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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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을)'''
제2대
오화영

'''제3대
김두한'''

제4대
한근조
-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용산구)'''
제6대
서민호

'''제6대[56]
김두한'''

제7대
김원만


'''김두한
金斗漢 | Kim Du-han
'''
'''출생'''
1918년 5월 15일[1]
경기도 경성부 종로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972년 11월 21일[2][3] (향년 54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
'''호'''
의송(義松)
'''본관'''
신 안동 김씨
'''신체'''
182cm[4] 90kg 이상[5]
'''학력'''
교동공립보통학교 (중퇴)[6]
'''병역'''
없음
'''종교'''
불교
'''소속 정당'''
(최종 당적)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3''', '''6'''
'''부모'''
아버지 김좌진
'''배우자'''
이재희[7], 김부미[8], 김순옥[9], 박정인
'''자녀'''
아들 김경민[10], 김주택[11], 김현성[12], 김범상[13]
김을동, 김영채[14]
'''친인척'''
외손자 송일국, 외손녀 송송이
진외손자[15]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1. 개요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여부 관련 논란
5. 김좌진 친자 논란
5.1. 출생 의혹 및 반론
5.1.1. 김두한은 공식적으로 김좌진의 아들이다
5.1.2. 출생 의혹이 생긴 과정
5.1.3. 출생 의혹이 90년대에 생긴 결정적 이유
5.1.4.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5.1.4.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5.1.5.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5.1.6.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5.2.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6.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7. 기타
9. 소속 정당
10.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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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독립군 김좌진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직폭력배 출신으로, 광복 후 김구염동진백색테러 단체인 백의사[16]신익희, 유진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주요 간부를 맡은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 감찰부장으로 활동. 백색테러리스트, 정치깡패로서 이름이 알려졌으며, 6.25 전쟁 직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및 보궐선거에서 각각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용산구 지역구에 출마, 2선의 임기를 지낸 전 국회의원이다.

2. 생애




3. 평가


거물급 정치인은 되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까지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국회의원 재임 중 이승만사사오입 개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반대의사를 표현해 4.19 혁명에 참여한 것과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벌인 반독재의 모습과 사망 직전까지 꼬박꼬박 기부를 행한 선행이 세간에 유명해져서 여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박문영 작사·작곡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다른 인물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김두한은 정치깡패 시절 여러 차례의 백색테러살인, 학살[17] 등 각종 중범죄를 저지르고 과거에 친구였던 정진룡을 살해한 사건으로 법정에 서서 그간의 행적들로 인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등 많고 무거운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김두한은 공과 과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온갖 역사적인 인물과 극히 밀접한 관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이다.[20]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역사적 인물 중에서 극단적으로 미화, 과대평가[21]되거나 극단적으로 헐뜯어서 과소평가[22]되기 쉬운 인물이다.
사실 김두한에 대한 극단적인 미화나 과소평가는 그의 허풍과 엮인 사건들로 인해 실제보다 더 거물급 인물로 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말종이나 정의감에 불타는 협객이었다기보다는, 주먹이 세고 고집이 셀 뿐 혼란스러웠던 근현대사에서 여러 사건에 엮인 사람 중 하나에 가까웠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23] 한국 역사 및 정치사에서 김두한이 남긴 족적이 크다고 볼 수는 없고, 근현대사를 논할 때 김두한보다 먼저 연구되어야 할 사람은 무수히 많다.
김두한은 일제시대에는 자신의 힘을 이용한 깡패짓으로 먹고 산 소악당. 해방 이후에는 김구, 이승만, 유진산 등 거물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백색테러를 저지른 행동대장. 본인의 이익, 감정, 정의감에 따라 여러 활동을 하는 등, 시대에 따라, 흐름에 따라 행동해왔던 것이다. 그는 독립군이나 투사만큼 특출나지는 못했지만 인간적인 선함도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잘못된 행동도 많이 한 인물이었다. 이승만, 김구 등 거물 정치인들이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사람이라면 김두한은 그들이 주도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거나, 그들이 주도하는 시대의 흐름에 휘말렸던 사람이다.

3.1. 긍정적 평가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 백범 김구[25]

[26]

"조악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다, 인간 김두한은 시원시원한 말투와 예의를 지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권오기[27]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 안타깝다." -이만섭[28]


3.2. 부정적 평가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 한홍구


4.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여부 관련 논란


김두한은 일제 측에 붙어서 부역을 한 적이 있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한 목록에도 김두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친일인명사전도 일제 부역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구분한다. 즉, 강제적인 징역이나 징병, 그리고 이를 피해 대체부역한 사람들이 제외되었다. 그래서 김두한을 친일파 목록에 삽입하면 친일파 기준이 급격히 내려가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는 몇 배로 두꺼워진다. 이 점은 김인호의 《태평양전쟁과 조선사회》(2014)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데 일제 부역자로 분류될 민중들이 많다.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 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숭실사학 2015, vol., no.34, 통권 34호 pp. 255-294 (40 pages))에선 김두한도 그런 인물로 보이는데, 일제의 부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설명된다.
대한민국에선 B,C급 전범 판정을 받은 조선인도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 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한다. 2차대전 조선인 전범은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당연히 위의 사전이나 보고서에서 제외되었다. 김두한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면 형평성에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 것이 문제.

5. 김좌진 친자 논란


김두한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의 진위여부는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처음으로 공개 지면을 통해 친자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은 도올 김용옥으로 알려졌다. 김을동에 따르면, 이 논란은 김용옥이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고 한다. 다만, 김을동의 주장대로 김용옥이 이러한 내용을 최초로 주장한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김용옥의 1990년 기고문 자체는 세월이 너무 지나 인터넷 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단 김용옥 본인이 작성한 글은, 그저 "개성출신 고아거짓말한 것이다"라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해인 1990년 발표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원안을 쓴 사람이 바로 김용옥이다. 다만 김용옥 자신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의 김두한이라는 인물은 영화적 픽션이라고 밝히기는 했다.
어쨌거나 불씨가 된 것은 사실이고, 이후 제법 논의가 되면서 여러 사실이 밝혀졌으나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5.1. 출생 의혹 및 반론



5.1.1. 김두한은 공식적으로 김좌진의 아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명백히 맞다'''.[29]
의혹을 제기하는 측은 가장 결정적인 '''본가의 인정'''을 두고 "김두한이 김좌진 본가에 압력을 넣었다"는 추측을 하는데, 일개 깡패에 불과한 당시 김두한의 사회적 권력으로는 실질적인 위협은 고사하고 딸랑이질조차 하기 힘들다. 게다가 김두한 1970년대 사망이후에도, 생존했던 김좌진 부인 나혜국 여사 이 1986년 신문인터뷰에서 '''김좌진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등 2명뿐이다.'''라고 인터뷰했다.
그러므로 김좌진 본가측의 인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 아들설이 생겨난 원인은 김두한 특유의 심한 허세 때문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심한 뻥을 쳤고, 아버지 김좌진과 관련된 진술에서도 과도한 자기포장을 했다. 이를 읽은 90년대 이후 사람들이 교차검증을 해보니 당연히 거짓말이 수두룩 하게 나왔는데, 그게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전제에 대한 신뢰도까지 떨어뜨린 것이다.

5.1.2. 출생 의혹이 생긴 과정


김좌진의 배우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3명인데, 정실부인인 오숙근,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독립운동 동지로써 결혼한 나혜국, 그리고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이 있다. 자녀에 대해서는 김두한 외에 나혜국의 아들 김철한과 딸 김석출이 있다.
김좌진 - 김두한은 부자관계에 대한 근거는 일제 강점기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다.
김두한은 21세기 기준으로 무려 100년 전에 출생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 부근에 출생했던 인물 중에 어릴 적부터 신문지상이나 일제 공식문서에 오르내리거나 공식 기록이 보존되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은 가족이 자식으로 인정하고, 양반은 문중의 족보에 오르며 혈통에 대한 공식적인 증거가 된다. 그런데 김두한은 김좌진의 남은 두 명의 부인인 오숙근, 나혜국의 인정을 받은데다가, 수많은 언론과 일제의 공문서, 안동 김씨 문중 등에서도 공식적으로 김두한을 인정했다.
김두한은 1918년생이고 대략 1930년 내외에 일제시대 여러 언론에 의해서 김좌진의 아들로 보도된다. 김좌진의 사망 이후,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나혜국 여사가 귀국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들게 생활했다. 이에 정실부인 오숙근은 자주 왕래를 했고, 김두한은 오숙근과 나혜국 여사와 왕래했다. 일제시절에 안동 김씨 가문이 김두한을 안동 김씨로 인정했으며, 이에 관한 기사도 남아있다.
김좌진의 두 명의 정실부인 즉, 오숙근과 나혜국에 의해서, 딸 김석철, 아들 김철한과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올림으로써 이 세 명의 자녀는 확실히 김좌진의 자녀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일본제국 경찰에서도 김좌진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요주의 인물이 된다. 이게 모두 해방 전후의 일이다. 또, 해방 이후에 김두한의 딸 김을동이 김좌진의 어머니와 본처인 오숙근여사와 같이 찍은 사진도 현재 존재한다.[30] 또 나혜국 여사는 김두한 사후인 1987년에도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라고 언론에 인터뷰했다. [31]
게다가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의 부하였던 이범석이나 김구 등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김두한이 힘으로 윽박질러서 호적을 얻었다는 황당한 주장이 무색한 이유이다.[32]
즉 김두한은 보통 1930년 정도에 김좌진의 아들로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이후 김좌진의 호적에 오름으로써 아무리 늦춰 잡아도 해방 직후에는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받아들인 인물중에 가장 늦게까지 살아 계시던 분이 김좌진의 정실 자식인 김한철의 친모 나혜국 여사이다.
나혜국 여사의 공식 인터뷰중 가장 마지막이 1986년도 정도인데, 나혜국 여사는 신문인터뷰에 ''' 김좌진의 자녀는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발언했다.[33]

5.1.3. 출생 의혹이 90년대에 생긴 결정적 이유


어쨌든 공식적으로 보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확정된 것은 1930년대쯤이고, 이후로 1990년대 전까진 단 한번도 김두한이 김좌진 자식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널리 퍼진적이 없다.
그럼 1990년대 뜬금없이 김두한 출생에 대한 음모론이 퍼진걸까.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분들이 다 사망하고, 마지막으로 나혜국 여사까지 사망했기 때문이다.''' 즉, 나혜국 여사가 사망한 이후 90년대 들어와서야, 김용옥이 김두한의 출생의 의문 발언을 한다.
나혜국 여사가 살아있을 때 김용옥이 그런 황당한 의혹 제기를 했으면 나혜국 여사 쪽에 반박당했을 것이지만, 딱 시기를 맞추어서 김두한 출생의 증인이 모두 사망하고 사라진 이후에 딱 맞춰서 그런 의혹을 제기하게 된다.[34]
이렇게 제기된 의문을 초기 진압할 권위와 명분을 가진 인물들이 다 사망한 이후이기때문에 이런 음모론이 계속 살아남은것이다.
1990년대에는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인정했던 당시 인물은 다 사망했을뿐 아니라, 마찬가지 이유로, 김두한이 진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보여줄 여러 증거자료들도 수십년이 흘러서 많이 사라졌다. 물론 그럼에도 김두한은 1920~30년대 출생자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출생관련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소개된 신문기사는 증거로도 남아있고, 이런 정도의 증거를 가진 인물이 없다. 그러나 그 기사를 낸 기자가 어떤 근거로 그런 기사를 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뒷이야기까지 100년뒤에도 남아있을정도로 어린 김두한이 그 정도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김두한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에 올랐는지, 일제시대 경찰이 어떤 자료로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판단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김좌진의 정실 부인들에게 인정받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인정받았고, 이범석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등은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출생인물 중에서 출생부터 죽을 때 까지 세밀한 기록이 다 남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5.1.4.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김두한이 뒷세계에서는 거물급이었고 비록 한국노총 위원장과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정계 거물급 인사로 크지는 못 했던지라 역사적으로 족적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도 김두한의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거의 없고, 가십거리 취급을 받았다. 이승만, 박정희, 장면, 윤보선,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같은 거물급 인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따라서 김두한에 대한 저작물이나 음모론은 판타지에 가까운 픽션이 대부분인데, 이런 픽션의 근거는 상당수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다. 김두한의 회고록은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 김두한 편" 이 있다.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상 픽션으로 보는 게 맞다.[35]
그러나 사실 회고록으로 음모론이 출발하는 건 넌센스 코미디에 가깝다. 가족이 아닌 제3자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냐를 따지려면 유전자 검사가 확실한 방법이지만, 당사자들은 서로 가족으로 생각하는데 제 3자들이 난리친다고 4촌 이내의 가족들끼리 유전자 검사가 행해질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김좌진 장군의 정실부인 쪽에서도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적이 없다. 김두한의 김좌진의 맏아들이라고 100여 년에 가깝게 동일하게 인정받고 있으니, 안동 김씨 측에서 지금 와서 유전자 검사를 받는 등의 절차를 갑자기 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김좌진 장군이 사망했는데, 김좌진 장군의 자녀 중 김두한이 가짜라고 의혹을 보인다면 다른 자녀는 진짜인지 누가 알까? 당연히 김좌진이라는 원본이 없는 이상 김좌진 후손끼리 비교한다고 결론이 나오기는 힘들다. 김철한 씨와 김을동 씨가 서로 유전자 검사를 해서 친인척이 아닌 걸로 나오면 그럼 누가 가짜일까?
제3자의 입장에서 김두한의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결정이 틀렸다고 증명하려면, 김두한이 안동 김씨 가문, 언론, 조선총독부, 김좌진 장군의 부하, 독립운동가들, 김좌진의 정실부인 등에게서 인정받는 과정과 당시 판단 근거를 조사해서, 그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면 된다. 하지만 1930년 내외에 어린 김두한이 안동 김씨 일가에서 김좌진 친자로 인정된 여러 가지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현재로서 별로 없기 때문에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지 아닌지 정확히 따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닌 게 이미 100여 년 전의 과거사건이며, 역사적으로 중요사건도 아니고, 당시에 김두한의 출생에 어떠한 의혹도 없기 때문에 이걸 자세히 조사한 기록도 없다. 김두한이 아닌 다른 사람 역시도 그 당시 가정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나마 그 중에서 김두한이 어린시절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자세한 편이다.
김두한의 출생 의혹은 1990년대 도올 김용옥으로 인해서 커진 것은 사실이고, 이 시기에는 별 다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특별히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은 이상은 제3자의 입장에서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손인지 아닌지 증거를 모은다는 게 거의 불가능이다. 김을동 나이 정도 되는 인물, 예를 들어, 박원순은 서류상 할아버지가 유전적으로도 할아버지 맞는가? 사실 유전자 검사하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전두환의 호적상 아버지가 유전적 아버지인 게 맞는가? 고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가 신돈의 유전적 아들인가? 현대인은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른다. 사실 유전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은 21세기에 사는 그 누구도 모른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의 유전적 아들이 100% 맞는지는 원래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보통은 박원순이나 전두환의 가족관계상 아버지가 실제 아버지라고 보통 인정하는 게 맞다. 그게 공식적인 것이다.
즉, 출생의 의혹이 되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호적이나 각종 가문원, 친지들의 인정 같은 걸로 혈통을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박원순, 전두환의 조상들도 어떤 과정으로 가족과 친지들이 친자임을 인정해줬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100여년전 김두한의 출생에 관한 구체적인 정확한 기록이 없는게 원래 정상적이며, 구체적인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이유이다.
결국 일가친척들이 인정해주고 호적까지 올린 가족 사항은 기본으로 존중하고, 만약 그것에 반박할 증거가 있다면 반박하면 된다. 만약 혈통에 관해서 반박할 증거가 없다면 반박을 안 하면 된다. 증거 없으면 반박하더라도 의미없는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현재 혈통에 반박할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또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김두한 회고록에 자기 미화가 가득해서 굉장히 많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김두한의 회고록은 역사학계에서 정식 사료료 인정받지 않는다.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김두한의 회고록을 역사학의 근거자료로 쓰지 않는다. 믿을 만한 다른 자료를 근거자료로 쓰는 것이지, 내용 자체가 신뢰가 안 가는 자료를 쓸 이유가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은 그냥 논픽션이 아닌 픽션 수준으로 참고만 하라는것이다. 역사학 관계자들은 아무 책이나 역사 자료로 쓰지 않고, 김두한의 회고록은 역사학계에서 정식 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 즉 김두한의 회고록으로 근현대에 대한 판단을 하고 그걸로 논문 쓴다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두한의 출생관련 역사적 학문적으로 주장를 하려면 김두한 회고록이 아닌 학계에서 인정받는 사료를 사용해야 한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맞건 아니건, 판단을 하려면 김두한의 회고록으로 판단하는것은 신빙성이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는 정식 역사자료로 인정받지 않으므로, 고조선 관련 역사를 연구할 때는 환단고기를 배제하고 다른 믿을 만한 역사자료로 연구하는것이 역사학자의 연구방향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서술 내용이 틀린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고조선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정조의 어머니가 쓴 책 한중록은 몇몇 틀린 부분이 있어도 대부분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을 통해서 인정되었기에 정식 역사 자료로 인정받는다. 정조 시대 역사를 연구할 때 한중록을 사료로 써도 된다. 김두한의 출생에 관련 연구를 하고 싶으면... 김두한의 회고록은 배제하고 다른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면 된다. 만약 결론을 내릴만한 자료가 없다면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의 회고록이 잘못됐다고해서..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김두한이 깡패가 아니었다거나, 김두한이 정치폭력을 안했다거나 하는 결론을 내릴순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의 오류가 있다는 것이 현실에 뭔가를 증명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야인시대 같은 픽션이 실제 역사 사료와 다르다는 것으로 뭔가가 증명되지 않는 것과 같다.

5.1.4.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그래서 김두한의 회고록은 실제로 김두한의 출생의 진실과는 무관한 책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마치 출생의 진실을 김두한의 회고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양 떠들고 있다.
사실 1960년대에 나온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의 회고와 증언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내용을 보면 김두한의 회고록은 여러 오류가 있다.
김두한 회고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제시대 조폭활동 해방 이후 정치관련 활동을 굉장히 미화한다. 스스로를 일본에 대항하는 협객으로 미화하는데, 특히 조폭활동하면서 몰래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 시설을 폭파하는 등 활동을 했다거나, 해방 이후에 일어난 우익폭력 사건을 빨갱이를 대항하는 영웅으로 미화한다거나 등의 과대포장이 많다. 또 김두한 출생관련해서도 구석구석 미화와 오류가 있다. 김좌진이 사망했을 당시 김두한은 불과 12살 전후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두한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니 애매한 구석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친부 논란을 떠나서 김좌진을 만났다는 것이 김두한 특유의 허세, 허풍일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
이로 인해 김두한의 회고는 세부적인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들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조차도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야기한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며,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사실 관계가 엉망진창이다.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죽은 이야기를 50살 내외에 하는데 이게 몇 살 때 일인지 제대로 기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있다.[36] 사실 21세기 기준으로 50세가 많은 나이 아니지만, 당시는 노인에 가까웠다. 게다가 김두한의 사망이 1972년이다. 회고록은 1963년, 196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정의감에 찬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투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폐인이 되어서 풀려난것이 1966년이다. 1966년 이후로 거의 폐인이 되어 살다가 72년에 죽었다.
어쨌든 기억해야 할 것은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을 정확히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 김두한 회고록은 역사논문이 아니었고, 김두한도 글을 잘 못읽던 사람이라 자료하나하나 검토해서 만들어지기 힘들 상황이었다. 특히 라디오는 즉석에서 거의 기억에 의존해 증언한 것이며, 핵심내용은 일제시대 조폭생활, 해방 이후 우익폭력활동을 미화, 자기합리화한 내용이다.
  • 이 책이 사실 출생과 관련해서 연관짓는게 좀 어색한 이유가, 애당초 김두한은 자기 출생을 증명할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된게 1930년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김좌진의 아들로 잘 살았고 당대에 그 누구도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없었다.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은 1990년이후에나 나왔다. 즉, 회고록에 자기 출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늘 하던대로 허세를 부린 것이라는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5.1.5.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어쨌거나 김두한의 회고록은 그의 출생을 증명해주거나, 글의 출생을 반박하기에는 증거가 될수없는 자료임에도 김두한 회고록 자서전을 근거로 뭐가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논의가 많았다. 그 회고록이 출생의 비밀을 보여주는 양 음모론이 퍼지는데 일조를했다. 이런 여러가지 논의를 소개한다.
가장 문제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모친에 대한 기록이다. 일단 김두한의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좌진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일본제국 경찰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 도피 중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옛 상궁 출신인 박 씨와 그의 딸 박계숙의 집이었다. 이후 박씨 모녀는 김좌진을 보살펴 주었고, 박계숙은 김좌진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이야기는 미화, 과장되었다. 문제는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이 일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훗날 김두한의 출생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했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의 사망 이후 보도된 내용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된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국내언론도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였으며,[37] 자연스럽게 국내에 남아있는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김좌진의 가족은 현재 길림성 모처에 있으며 칠십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 씨이다. 다만, 서울 시외 모처에 김좌진의 서자[38]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39]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김두한의 거처가 서울 시외가 아닌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취재를 했다. 이 결과가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렸다.
“김좌진의 애첩이었던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에 대한 다른 소식들은 모두 잘못 전해진 것으로, 그들은 현재 개성에 있다. 김두한은 현재 개성 서본정(西本町) 254번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중략)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의 외할머니만 병들어 누워있었다." 『조선일보』1930년 3월 17일자)
나머지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에 몰락했다. 결국 집안이 파산하여 김계월은 15세 때(1916년)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에 김계월을 서울에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때 김계월은 태중에 김두한을 가진 상태였다.
한편,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떠나면서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 딸을 낳으면 두옥이로 이름을 정하라 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고, 김두한이 말한 자기 어머니 성씨가 실제와 다르다.
여기에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김두한이 당시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증언한 내용. 김두한은 회고록에서는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증언할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보다 나중의 육성증언인 '노변야화'에서 “8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최문우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엔, 분명히 "12살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라고 했으니 일차적인 모순이 발생.
위의 두 의문점은 결국 어떤 기회주의자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사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산해낸다. 사실 모든 의혹은 이 주장으로 모이긴 한다.
그런데 월간 말의 기사는 위의 모순점들이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래 내용은 월간 말에 인용되어 실렸던 것을 약간 편집한 것이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따라서 김두한이 자신이 6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잘못 기억하여 연도가 틀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후의 사실까지도 연도가 죄다 실제와 다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계월은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좌진으로서도 김계월 일가를 보살피기에 벅찼기 때문에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대략 1926년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 연고가 없어 알아볼 사람이 적은 개성으로 옮겨 기생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그런데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결국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기생 2명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어린 김두한은 외조모 아래 개성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김계월은 이후 다시 더 북쪽의 홍원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결국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계월은 행방이 묘연하고 김두한과 외조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기생 첩 출신 어머니, 그리고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이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얼굴도 모르는 위대한 아버지. 이런 사실에 대해 김두한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당연히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김두한이 기초적인 사실을 근거로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잔뜩 집어넣어 스스로를 높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두한의 관련 증언들이 애매하고 사실관계가 다소 어긋나 있는 사실들은 모두 해명이 가능하며,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꾸며내었는지 또한 설명이 된다.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어머니 성씨가 엉뚱하게 기재된 것은 어머니가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린 탓에 어린 김두한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과정 중에 대필작가가 대충 기재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김두한 본인은 어느 정도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구술에 의존해서 대필되었을 것이며, 사후 검토나 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이런 논의가 필요없는것이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이 라디오 생방송에서 기억에 의존해서 떠벌린 내용은 문자화 한것이다. 김두한은 글을 읽을줄 몰랐던 사람이기에 뭐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바탕으로 주장한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서는 출생의 비밀에 포인트를 맞추지만, 실제로 회고록에서는 출생관련 내용은 극히 일부일뿐이며, 김두한의 일제시대 깡패활동, 이후 정치활동 등의 내용도 오류가 많다.
회고록에 그런 오류가 있다고해서 일제시대 김두한이 깡패짓 안하고, 해방이후 정치활동 안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즉, 그 회고록 자서전은 책의 첨부터 끝까지 허풍과 오류 투성이며, 그 책을 근거로 무슨 주장을 하면 안된다.
회고록이 나온건 1960년대이며,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자손으로 확고하게 인정받은게 1930년대 이후이다. 즉, 그 책과 무관하게 김두한은 출생을 인정받은것이며, 그책의 내용이 오류가 많건 적건 깡패생활, 정치 활동, 출생 이 없어지는게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의혹들이 더 있다.
  • 우리 김좌진 장군님이 기생 따위와...
    •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자들 중에 본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김두한이 김옥균김좌진의 양아버지라고 말한 것. 그러나 김좌진은 1889년 생인데, 김옥균은 188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본인과 아버지인 김좌진을 더욱 돋보이게끔 같은 가문인 김옥균을 끌어들여 거들먹거린 듯하다.
  • 김두한은 형평운동 중에 김좌진과 인연을 맺은 원노인 밑에서 컸다고 주장하는데, 김좌진과 형평운동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x 2. 원노인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존재하였는데, 억지로 김좌진과 연결시키기 위해 형평운동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은 있다.
  • 그 외 김계월의 나이가 잘못되었다거나, 연도가 살짝 맞지 않는다거나, 김계월의 아버지라는 '김상희'라는 인물이 조선말 참판을 지낸 기록이 없다는 지적
    •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신문 기사에서 연도나 나이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김계월의 어머니이자 김두한의 외조모로 배움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는 민간에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따지고, 공식 기록이나 신문 등에서는 양력으로 따지던 시대이니 혼동이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사소한 오류점을 제외하면 정황 자체는 그럴싸하다. 참판 기록이 없다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데, 조상 중 누구가 참판을 지냈다는 핑계로 참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
  • 김두한이 해방 이후인 1945년에서야 김좌진과 이혼했던 옛 본처 오숙근[41]의 아들로되어 본처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는 주장.
    • 이미 1930년부터 김두한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오히려 오숙근이 해방이 되고서 뒤늦게 자신과 김좌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김두한의 존재를 이용했다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40]
  • 김좌진의 사망 보도 기사에는 양자인 김문한이 언급될 뿐이며, 김두한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등장한다.
    • 김문한은 김좌진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김좌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장례 문제로 급하게 양자가 되었을 뿐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 이후 김문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 이야기는 아래에 적혀있다.
  • 총독부에서 고의적으로 김좌진의 명예를 폄훼하기 위해 김두한이라는 사생아를 만들어냈다는 주장
    • 이런 행위를 한 것은 매일신보로, 최초 보도한 것 역시 매일신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1925년 그 어머니 김계월이 어린 김두한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을 만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 「金佐鎭과 金桂月 八年만에 異域에 邂逅 오래동안 서로 그리우든 정랑정부가 서로 맛낫다」) 김두한의 회고와 비교하면 이 기사가 조작이 아니라 도리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상봉 이야기는 유학자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에도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에서도 보도되었는데, 이 당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친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당시 김두한의 나이는 불과 12세로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또한 김두한과 그의 외조모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불우한 생활을 했는데,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했다면 왜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것인지?
  • 굳이 총독부가 아니더라도 김두한의 외조모 혹은 기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다.
    • 뭐하러? 이 시점에 김좌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이국에서 사망한 불순한 독립운동가였다. 대체 그와 관계있다고 주장해서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 김좌진과 김두한은 전혀 닮지 않았다.
    •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개인의 주관으로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설령 닮지 않았다고 해도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5.1.6.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사실 이런 논란이 객관적이거나 근거가있다기보다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김을동이 정치계에 투신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된 것이다.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 연예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인기를 끌고 201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42] 김두한이 심지어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였다가 극우파로 변신했다고 하기도한다. 기사
그러나 이것 역시 과대포장인것이, 김두한의 후손이 한두명이 아니다. 김두한이든 누구든 자손이 많으면, 자유한국당 지지자도있고, 민주당 정의당 지지자도 있을수 있는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손자·손녀, 역사교과서 놓고 좌우로 갈려[43] 김을동씨가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의 정치인으로 활약했다면, 김두한의 아들이며 김을동의 이복동생이 김경민씨는 새누리당 반대쪽에서 활약하고 있다. 자손이 많다보면 각기 정치적 색깔이 다를 수 있으므로 비판할 대목이 있다면 그 개인들에게 하면 된다.

5.2.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그 외에도 1942년에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문서(京鍾警高秘 제1721호)에도 김좌진을 김두한의 아버지로 쓰고 있고, 중외일보 1930년 5월 20일 기사에는 "수일전 계동(桂洞) 김병목(金炳穆)씨 집에서 고 김좌진(金佐鎭)씨 유고 두한(斗漢)소년의 장래교육을 위하야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더라" 운운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 차원에서도 김좌진아들이란 걸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제국 경찰의 내부문서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해놓고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안동김씨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갔으며, 김좌진 장군 밑에서 같이 독립군 활동을 하던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말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 선생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군이라 지칭하면서 걱정해주었다. 김구 선생도 거물이지만,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우익폭력계의 거물이고 이승만의 바로 아래급 거물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폭력으로 김좌진 문중을 위협해서 호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 김좌진의 측근들이 김두한보다 더 거물이었으므로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백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글에서도 보인다.(1948년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두한이 사망한 1970년대 이후
  • 1986년 나혜국 여사[44]의 언론 인터뷰 : (제3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자)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다."
  • 1990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45]

6.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한편 1989년, 김좌진의 딸이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갑툭튀하면서, 위의 가짜설과 엮여 논란이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사실만을 간추리고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1988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좌진의 유족으로 김강석 혹은 금(金)강석이라는 60세 중국 국적 여성이 김좌진의 딸임을 주장하여, 이 사실이 1989년 기사화되었다.[46]
- 1988년 당시는 냉전이 막 끝난 상황으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족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므로 김좌진의 혈통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새롭게 등장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런데 저 위의 링크된 기사 내용으로만 보아도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하다. 김좌진의 내연관계였다는 이 여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망한 상태이며, 김좌진의 부했다는 양아버지 역시 사망한 상태. 게다가 이 여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 신분에 뭔가 애매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47] 또한, 본인이 직접 국가보훈처에 먼저 연락을 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마뜩치 않은 부분.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며 실제 이후로도 문제가 된 것은,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기존에 알려진 김좌진 암살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 이후 소식은 알 수 없고, 1999년 중국에서 열린 김좌진 자택 복원 기념회에 한국의 유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기사화되었다.
- 위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에서도 '장군의 딸로 알려진'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넌지시 돌려 말하고 있다.
  •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5년, 김강석의 딸이자 김좌진의 외손녀라 주장하는 위연홍이라는 여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기사로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참고로, 김좌진과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은 김강석 이전에도 존재했다. 김좌진의 양자 김문한의 아들이라는 주장 기사에 따르면, 신뢰하기도 적고 사실이라 해도 김문한 자체는 일시적으로 장례 문제로 양자 취급한 조카이므로, 유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김을동도 말했듯이 바로 유전자 검사뿐이다. 그런데 김강석 쪽과 김두한 쪽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련성이 없다고 나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가짜라고 주장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따라서 제3의 유족이자 호적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명백한 김좌진의 유족인 김두한의 남동생 김철한 쪽 유전자와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유전자 검사를 제의했고, 위연홍은 잠적해 버렸다는 김을동의 주장에 대해, 김철한 쪽에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즉, 사실상 김을동의 주장을 수긍한 셈.
그러나 사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나혜국 여사가 이미 1986년 신문 인터뷰에서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단정해서 말한 것을 고려할 때, 김철한이라고 생각이 달랐겠는가.
그리고 MBC에서 1990년에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 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
김두한은 김좌진 가문을 매수 혹은 협박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두한이 1970년대 말년에 병고에 시달릴때 의지할데도없이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하물려 김두한이 죽은뒤 10년도 훨씬 지난 80년대말이나 1990년대초까지도 김두한을 무서워한다는게 말이될까? 게다가 김두한 패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했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 후손이다. 특히 나혜국 여사는 일제시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했고, 김좌진 장군 사망 이후 일제치하 조선에 귀국한후 일제에 엄청나게 고초를 치렀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김좌진 가문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엉터리이다.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가 해방 이후 거물인 이범석이며 나혜국 여사와도 독립운동 동지이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김두한 사형구형당시 구명운동을 한 인물이다. 김두한은 정치폭력배로 유명하지만, 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범석은 해방 이전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이었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으려고 협박을 할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게다가 백번양보해서 가령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들을 협박한게 맞다고 치더라도 자신들을 협박한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상대를 계속 두려워한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여러 정황상 위연홍이 오히려 의문점이 더 많다.
  • 김좌진 장군의 후손에 김을동만 있는게 아니다. 김좌진 장군의 자식에는 김두한도 있으며, 첫째 정실 부인의 자녀 그리고 세째부인 나혜국 여사의 자녀인 김철한 쪽 후손도 있다. 즉, 위연홍이 만약 유전자 검사를 원했다면 왜 굳이 김을동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결국 언론플레이를 위해서 유명인사인 김을동을 지목한게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 위연홍은 2005년 한국에 온 이후, 2006년세계일보 기자가 기사를 내면서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김좌진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한 판결이 난 것이 2008년 3월인데, 김을동의 국회의원 초선 당선이 2008년 5월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처럼 김을동이 국회의원으로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기다.
  • 세계일보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기사를 내면서 도움을 주었고,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과 홍성군 의회 지역유지들도 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동김씨 문중과 연결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정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란 근거가 빈약했다면, 그 많은 자손 중에 한 명과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 근데 굳이 김을동이 안 만나줘서 유전자 검사를 못 한다며 김을동 탓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그리고 위연홍이 실제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면 굳이 김을동이 위연홍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위연홍이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고 인정받는다고 한들 도대체 김을동이 손해보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김을동이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해도 그걸 이용해서 위연홍을 몰아낼 이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MBC 다큐 <백야 김좌진>에서 김경민이 김을동에게 김강석 - 위연홍 이야기를 하고 김을동은 고모(김강석)가 살아계실 때 한 번 모셔서 서울구경도 시켜드리고 족보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미 방송에 나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회피하고 속인다면 오히려 김을동에게 독이 되면 됐지 득 될 것이 전혀 없다.
물론 개인이 쓴 저작물이라도 여러 사료로 교차검증해서 믿을 만한 자료이면 연구 논문의 근거로 쓰일수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일부 내용이 조작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의 교차검증에서 친정을 미화한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는 정도였고 상당수의 내용이 교차검증에서 들어맞았다. 심지어 현대 의사들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구체적이며 전문의가 아님에도 잘 묘사했다고 논문이 나올 정도여서 갈수록 존중받는 1차 사료이다. 반면 김두한의 회고록과 자서전 등은 역사적으로 존중받는 1차 사료가 아니다. 구체적인 자료로써 인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두한 회고록이 엉터리 내용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김두한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근거로 쓰기에는 문제가 있다. 김두한의 회고록이 사료로써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그 내용이 100% 허위는 아니기 때문이다.[48]
김두한의 양대 저작물이 자신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해서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점만 유념하기로 하자. 요약하자면 큰 줄기는 대략 맞는데 디테일이 꽤 뻥이나 오류가 많다.
본 문서의 하위 문서인 김두한/생애 문서만 하더라도 김두한의 상당수 행적이 오리무중이며, 김두한이 직접 말한 자신의 일대기는 상당수가 윤색, 과장되었거나 또는 김두한에게 유리하게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말은, 김두한 김좌진 가족 사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된다. 김두한이 안동 김씨 문중 또는 김좌진의 다른 유족을 협박하여 자기를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포장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7. 기타


  • 김두한은 학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머리는 매우 좋았다. 실제 증언 심영을 저격할 때 미행했는데 머리를 교묘하게 써서 종로구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인 광교에서 저격을 해 중구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중 어디의 담당구역인지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권모술수에도 매우 능해서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깡패들을 죄다 잡아죽였는데 김두한은 이정재, 임화수 등이 잡혀 죽는 와중에도 자기 조직을 반공청년단으로 바꿔버리고 박정희에게 협조하는 등 놀라운 처세술을 보여 살아남았다. 물론 이때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기도 했고 유신 전이므로 아직은 박정희 마음대로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는 했으나 명백한 박정희 반대파였으며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프락치까지 심어 잡아넣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때 죽지 않은 것은 정말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49]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두한을 "머리, 언변은 좋은데 글을 잘 못 읽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 물론 머리가 좋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정치운은 그리 잘 풀린 건 아니었다.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는 했다만 정작 자유당에 있었을대는 일방적인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며,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도 했다가 결국 거부당하고 이후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국회 오물 투척사건에 나서면서 반 독재투쟁에 나선 인물로 조명받으면서 나름대로 거물급으로 성장하나 싶었지만 결국에는 3선에 실패하고 이후로 재기하기도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거물급 인사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반공을 하면서도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한 양심적인 야당인물로 명예롭게 포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살아생전은 몰라도 죽어서는 이런식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기는 하다. 어떻게 보면 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 드라마대로 가족에게 정말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던지, 김을동은 그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국가유공자 연금을 기부하게 된 걸 알았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 자국이 심했다.
  • 지금이야 한국인의 체격이 서구화되고 영양 상태도 많이 개선되어 성인 남성의 90% 이상이 키 170cm를 넘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김두한이 살아가던 저 당시에는 한국인의 평균신장이 그리 크지 않던 시기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보면 김두한은 거구었다. 2018년 기준으로 보자면 190cm 이상 체격이었다. 당장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지휘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경우만 해도 엄청난 거인으로 묘사되는데 그 맥아더의 키는 182cm였고, 김두한의 아버지 김좌진도 185cm의 장신이다. 다만 당시 동네 주민의 증언과 노변야화 라디오 진행자 권오기,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큰 덩치와 고약한 인상에 비해 손이 아주 조막만하고 예뻤다고 한다.
  • 현역시절 별명은 잇뽕(한방)이었는데 발차기를 상당히 잘 썼다고 한다. 특기가 어깨 짚고 양발차기. 그런데 발차기도 잘 썼지만 실제 김두한이 1대1로 싸움을 할 때 많이 썼던 건 바로 태클을 걸고 마운트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박치기를 하거나 파운딩을 해서 끝냈다고 한다.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남긴 증언을 들어보면 그가 몸무게를 이용한 양발차기를 잘했다고 하는데 드롭킥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드롭킥과 태클에 이은 마운트 모두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체격적 우위를 이용하기 좋은 기술들이다. 반면 구마적같은 경우 김두한이 주장한 자신의 몸무게 25관(93kg)보다도 월등히 큰 30관(112kg)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김두한 본인이 주장한 수치들이니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잡히면 다룽다룽 메달렸다 죽을 정도"였기 때문에 "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 거꾸러졌다 일어나는 것을 눈과 코 사이 급소를 쳐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즉, 구마적이 자신보다 크고 힘이 셌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하지 않고 몸무게를 실은 드롭킥을 날린 다음 헤롱거리는 상대의 안면을 가격해 쓰러뜨린 것. 본인의 묘사대로라면 덩치가 큰 장사체형임에도 굉장히 민첩하고 격투 감각이 뛰어는 사람인 듯 보인다.
  • 인터넷에서는 왜인지 몰라도 김두으로 잘못 알고있는 사람이 많다.
  • 김두한은 회고록이나 라디오 방송에서 등에서 자신이 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과 밀접하게 엮였다며 사실 여부를 따질 수 없는 이야기로 온갖 양념을 쳤다.[50] 그리고 김두한 본인은 사망한 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팔아먹는 이름이 되었다. 김두한보다 한참 어리면서 자신이 김두한의 보스였다던 거지왕 김춘삼이 그 대표적인 예. 김두한과 비슷한 연배인 김동회종로꼬마 이상욱 역시 이런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51]

8. 창작물에서




9.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5
입당

1945 - 1946
우익 전향으로 인한 탈당

1946 - 1947
입당

1947
정당 해산

1947 - 1948
입당

1948 - 1953
합당[52]

1953 - 1954
자진 정당 해산

1954
입당
정계 입문

1954
제명[53]

1954
복당

1954 -1956
제명[54]

1956
입당

195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56 - 1960
입당

1960 - 1965
탈당

1965 - 1966
입당

1966 - 1967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인한 탈당

1967 - 1969
입당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72
정당 재등록

10.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을)

'''8,762 (28.63%)'''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을)

8,987 (23.93%)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

9,593 (18.37%)
낙선 (2위)

1965
11.9 재보궐선거 (서울 용산 국회의원)

'''12,049 (28.4%)'''
'''당선 (1위)'''
'''재선'''[55]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수원)

21,770 (44.97%)
낙선 (2위)

[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생년월일은 선거 때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2] 야인시대에서의 묘사와 달리 호텔에서 쓰러진 다음 자택으로 이송한 뒤 사망하였다.[3] 고혈압으로 사망했다고 한다.[4] 프로필 키 178-180cm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아버지 김좌진도 185cm의 거구였다.[5] 다른 설들은 팩트라기 보다는 추측이므로 기존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신장으로 기재한다 참고로 당시 인물들은 170cm도 나름 건장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본인 증언에 따르면 열여덟살 때 성장이 완성되어 몸무게가 25관(93kg 정도)였다고 하는데, 평균신장이 작던 당시 182cm/93kg이면 그야말로 거인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줄리엔 강 정도 건장한 체격. 그런데 구마적은 (역시 본인 주장에 따르면) 110kg 이상되는 거인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뻥이겠지만 차를 한 손으로 들어 다른 손으로 타이어 펑크를 메꾼 다음 내려놨다고 하니, 어쨌건 둘 다 당시 사람들과 비교도 안되는 거구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 1학년 중퇴.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본인이 밝힌 것이나 관련 자료 부족으로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7] 1986년 사망[8] 1999년 사망[9]김을동이랑 동갑이다.[10]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경동(慶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경민(慶珉)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11]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12]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현동(賢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현성(賢成)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아버지 묘비에는 현성(賢城)이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image][image][13]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서 범동(範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범상(範相)은 (字)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아버지 묘비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14] 두 번째 부인 김부미 사이에서 낳은 딸.[15] 딸의 손자를 이르는 말.[16] 실제 백의사였는지는 불분명하나, 김두한 자신은 후일 "과거 백의사에 몸담았으며, 백의사에서 벌인 활동 가운데 몇몇은 나의 소행이었다."고 회고했다. 야인시대에서는 백의사에 직접 몸담지는 않은 대신 백의사의 지시를 일부 받아 한 것으로 묘사했다.[17] '동두천 주민 학살', '노조원 학살' 등 한둘이 아니며, 모두 김두한 자신이 직접 증언한 것이다. 김두한/생애 문서 참조.[18] 처음은 공천관련으로 행패를 부렸고 두 번째는 사사오입 개헌 관련 사건에서 장경근을 폭행하는 바람에 자유당과 결별했다.[19] 이쪽은 우호적인 관계나 친한 사람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김두한의 성격 때문에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래도 이후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벌인 뒤에는 신민당에 입당해 마지막까지 함께했다.[20] 관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승만이 군직을 주거나 자유당[18]이나 민주당[19]에서 우리와 함께 하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의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것.[21]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 처럼 일제강점기에는 그저 삥뜯는 깡패에 불과했던 김두한이 협객이었다고 왜곡하는 등.[22] 반 이승만 친 김구 단체는 김두한이 김구 아래에서 행한 반공테러는 전부 다 이승만의 부하로 저지른 일이라 왜곡하고, 대통령 종신제 개헌 발의로 인한 장경근 폭행사건, 4.19 혁명 참여 여부를 부정하는 등. 심지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되어있다.[23] 4.19혁명 참여나 종신제 개헌 반대로 인해 벌어진 장경근 폭행 사건도 있지만 전자는 김두한 본인이 자유당의 당차원 보복이 두려워서 참여에 소극적이라고 했고 후자는 어째 야인시대에서만 묘사되어서 반쯤 묻혔다(...).[24] 야인시대에서 묘사되는 '''그 재판 도중에 통조림 통 뚜껑을 이용해 김두한이 할복을 시도한 사건'''이다.[25] 김구가 남긴 글은 1948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김두한의 재판 중 할복시도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에 일어난 정진룡 납치 및 살인사건으로 대한민청의 별동대원들은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고 체포되어 미군정의 법정에 서게된다. 법정에 선 김두한은 자신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나라를 공산당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애국적 동기로 저지른 일들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재판 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김두한이 사실상 퍼포먼스에 가까운 할복을 시도[24]했다.[26] 김구의 발언을 보고 의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구는 대중들의 인식과는 달리 매우 거센 반공주의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김구 문서 참조. 그리고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감찰부장 및 별동대의 행동대장, 김구는 대한민청의 명예회장임과 동시에 김두한에게 호의적이었다. 일종의 상사관계인 셈.[27] 권오기는 노변야화-김두한 편의 진행자이기도 하다.[28]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김두한 순서 이전에 질의를 했고 이후 똥물을 뿌리는 김두한의 테러를 생생하게 목격했다.[29]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게, 광복이후 김좌진의 어머니와 2명의 김좌진 부인들 그리고 안동 김씨 문중이나, 김좌진 후손들 모두 김두한이 김좌진의 장남이라고 인정했고, 호적에도 김좌진 부인이 올렸다. 만약 그 정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근거를 대지 못한다면 뒤엎을 수 없다. 앞에 나온 것들은 친자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중요한 증거물인데 이걸 뒤집을려면 당사자들(김좌진, 김두한)의 증언을 받아내든 아니면 둘의 유전자를 채취해서 유전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방법뿐인데 둘 다 가능할 턱이 없다.[30] 음모론자에 의하면 김두한의 무력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찍은 사진이라고 소설을 사실처럼 말하는 인터넷 자료들도 있다. 즉, 김두한이 1990년대에 이후에 자기가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생길 것을 미리 예언하고 그 증거를 남겼다는 말인 셈이다. 사실 김두한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김좌진 아들로서 지위가 확고했기 때문에 힘으로 강제로 자기 딸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은 1930년대 이후로 생전에 단 한 번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음모론이 생긴 건 1990년대 도올 김용옥이 거의 시초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딸 김을동이 자기 사후에 김좌진 장군 자손 아니라는 의심받을까봐 증거를 남긴 거라는 식이면 너무 억지 주장이다.[31] 김두한의 협박설이 황당한 이유중의 하나가 나혜국 여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김좌진과 결혼한 대단한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귀국 후 일제에 감시당하며 살던 분이다. 안동 김씨 문중 또한 만만치 않다.[32] 이범석은 우익폭력의 거물급 인사로, 당시 이승만 바로 아래 정도의 위상이었다. 특히 군부에 입김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김두한이 아무리 폭력배 부하가 많아도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33] 이는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냐 아니냐는 문제로 발언한건 아니다. 김좌진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제3의 아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아들이 없다는 의미로 말씀하신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을 때니까.[34] 물론 김용옥이 누구 사망을 기다려서 음모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이런 나혜국 여사 생존시에 이런 음모론 자체가 나오기가 참 힘들다는거다. 설사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나혜국 여사 때문에 내뱉지 못하고, 혹은 김용옥이 그 당시에 발언했더라해도 무시당했을것이다. 나혜국 여사 사망이후니까 이런 음모론이 퍼져나갈만한 여지가 생긴것이다. [35] 라디오 진행자였던 권오기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36]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연도 정도는 정확히 기억한다고 하며,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인데 50살이 되도록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게 더 문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주장은 정상적인 가정의 부자 관계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나이 혹은 연도를 기억하는것 자체가 안정된 가정이 없으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어릴 때 학교에 진학하면 학년이 올라가기에 그나마 연도를 민감하게 알 수 있지만, 성장기에 거리에서 살면서 자란 경우 일단 스스로 얻어 먹고 사는 것 자체를 신경쓰느라 올해가 몇 년도인지 자기 나이가 몇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리에서 자라다가 음악가가 된 최성봉의 경우나, 홈리스 인터뷰를 보면, 거리에서 살때는 올해가 몇년인지 나이가 몇인지 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성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어린나이에 거리에서 살았으면 당시의 연도를 상세하게 기억하는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최성봉 인터뷰. 게다가 김두한은 서자이기까지했으니 더욱...[37] 단지, 일제에 대한 쉴드로 '흉적 김좌진 죽다'는 식의 타이틀을 붙이곤 했다. 물론 내용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가장한 친 김좌진.[38] 이 서자가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그 서자의 행적까지 추적하지는 못했다.[39]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단 월간 말지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람이 신문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40] 다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 할지라도 기생과 관계하여 낳은 서자임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 그런 유교적 종법질서가 거의 퇴색했지만, 당시로써는 제법 큰 문제였을 것이다. 본처의 호적에 오르는 것은 그런 정통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실제로 서자 출신의 왕들 역시 명목상으로는 본처 호적에 오름으로 하여 정통성 문제를 땜방했으며, 삼국지의 원소 역시 의붓어머니의 삼년상을 했으니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오숙근이 얻는 것 역시 명백하다. 김두한은 서자가 아닌 적자로써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의붓어머니인 오숙근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줘야 했을 것이며, 국가유공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지원 그런거 없었을 가난한 시대. 돈과 힘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줄 이유를 가진 의붓아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41] 오씨부인[42] 한 기자의 쉴드 이 기자 역시 김두한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반도의용정신대 문제나 해방 직후의 행적들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참고로, 위연홍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해서 김두한 가짜 아들설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기자가 소속한 세계일보이다.[43] 김좌진 장군의 손자 김경민씨가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지금 시대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와 같다”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것만으로도 통탄한 일인데, 우리나라가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이렇게 김경민씨가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친일을 미화할 것이라는 야당의 주자에 동조하고 있지만, 김좌진 장군의 손녀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당내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아직 형체도 없는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라고 낙인 찍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기형아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남매가 반대편으로 갈린 셈이다. 김경민씨는 김을동 최고위원의 이복동생이다 [44] 김좌진의 두번째 아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부인.[45] 김경민씨는 이후 김을동과는 다르게 민족진영에서 활동해서 박근혜 정권 말기에 역사교과서 관련 반대 시위를 했다. 김을동과 김경민은 서로 정치적 방향이 다르지만 모두 김두한의 아들, 딸이 맞다.[46] 이 기사에 언급된 이문창이라는 역사가는 한국 최후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다. 더 쉽게 말하면, 김두한과는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 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김좌진의 만주 행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47] 단, 문화대혁명 당시 민족주의자 성향의 조선족이 탄압받은 것은 사실이다.[48] 김두한 회고록은 김두한이 자기를 김좌진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여러 뻘짓에 대해 미화하고 자랑하기 위해 쓴 것이다. 즉, 김좌진 아들이란걸 주장하는게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이건 이미 증명된 것이기 때문.[49] 바로 이러한 점이 김두한과 이정재의 운명을 갈라놓는 점이다. 김두한은 끊임없이 시국에 걸맞는 처세술과 대처, 재빠른 상황판단을 통해 자기만의 구심점을 형성하여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정재는 김두한과 같이 국회의원을 꿈꿨음에도 권력의 개로 이용만 당하다가 끝내 사형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즉, 김두한의 처세술이나 재빠른 시국판단능력만큼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50] 대한민청에 소속되어있다는 것에서 굵직한 인물들하고 엮인 것 자체는 사실로 볼 수 있으나 밀접한지 여부는 사실확인을 할 수 없다.[51] 우연스럽게도 김두한, 김춘삼, 김동회 셋 다 안동 김씨다. 다만 김두한은 신 안동 김씨고, 나머지는 구 안동 김씨다.[52]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와 신설 합당[53] 총선 공천 탈락으로 인한 난동을 부림.[54]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인한 제명[55]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1966년 9월 24일 의원직 사퇴. 당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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