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룡
1. 개요
평안남도 평양 출신 조직폭력배.
2. 일생
해방 전 이북에서 평양엔 이화룡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이미 유명한 건달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이북이나 만주 등지에서 싸움과 노름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성순과는 오랜 친구였다. 재빠르게 상대방의 무릎을 딛는 동시에 큰 기합을 지르며 위력적인 박치기를 구사했었다고 한다. 서북청년단 대동강동지회의 특공대장으로 좌익계열을 습격하는 등 백색테러리스트로 활동했다. 제주 4.3 사건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이기붕이 자유당 당원 제의를 했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이화룡이 스카웃을 거절하자 이기붕은 이정재를 스카웃한것.
이 무렵 시라소니는 굶주리고 갈곳 없는 KLO대원들을 위해 동대문패에 점포를 양도해 달라면서 몇차례 돈을 빌린다. 마지막엔 50만환(5억원)을 빌려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점포양도를 요구하자, 동대문패가 분노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온갖 흉기로 린치를 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화룡은 복수를 위해 이정재의 동대문파와 대립했으나, 이정재의 사주를 받은 경찰의 협박으로 이를 그만둔다. 그러다가 황금마차 습격사건으로 다시 싸움이 일어났고 이 때는 대승을 거두었다.[3]
이후 내부의 배신자들로 인해 명동패 몰락의 위기가 오자 이정재와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조직폭력계에서 강제 은퇴를 당하게 된다. 이후 그의 조직은 신상사가 잇게 된다.
이후에는 조폭과 일절 엮이는 일 없이 영화사업에 투신했다. 임화수 등 여타 영화산업에 뛰어든 조폭들과는 달리 예술적인 안목이 있었는지 진짜 '작품' 소리를 듣는 제대로된 작품들도 여럿 제작했다.
이화룡이 제작한 거물급 작품으로는 소위 1대 장희빈으로 불리는 김진규,김지미 주연의 정창화 감독의 1961년작 '장희빈', 한국 고전영화의 걸작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강대진 감독, 김승호 주연의 마부와 '박서방', '노다지'[4] 등이 있으며, 이만희 감독의 데뷔작인 '주마등' 등이 있다.
하지만 이화룡이 설립한 화성영화사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불과 8년만 존속했으며, 이후에는 공식적인 영화 제작 활동은 알려진 바 없다. 비록 건달 출신이지만 영화 제작자로서는 유능하고 식견이 있는 인물이었기에[5] 한국영화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5.16 군사정변 직후 사회정화 구실로 잡혀가 2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영화사업에서 은퇴한 후 이화룡은 신앙생활을 하였고 목사로 지냈다. 여담이지만 누이 이성룡씨가 서울에서 유명한 요정 명월관과 당시 명동에 있던 대규모 고급 중화요리집인 청해루를 운영했고 당시 정관계 인사들이 시도때도 없이 들락거렸다. 또한 청해루의 경우 그 당시 맛집이었고 요정과 중화식당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돈 중 일부를 이화룡한테 원조해 줬다고 한다. 이 이성룡씨의 아들이 바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오원철이다.
1984년 2월 24일, 고혈압으로 사망,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다.
3. 대중매체에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김두한과 우호적 관계이며, 불문율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낭만파 주먹으로 설정됐다.
3.1. 무풍지대, MBC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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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KBS2 무풍지대와 1993년 MBC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이해룡씨가 역을 맡았다.
3.2. 드라마 명동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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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최상훈. 명동의 황제라는 별명을 바탕으로 명동의 문학가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문학가들을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정치깡패들로부터 명동의 문학가들을 지켜주는 조력자 캐릭터로 나온다.
3.3. 드라마 왕초
배우는 이계인. 빈손으로 월남해 술집에서 꼬장이나 부리는 몰락한 오야붕으로 너프당했다. 이화룡이 유일하게 부정적 이미지로 나오는 작품.
3.4. 드라마 야인시대
[1] # 일제시대 당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키를 비교한 자료.[2] 친구인 '시라소니' 이성순은 일설로 아들의 증언 175cm 소문에선 174cm지만 실제로 이화룡과 비슷한 키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 다 당시로서는 장신.[3] 드라마 <무풍지대>에서 나레이터가 말하길 이정재의 동대문파는 전투력 면에서는 이화룡의 명동파를 단 한번도 앞선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다.[4] 조감독이 임권택이다[5] 당시 화성영화사는 '박서방', '마부', '임자없는 나룻배' 등 196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온 당대의 명문 영화사였다. 또한, 조폭들이 흔히 제작하는 조폭미화물도 화성영화사에서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