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김응순은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장로회 신자가 되었고, 191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부터 8년간 황해도 장연군에서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0년 7월 대한적십자사 청년 의용단에 가입한 뒤, 단원 모집과 군자금 모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20년 11월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부터 황해도 장연군 송천교회 전도사로 활동했고, 192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황해도 봉산군 흥수원교회를 담임했다.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 서기를 맡았으며, 1936년 6월부터 황해도 해주제일교회를 담임했고, 1937년 황해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9년 9월 장로회 총회 총대로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1월 22일 <장로회보>에 '신체제하에 신도(信徒)'라는 설교문을 게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 지방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9월 20일 장로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참석했다. 또한 그해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임되었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을 겸임했다. 그는 총회장에 당선된 뒤 교파 합동, 규칙 개정,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일본 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새롭게 산출하여 수립하도록 힘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신체제의 근본 방침은 근위(近衛) 수상의 성명한 것처럼 '팔굉을 일우로 하는 조국의 대정신'에 기하야 세계 평화의 확립을 초래하는 사(事)로써 근본으로 하되, 선(先)히 황국을 핵심으로 하야 일(日), 만(滿), 지(支)의 강고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데 있다. 그 때문에 고도 국방국가의 건설, 외교의 대전환, 국민조직의 재편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중략)
신체제의 지도 이념의 일은 공(公)을 선히 하고 사(私)를 후에 하는, 즉 멸사봉공이다. 이 정신이 아니면 아니 된다. 이 정신이야말로 참 기독교 정신에 일치된다. 곧 희생봉사의 정신인 것이다.(중략) 고로 금번 신체제 출발의 호기회에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용력하여 국체와 모순이 없기를 바란다.
1942년 11월 12일 정인과, 전필순 등과 함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총회 연맹 주최로 '황군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개최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11월 1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 기독교단 제1회 총회 축하사절단을 맡아 김종대 목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 야스쿠니 신사, 메이지신궁 등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1943년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경성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일본정신 체득을 목적으로 한 '노회 대표자 연성회'를 개최하고, 참석자들을 인솔하여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1943년 3월,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전시포교 지침 선언을 반포했다. 그리고 징병제도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여자대표자 연성회를 경성대화숙에서 개최하고 총회장으로서 훈시를 했으며,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해 4월에는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했다.
1943년 5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했다. 그해 11월에는 이동욱, 갈홍기, 채필근 등과 함께 조선 종교단체 전시 보국회 기독교 위원(장로교)으로 활동했다. 1945년 5월 조선 전시종교보국회 주최 지방순회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그해 7월 개신교 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할 때 조선교단의 고문 겸 황해도교구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그는 평안남도에서 목회 활동을 벌이며 기독교연맹 부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탄압이 갈수록 심화되자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월남하여 인천에 정착했다. 1952년 인천 보합교회를 설립하고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을 맡았다. 이후 인천 보합공민학교와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다. 전쟁이 종결된 후 대전으로 이주하여 1954년 대전야간신학교를 설립했다. 1958년 1월 6일 대전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의용단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 및 독립신문 배포 등 독립운동을 한 행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가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 행적을 벌인 것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고, 결국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