끼어들어 판을 파토낸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와 그 과정에서 생긴 차별 의식 및 문신들의 오만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애초에 놀러다니면서 문신들만 감싸고 돌았던 의종의 행동 자체가 무신들의 불만을 부채질한 것 역시 사실이다. 수박 한 번 재밌게 한다고 풀릴 수준의 불만도 아니었고, 이소응이 뺨을 맞았을 때 제재하기는 커녕 자기도 한바탕 크게 웃음으로서 결과적으로 수박을 안하느니만 못한 꼴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의종 자신이었다.

2.4. 무신정변


'''무신난 시작 후 정중부의 관직'''
'''수직'''
수사공(守司空)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직위'''
복야(僕射)
정2품 직위. 복야는 좌복야와 우복야가 있으며 상서성의 장관이다.
이소응이 뺨을 맞은 자리에서 이고는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잠자코 기다리라고 했으며 날이 저물 때쯤 왕의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하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소집시켰다. 그리고는 왕이 문으로 들어가고 문신들만 나오자 무신들은 그자리에서 문신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하고 들어갔다. 한뢰는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기도 하고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처음에는 왕 앞에서 자제하던 이고가 칼을 빼들자 나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개성에 들어가서 사졸들을 풀어 문신 수십여 명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일파는 원래 자신들의 원수는 문신 몇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문신과 찬동하지 않는 무신들까지도 죄다 죽였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집까지도 허물 정도였으니 얼마나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성에 있던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은 도주했지만 이후 시종의 밀고로 인해 자신의 동생과 함께 같이 잡혀 죽은 것으로 볼 때 인망이 없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의종은 정중부에게 그만하라고 만류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 일을 계속 진행했다. 이후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이 사건이 '보현원의 난', '무신의 난', '정중부의 난' 등으로 칭하기도 하는 무신정변이며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전후기로 크게 가르는 무신정권의 시작이 바로 이 사건이다.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수십년 묵은 원한을 이때 풀게된 것으로 이 때 정중부의 나이는 60대 중반이었다.
'''명종 옹립 후 받은 관직'''
'''직위'''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평장사 계열 직위 중 네번째 직위.
중서시랑문하평장사(中書侍郞門下平章事)
평장사 계열 직위 중 두번째 직위.
9월에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쫓아 유폐하고 태자를 진도현에 유배보내며 태손을 살해한 뒤 의종의 동생이었던 익양공 왕호를 왕으로 옹립했다. 서해도 군현을 자신의 고향인 해주에 편입시켰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평장(門下平章)을 추가해 승진하였다가 10월에 이고, 이의방과 함께 벽상공신으로서 공신각 위에 초상이 그려졌다.
'''김보당의 난 제압을 위한 행영 군단'''
'''정중부의 직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
고려 서북면의 군단장. 서북면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받음.
행영은 임시 군단을 의미한다. 즉 임시로 편성된 군단의 병마사란 뜻.
행영의 편제 중 중군을 지휘하는 병마판사.
1172년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事),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겸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에 임명되었으며, 김보당의 난이 발생함과 동시에 장순석, 유인준 등이 거제도의 의종을 데려와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군 이의민, 산원 박존위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게 하면서 또다른 군사를 서해도로 보내어 김보당의 난을 진압했다.
'''정중부의 마지막 관직'''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의 최고위 관직. 실권을 가진 직위 중 제일 높다.
1174년에는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2.5. 이의방의 몰락과 집권



이의방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연신 패퇴하며 고전하자 이를 역이용하여 1174년 12월에 아들인 정균이 부하를 시켜 이의방을 암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정균이 조위총의 난에 대한 처리를 할 때쯤인 11월 임자일에 어떤 이가 중방에 문관들이 남적들과 변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는 허위보고를 하여 도교승 김윤승 등 7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병부상서인 이윤수를 거제현령으로 강직시켰다.
또한 이 때, 보제사(普濟寺)를 중수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여 낙성식에 왕이 참여하기를 청원했지만 해당 관원들의 간언에 따라 가지 않았다. 비밀히 승록사(僧錄司)를 시켜서 임금의 거동을 청하고 갖은 성찬을 차렸으나 왕은 이에 응하지 않고 관원들이 대신하여 갔다고 한다.
그는 권세있는 직위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는데 12월에 낭중인 장충의가 그의 뜻을 맞추어 왕이 재상에게 궤장을 주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라고 하여 왕이 궤장을 하사하도록 만들어 국사를 일체 자신에게 고하여 결재를 받았다. 때로는 중방(重房)에 앉아서 남의 죄에 대하여 발언하였으며 백관은 그 집에 가서 축하를 드렸다 할 정도로 권세가 높았다.

2.6. 권력 다툼과 처참한 말로


1176년 8월에 그는 당시 직책이 시중으로 그때 각 영의 군사가 익명으로 붙여진 방을 불러 이르기를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희롱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한다고 상소한다. 또한 남적들을 치려면 그들을 제거해야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그의 아들인 정균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해직을 청하면서 여러 날 동안 출사하지 않았다.
9월에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 등이 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시도하고 이를 알아채자 그들을 체포하고 먼 섬으로 추방하였다. 1178년 7월에 기두 녹상이 대장군 장박인, 전 장군 조존부 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고하자 이들을 조사했지만 죄상이 없었으며, 또한 기두 80인이 장박인을 옥에 내보내는 것을 꾀했다는 사실을 고하지만 이들도 죄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유배하였다.
이후 1178년 정중부는 사직을 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을 이어받은 정균과 송유인[10]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결국엔 무인 세력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그리고 정균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려 임금의 자제인 공주를 자신의 둘째 아내로 삼으려 했고,[11] 정중부가 문하시중으로서 관직에 있을 동안은 오랫동안 눌려있었지만 정중부가 물러나자 정2품의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게 된 송유인은 당시 조정의 영수였던 한문준과 문극겸을 탄핵하는 등의 행동으로 대신들의 큰 반감을 사게 된다. 무엇보다 정중부와 문신들과의 중계를 담당하던 송유인이 문신들의 대표격인 문극겸, 한문준과 틈이 벌어지면서 문신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 치명타였다.
이때 보면 장인인 정중부로부터 송유인이 정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권세를 물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정균이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것은 매부에게 밀리고 있기에 매부를 누를 수 있을 보다 확고한 권력을 취하려는 술수였던 듯하다. 혹은 이때 정균이 모든 권력을 송유인에게 밀려서 잃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궁녀들을 가지고 놀고, 공주까지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던 것을 보면 아닌 듯 싶다. 적어도 명종을 우습게 여기며 누를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12].
그로 인해 1179년 9월에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는 정균의 행태에 분노한 26살의 청년 장군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기습하였고, 아들과 사위와 함께 사이좋게 목숨을 잃으면서 정중부의 가문은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다.

3. 이모저모



3.1. 두터운 인망


고려사》에는 반역열전에 실려있고 오늘날에도 무신정변을 주도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초장부터 대놓고 반역자 취급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지만, 의외로 당시 무신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망 높던 인물이었던 듯 하다.
애당초 이의방이나 이고 등이 정중부를 끌어들였던 이유가 하급 장교인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곤란하다고 여기고 이른바 자신들을 대표해줄 '얼굴마담'을 원했기 때문이었다.[13] 그리고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무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무척 컸다는 말이 된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신 정권 극 초기 이의방이 권세하던 시절을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해서 설명하는 경우도 꽤 많은 편이다. 물론 정중부가 대외적으로 대표자라고는 하지만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이의방, 이고가 처음에 내정한 인물은 대장군 우학유이고, 우학유가 "죽어도 따를 수 없다."며 거절한 걸 보면 이의방, 이고가 이미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학유가 그렇게 강경하게 거절한 이유는 우학유의 부친 우방재가 "문관들이 화를 당하면 그 화가 우리(무관들)에게 미친다."며 평소 이를 경계했기 때문.
그리고《고려사》의 <경대승 열전>을 찾아 보면, 이의민과 같은 용장도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경주로 낙향해 있는 와중에도 일부 무신들은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켜 그간 문신들에게 억눌렸던 설움을 풀어 주었는데 경대승 같은 새파란 어린 놈이 그분을 해쳤으니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4]
또한 경대승이 도방을 만든 것도 이러한 일부 무신들의 자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 때문이었고, 역시 고려사에 보면 몰래 첩자들을 내보내어 항상 정황을 살폈따고 한다.[15] 그만큼 정중부라는 인물이 당시 무신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뜻이며, 경대승이 죽기 얼마 전에 꿈에서 정중부를 봤다는 것도, 이러한 긴장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3.2. 평민 출신의 문하시중


한편으로는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16] 애초에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 아니라[17]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눈에 띄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민김준 때문에 묻히는 감이 큰 편.
난을 일으킨 덕에 고려의 무관 중 최초로 삼공[18] 직, 재상 직[19],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 직까지 해본 인물이다.
정중부는 난을 일으키기 전 무관의 최고위 직위인 '상장군(上將軍)'[20]이었고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엔 문관의 최고위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21]까지 해봄으로서 문무관 최고위직을 모두 해본 인물이다.[22] 그것도 문벌귀족이 아닌 쌩 평민이.
또한 처음으로 무관 출신 중 문하시중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정중부 이전엔 지채문상서복야, 강민첨이 지중추원사 - 판병부사, 왕국모[23]가 참지정사, 척준경이 평장사까지 올라갔으나 아무도 문관직 정점을 찍지 못했는데 정중부가 최초로 도달한 것.

3.3. 정여립과의 관계?


조선 중기 정치, 사회 전반을 뒤흔든 사건인 정여립의 난의 주도자로 알려진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태몽에서 정중부가 여러번 나왔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존재하나 이는 정여립을 폄하하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3.4. 후손에 관한 사항


관련문서 참조

4. 창작물



5. 관련인물




6. 같이보기


[1] 하지만 사실상 무신정변 당시 무신들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고 이의방 집권기에도 정중부가 더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 기간을 정중부의 집권 기간으로 포함시켜 정중부를 1번째 집권자로 말하기도 한다. 정확히는 이고를 제거한 후에는 이의방과 정중부가 서로 견제하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2] 척 단위는 23.7cm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금 기준으로는 작지만 그때 당시 고려시대 남성 평균키가 162.2cm 였다. 평균보다는 큰셈[3] 이 부분에서 '팔을 매어'라는 부분을 두고 팔을 묶었다. 즉, '''강제로 끌고 갔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걸 '말도 안 된다'라고 단정하기도 뭣한 것이, 애초에 '군적에 올려'. 즉 '군역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4] 고려 시대의 내시는 궁에서 지내며 왕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젊은 신료들로, 대체로 유력한 가문의 자제들이 거쳐가는 엘리트 코스였다. 다방은 조정의 다례를 관장하였고, 견룡은 국왕을 호위하는 무인들이었다.[5] 굳이 말하자면, 정중부가 김돈중을 두들겨 패면서 욕설을 날린 잘못은 있었다. 현실에서도 먼저 때린 게 더 크게 잘못이라는 불합리성도 있으니. 하지만 문제는 결국엔 피장파장에 불과했었는데, 김부식이 아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정중부가 아들놈 때린 것만을 나무란 것이다. 특히 인종이 김돈중의 잘못이 있기에 고문을 반대하는데도 해달라고 한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걸 지켜보던 무신들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기가 찼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때문에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게 된다.[6] 참고로 김부식은 1151년에 사망했으나 김돈중은 이후로도 관직을 지내다가 무신정변 당시에 살해되었다. 정중부는 김부식에게 얼마나 원한이 컸는지 무신정변 후 김부식은 시체가 토막나게 되며 직계 자손은 다 처형되었다. 수염 사건에서 무신정변까지의 기간이 대략 20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추측되므로 그 기간 동안 잊지 않고 복수한 것을 보면 원한이 어지간히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7] 이때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무렵, 호라즘 제국이 몽골 사신의 수염을 밀어버리는 모욕을 주어 칭기즈칸이 굉장히 강도높은 보복 공세를 퍼부어 멸망시킨 사례도 있다. 이렇듯 전근대에는 남성의 수염은 자존심과 상당히 연루된 문명권이 많았다.[8] 2018년 8월 한강 몸통 시신 사건의 피의자 장대호가 21일 호송차에서 내려 고양경찰서로 조사 받으러 들어갈때 이 일화를 언급하여 논란이 되었다. #[9]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새파랗게 젊은 것들도 감당하지 못하느냐?"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소응은 노쇠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체력적으로는 최고조인 젊은 무관들을 당해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새파랗게 어린 문관 앞에서 수박희로 재롱이나 떨어야 했다는 점을 보면 당시 무신들에 대한 처우를 알 수 있다. 고려의 장군직은 최고위에 상장군이 있고 그 아래 다수의 대장군이 있는 구조였으니 현재 군대로 따지면 대충 사단장급은 된다.[10] 송유인은 정중부가 문하시중의 자리에 있을 때는 재상이 되지 못해서 정중부의 딸인 자신의 처에게 의지하다가 정중부가 치사를 하여 문하시중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야 문하시랑 평장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도 아내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듯 보인다.[11]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만들려다가 죽은거 생각하면 정말 개념없는 행동이었다. 왕의 사위가 태자비보다 낮긴 했다만 그래도 개념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12] 아니면 조선 후기,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오늘날과는 다른 고려 시대의 외가 관련 인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려에서는 사위도 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고 딸도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또 족보에도 사위, 외손자 등이 기록되었고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고관인 경우에도 음서제가 적용되었는데, 이 말인즉 '''외가로도 혈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 즉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왕위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였는지 많은 고려의 공주들 가운데 왕씨 이외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은 예는 단 하나밖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13] 그렇지만 정중부는 문신들을 싸그리 족치자는 이의방, 이고 등과는 달리 문신들을 살려두고 훗날 정권을 잡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울분에 차 복수에 눈이 먼 이의방과 이고와는 달리 나름 훗날 일까지 미리 계산해놨던 셈.[14]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정 시중(鄭侍中, 정중부)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 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하다. 이제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네 분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이냐?(鄭侍中首唱大義 沮抑文士 雪吾曹累年之憤 以張武威 功莫大焉. 今大升一朝而尸四公 孰討之耶.)'[15]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경대승정중부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들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大升自去鄭 宋以來 心不自保 常令數人 潛伺里巷. 偶聞飛語 輒拘囚鞫問 累起大獄 用刑深峻.)'[16] 이의민과 김준이 천민 출신 최초 집권자였기 때문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애초에 이 시기 권력의 맛을 한 번씩 본 고급 무관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좋은 신분을 가진 인물들은 아니었다. 후에 이의민, 두경승과 연립 정권을 이루는 조원정 역시 옥공과 관기 사이의 아들이라는 천한 신분의 인물이었고 후대의 많은 무신 정권의 인물들도 천민 출신들이 은근 있었다.[17] 정사에서 그는 해주 출신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가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18] 사공(司空).[19] 평장사 계열 직위.[20] 응양군 소속으로 정3품 직위다.[21] 중서문하성 소속으로 종1품 직위.[22] 두경승, 최충헌도 상장군과 문하시중을 다 해보았다. 이의민은 상장군은 해봤지만 문하시중은 두경승 열전에만 해봤다고 나와서 조금 애매.[23] 숙종배향공신으로 최종 무관직은 상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