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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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경의 사진으로, 사진의 우측이 김영태이다.[1]
金永泰
1920년 ~ 2010년 11월 7일
1. 개요
김두한의 부하이자, 우미관패와 대한민청의 간부. 오늘날에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 유명하다.
참고로 드라마 상에서는 김영태가 김두한은 물론 그보다도 선배인 쌍칼에게조차 형님 소리를 듣지만,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2살이나 어렸다고 한다. 드라마 전개 상, 김두한이 주먹계에 입문할 때부터 정치 생활에 이르기까지 옆에서 조언해 주는 참모 역할로 낙점되어 연령대가 각색된 셈.
2. 생애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5년제 학교인 간타쿠 대성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본래 광복군 모집에 응하기 위해 만주로 가려 했으나 접선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걸러들어야 할 주장이다. 실제로 그랬을지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만, 실제로 구직이나, 독립운동, 창업 등을 이유로 만주 이주를 기획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범죄자로 전락한 경우가 왕왕 있었으므로, 김영태의 이런 주장은 완전히 허황된 얘기라고 보긴 어렵다. 김영태의 평생의 친우이자, 동지였던 김두한부터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었던 만큼, 젊은 시절에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영웅이 되고 싶다는 공명심에 불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전형적인 영웅이 되려다 타락한 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2살이 된 해(대략 1943~44년 경)에 김두한을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서로 뜻이 통해서[2] 동지 서약을 맺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부터 김두한의 휘하에서 활동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데로 광복군이 되지는 못했으나 김좌진의 아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경향신문의 1987년 4월 1일자에 나온 《청년운동반세기》라는 연재물에 따르면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 김두한이 감찰부장일 때에도 별동대의 일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1973년,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으며 이후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이름을 앞 뒤만 바꾼 김태영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1981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옮겨갔으며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장로를 지냈다.
야인시대 방영 당시인 2002년에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조선일보의 취재 하에 옛 동료 김두한의 딸 김을동과 30년만에 해후하고는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다.관련기사
당시의 인터뷰 등을 참고해 볼 때에, 김영태는 무식하고 배운 것 없었던 조직폭력배들 중에서는 그래도 교육을 받은 엘리트에 속했기에[3] 김두한으로부터 단순한 부하로 취급되기 보다는 책사 내지는 동료로 대우받는 등 우대를 받은 듯 하다. 다만 이건 좀 걸러들어야 한다. 김두한이나 이정재, 이화룡 등등의 누구라도 아는 조폭두목 휘하에 있었다던 오래 살아서 그당시 회고하는 조폭들 이야기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그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기는 했으나 대등하거나 독립적인 관계였거나 친구였다'[4] 고 운운하곤 하는데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아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대한민청 안에서는 꽤 급이 된 사람이었던 건 사실로, 보통 별동대를 이끌 때 대장 역할을 하던 사람이 신영균과 김영태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 예시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서술된 바에 따르면 시공관 사건[5] 에서 김두한과 가장 언급이 많이 되었고 실제로 그 사건에서 민청 부하들중 별동대를 이끌었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있었던 중앙극장 습격 사건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조직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이가 김영태라는 신영균의 증언이 있었다. 실제로 조직폭력배를 포함한 범죄자 집단들 중에 고학력자가 끼어있으면 조직의 브레인으로 대접받아서 말단 조직원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대한민청 활동 관련해서 신영균, 박용직, 조희창 등이 한 증언에 따르면 김두한 바로 밑이 신영균, 김영태였고 그 밑 간부로 김관철, 홍만길, 고경주, 조희창 등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분명 중요 간부가 맞기는 했다.
다만 당시 김두한 패거리들을 다룬 신문기사 등에서 김영태가 한 일들을 보면 브레인이 한 일이라기 보다는 뭔가 딱 '행동대장' 이 할만한 일로 보여질만한 일들을 맡고 있었던 정황은 있다. 수류탄 투척조 대장이랄지, 별동대 기습 습격 대장이랄지 등등.....
2010년 11월 7일에 90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1] 좌측은 김두한.[2] 김영태는 이에 대해서 "가슴속에 타오르는 반일의식"에서 동질감을 느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정말로 그랬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 것이다. 당시의 시기가 딱 김두한이 징용 빠지려고 청년단 하던 시기와 비슷한건 그냥 우연의 일치였을까? 물론 실제로 어땠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일이다.[3] 당시에는 기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인 사람도 수두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 유학생으로 중학 교육까지 마치고 온 김영태는 학력이 제법 좋은 편에 속한다.[4] 이상욱이나 김동회가 자신이 김두한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고 주장하지만 김두한은 생전 이 둘을 언급한 적이 없고 신영태와 조희창 등도 이 둘을 언급한 적이 없다. 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춘삼은 자기가 김두한의 보스였다고 말하지만 신뢰성은 영.[5] 정진룡(야인시대에서는 정진영)과 김천호가 이끄는 조선민주청년동맹 무리가 명동에 위치한 극장인 시공관 앞에서 좌익 선전 경호를 하고 있을때 김두한의 대한민청 무리가 그들을 기습해서 선전을 방해하고, 조선민청 무리를 현장에서 때려 죽이거나 정진룡과 김천호와 함께 납치하여 민청 지하실에서 김두한의 부하이자 대한민청의 간부인 신영균과 그 일당이 정진룡과 조선민청 대원들을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고, 김천호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흔히 정진룡 살해 사건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