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조직폭력배)

 



<color=#fff> '''이정재
李丁載 | Yi Jeong-Jae'''
'''출생'''
1917년 1월 6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1] #
(現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사망'''
1961년 10월 19일 (향년 4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형무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광주 이씨[2]
'''호'''
도운(都運), 합당(闔堂)
'''신체'''
180cm[3]
'''학력'''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4]
'''경력'''
前 화랑동지회 회장
자유당 도시행정특보위원
前 대한민국 씨름협회 회장
'''가족'''
배우자 김씨
아들 이정수[5]
딸 이미령
처남 김기홍
재종제(6촌 동생) 이석재
사돈 유지광
'''별명'''
말렌코프, 동 카포네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한국조직폭력배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렸다. 단성사 저격 사건 및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정치테러 등을 지시한 실질적인 배후이기도 하다.

2. 생애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힘이 굉장히 셌다고 한다. 마을에서 씨름대회를 개최하면 그날 상품으로 걸린 황소는 전부 다 이정재의 몫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고 전해질 만큼 당시의 교육수준으로 보면 나름 고학력자였던 듯하다.
이후 처가살이로 동대문에서 광목 장사를 했으나 얼마 후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 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에 보기 힘든 고등보통학교까지 간 엘리트로 김두한의 추천을 받아 경찰을 했다. 고향의 후배인 곽영주를 수도경찰학교에 입교시켜 경찰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이후 대한청년단 종로구 동부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김두한의 정계 진출로 말미암아 종로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된 이후, 시장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과 차석환을 포섭하여 '가족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6.25 전쟁 이후로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가족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및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면서 한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하여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요금을 2000에서 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잘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즉 학력이 전무한 일반 조직폭력배들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삥을 뜯었다면 이정재는 학식이 있는 인물답게 돌아서 삥을 뜯어온 것이다.
이러한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지면서 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 시장의 규모는 종로 4가에서 6가까지 이르는 7만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이정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인의 수는 무려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 뿐만 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 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체포되기 직전까지의 동대문 사단 세력도는 다음과 같다.
* 위원회(최고급 간부)
* 사단장: 이정재(두목)
* 3인위원회: 이정재(두목), 조열승(부두목), 임화수(부두목)[6]
* 7인위원회: 상기 3인 외 오영환, 고일심, 김양수, 차석환
* 참모부 - 감독반, 정치반, 사법반, 양성반, 사무반으로 구성
* 외곽부 - 임화수가 주도하는 반공예술단
* 행동부 - 서울시내 하부조직 10개 파로 구성
* 특수부대 - 이석재 외 7명
* 종로파 - 심종현 외 20명
* 소공동파 - 홍영철 외 20명
* 서대문파 - 최창수 외 30여명
* 광화문파 - 장영빈 외 50여명
* 종로4가파 - 유지광, 강승일 외 50여명
* 경마장파 - 이창수 외 50여명
* 동대문시장파 - 장세규 외 50여명
* 평화극장파 - 이천일 외 100여명
* 청년도장파 - 이창수 외 300여명
이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1억환(현 시가 50~100억원)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이 무렵 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차례 빌리고 살길이 막막한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50만환(현 시가 5천만원 전후)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도 점포를 배당해줄 것을 요구하자, 동대문파 간부들은 분노한다.[7] 특히 자존심이 상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화룡의 명동파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또한 고향 후배인 곽영주가 경찰이 되고 싶어하자 이정재는 경찰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네주고 곽영주를 경사로 임관시켰다. 이후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띄어서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고,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 이기붕의 위세와 권력을 업고 심지어 정계까지 월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야당 인사들에 대한 집회 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벌였다. 이 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곽영주의 별명이 '''부부통령.''' 이후 곽영주가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경무대경찰서장이 되자 바로 이정재를 이승만에게 알현시켰고 이정재를 이승만의 양아들로 만들어줬다.
이때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야당 인사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로 지목된 이른바 제3세력의 동시 다발적 암살 기도를 획책 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이순용,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김기홍, 조희창, 이화룡 등 40여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참모총장 격이었던 김동진이 경찰에게서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이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사에서 영화 '형제는 용감하였다'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야인시대 등 드라마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언급되는 '단성사 저격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검찰의 수사 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됐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계 진출까지 꿈꾸고 있었는데, 고향인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계획했다. 이정재는 오래 전부터 이천을 기반으로 정계 진출을 꿈꾸었는지 부하들에게 "길가다가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이기붕이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었고[8]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 강제적으로 빼앗겼다. 이 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말미암아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됐고, 이 틈을 타서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동대문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임화수에 관한 것은 해당 문서로.
그러던 와중에 박정희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사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9]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제7조1항(단체적 폭력행위)외 11개 범죄행위로 기소되어 범죄단체 수괴로 인정, 사형 판결을 받는다.
[image]
판결 이후 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깡패 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를 쓴 플래카드와 다른 깡패들과 함께 백주의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1961년 10월 19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이날 형무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감방에서 나와서 이동 중에 교도관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처음엔 흠칫했지만 바로 체념하면서 '''"오늘부터는 대접이 바뀌는구만?"''' 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형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사형당하기 전 남긴 유언은 아래와 같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10]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3. 기타


오랫동안 정치깡패로 욕만 먹고 묻혔지만 몇몇 지인들 주장으로 그 홀로 욕만 다 먹기엔 억울하다고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야인시대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로 이런 주장이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묻혔다. 더불어 이정재를 두둔하는 이들은 임화수를 두둔하는 이철승 같은 이들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자무식으로 깡패 영화 제작자이던 임화수를 정치계에 연결해 주었더니만 나중엔 죄다 이정재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오리발이나 내밀었기에 이정재와 사돈관계인[11] 유지광이 "회장님 덕에 네놈도 은혜를 입었건만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나?"라면서 분노에 찬 소릴 지르며 욕설을 해댔을 정도이다. 아예 유지광은 당시에 뚜껑이 올라갈 대로 올라간 상태로 달려가서 임화수를 패든지 하다못해 두 눈깔에 손가락을 박아 장님으로 만들어버릴까 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곁에 있었던 그들처럼 교수형으로 죽게 된 최인규가 "그렇게 해봐야, 이정재만 역시 정치깡패 왕초라면서 더 욕먹이는 짓."이라는 말에 참았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지금도 임화수를 두둔하는 이들을 죄다 이정재 탓만 한다고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국문과를 나왔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 부분은 그의 출생연도와 신흥대학의 개교연도[12]를 비교해보면 신뢰성이 매우 떨어진다. 게다가 속성과정을 거치든[13] 학력위조가 되었든 해당 대학교 출신이라면 사형을 당하고 난 뒤에는 후일담 형식으로라도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는 그런 내용은 전무하다.
씨름꾼이라 힘은 굉장히 세지만 싸움 실력은 떨어졌던 것 같다. 실제로 싸움을 잘했던 맨발의 대장보다도 약하다고 한다. 부산 깡패 5명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이정재를 시라소니가 구해주었고 이정재를 납치하였던 켈로부대원은 4명이었다고 한다. 싸움을 잘했다는 증언은 없고 거기에 주먹패의 이미지보다 모략가의 이미지가 강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image]
  • 1981년에 방송된 MBC 드라마 제1공화국과 1989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무풍지대에서는 조경환이 이정재를 연기했었다. 특히 조경환은 MBC 전속탤런트 1기로 어린이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을 비롯하여 MBC에서만 전속으로 활동하다가 무풍지대로 KBS에 첫출연하게 된다. 무풍지대를 찍을 당시 이정재를 기억하던 지인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체로 드라마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는 투로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철승이 무풍지대나 야인시대를 왜곡이라고 발악거리던 거와 대조적이다.
  • 1993년 영화 "대명"에서는 야인시대 홍만길 역을 맡은 정일모가 연기하였다. 다만 후시녹음을 한 것인지 홍만길 역의 목소리와 이질감이 크다.[14]

4.1. 야인시대



청년기에는 김혁#s-1[15], 장년기부터 마지막까지는 김영호가 맡았다.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시라소니와 맞먹을 정도의 실력자로 비춰진다.
형사양반으로서의 행적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야인시대 합성물에서는 형사양반 기믹으로 합성되고 있다.

[1]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2] 21세손 口재(載) 항렬[3] 추측성 기재는 혼란을 부추기므로 기존에 통용된 신장으로 기재[4]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후술된 내용에 나온다.[5] 1944년생으로 야인시대가 방송하던 때엔 살아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부가 방송되던 시점에서 이미 대장암을 앓고 있었다고...[6] 이정재가 실각한 이후 사실 상의 두목이 된다.[7] 이북 출신인 시라소니는 이북 출신들을 꾸준히 챙겼다고 한다.[8] 이는 자유당 내에서 이정재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고의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9] 이때 사망한 대학생 김왈영은 서울 중앙고 출신으로, 이정재의 고등학교 후배뻘 된다.[10] 영화판을 주름잡던 임화수까지도 재판에선 난 이정재가 시켜서 학생들을 구타하게 했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니... 다른 정치인들이나 그의 부하들이야 오죽했을까. 유지광 같은 경우는 임화수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정재를 옹호하긴 했다.[11] 이정재의 고모가 유지광의 형과 결혼했다.[12] 신흥대학이 가인가를 받고 개교한 것은 1949년 2월이고, 1952년에야 2년제 신흥초급대학으로의 정식인가를 받고 개교한다.[13] 차지철국민대학교 학사 학위를 받은 게 대표적이 사례다.[14] 아이러니하게도 대명의 이정재 목소리는 야인시대나레이션 이강식이 연기했다...[15] 제5공화국에서는 박선호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