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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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 치요다구에 위치한 일본의 신사(神社). 일본 우익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신토를 상징하는 성지(聖地)다.[1] 신토의 신사에는 사당에 토속신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는데, 여러 혼들을 함께 모실 때는 '합사(合祀, 합동제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2019년에 창건 150주년을 맞았다. #
2. 상세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일단 야스쿠니 신사는 '''공식적으로는 일본 정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 종교법인이다.''' 물론 일본 우익들에 의한 국영화 시도는 있었지만, 반대 목소리로 번번히 막혀왔다. 참고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제2차 세계대전 추모 시설은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쾌감을 표한 바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을 비롯한 외국 정치인들도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방문하는 경우가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남녀노소 246만 6,532명의 이름, 본관, 생일, 사망장소를 적은 문서가 봉안되어 있다. 시신이나 유골은 없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범죄자들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신으로 모시는데다 참배하는 일본 정치인들이 있어 대한민국이나 중국 등과 같은 피해국들이 문제시한다. # 이 중에는 일본 제국에 의한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같은 합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논란을 빚고 있다.
유족들은 이러한 종교행위에 거부 의사를 표해왔으나,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적 이유로 묵살해 왔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표면적으론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 시설이고, 합사 문제는 종교의 자유와 연관되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허나 반론 측에선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총리나 장관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주기적으로 참배하는 사실상 국가 시설 성격을 띄는 마당에, 일본 정부가 종교의 자유 문제를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들이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한다. # 쉽게 말해 정치인이 참배하는 것 자체가 전범 청산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태평양 전쟁 전범자들을 추모를 넘어서 거의 신처럼 신격화하고 과거 일으킨 전쟁을 미화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한 공간이다. 그런데 미일관계를 외교의 최우선으로 두는 일본 정부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다. 2014년에는 미국 또한 일본 정부에 우려를 표하며 경고하기도 했다. # 심지어 후술되어 있듯이 덴노도 이곳을 참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일본 특히 우익 정치가 일본 황실과도 무관하게 국가신토와 연결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
1867년 말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일어나 에도 막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덴노가 이끄는 조정은 100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실제 국정에는 손을 놓았기 때문에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결여되었으므로 거의 대부분 막부 시절의 인사와 조직이 실무행정을 맡았다. 또한, 막부는 형식상으로는 대권을 덴노에게 반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교권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실제적인 권력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막부 세력과 반(反)막부 세력의 갈등이 점점 커졌다.
결국 1868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 5개월에 걸쳐 무진전쟁이 일어난다. 이때 메이지 덴노는 반막부 세력을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막부군이 패배하고 사쓰마 번 등 반막부 세력이 승리하여 새로이 조정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아직 무진전쟁 중이던 1868년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2] 은 에도 성을 접수하고 (음)4월에 자군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해 (음)5월에는 교토의 태정관 명의로 포고령(布告令)이 내렸는데, 1853년 쿠로후네 내항 사건 이래 순난자(殉難者)의 영혼을 제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포고령은 야스쿠니 신사 창건에도 영향을 끼쳤다.[3] 이 해에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을 내려 불교와 신토가 습합된 기본 일본 종교계를 불교화 신토로 강제로 나누도록 했다. 이 시기에 일본 전역에서 많은 불상과 법구, 사찰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이 강제환속되었다.[4] 국가신토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무진전쟁이 끝난 1869년 (음)6월 12일, 메이지 덴노는 나라를 위해 싸운(친덴노적인) 전사자들을 위해 위령시설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달 29일,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임시시설을 만들어 군무관지사(軍務官知事)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小松宮彰仁親王)[5] 이 신관이 되어 무진전쟁에서 사망한 정부군 사망자 3588위를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이때부터 야스쿠니 신사가 시작했는데, 창건 당시에는 도쿄 쇼콘사(東京招魂社)라 이름하였다. 즉, 혼을 불러[6] 진정케 하는 절이다. 사실 쇼콘(招魂), 즉 초혼(招魂)이란 단어는 음양도 계통에서나 사용할 뿐,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았다. 굳이 쇼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 기존의 일본 종교시설과는 뭔가 다르게 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본전(本殿) 건물은 1872년에야 완공했다.
일본의 기존 전통에서는 일단 전쟁에서 승리하여 위령제(慰靈祭)를 지낸다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공양하였으나[7] , 쇼콘사는 명백히 막부 측 전사자를 배제하였다.
1870년, 메이지 덴노는 '''대교선포(大教宣布) 칙령'''을 내렸다. 이는 국가신토를 일본의 사실상 국교로 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
1871년, 도쿄 쇼콘사가 일본 황실의 문장인 국화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또한 이해부터 일본 정부는 일본 각지의 중요한 신사들을 관폐대사(官幣大社), 국폐대사(国幣大社), 관폐중사(官幣中社), 국폐중사(国幣中社), 관폐소사(官幣小社), 국폐소사(国幣小社) 순으로 나누어 관리했다.[8] 여기서 관폐사와 국폐사가 나뉘는데 천황가에서 유지비를 대고 신에게 폐백을 바치는 곳이 관폐사, 일본 정부 차원에서 유지비를 대고 폐백을 바치는 곳이 국폐사였다. 관국폐사 중에서 격은 격은 당연히 관폐대사가 가장 높고 국폐소사가 가장 낮았다.[9] 이렇게 일본 전역의 신사에 등급(격)을 매겨 관리하는 것을 '사격(社格)제도'라고 하였다.
1872년, 중요하긴 한데 기존의 사격제도에 잘 맞지 않는 신사가 있다는 이유로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 등급을 따로 만들어 관폐소사에 준하여 대우했다. 별격관폐사로 지정된 신사들은 '천황의 충신'을 제신(祭神)으로 모셨다. 별격관폐사 등급을 만든 뒤 처음으로 지정한 시설이 14세기 초 일본 남북조시대 사람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모시는 미나토가와(湊川) 신사[10] 라는 점에서도 별격관폐사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79년 6월, 국가신토의 상징답게 신사로 개편하면서 이름도 야스쿠니(靖國),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신불분리령, 대교선포 칙령도 내렸는데, 불교스러운 이름을 사용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확실히 신사(神社)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었다. 야스쿠니(靖国)는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같은 뜻으로 야스쿠니(安国)를 사용했다. 하지만 安国이 사찰 이름로 자주 쓰이는 등 불교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좌씨전에서 나온 야스쿠니(靖国)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1879년, 야스쿠니 신사가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어 정식으로 '중요신사'라는 공인을 받았다. 하필 '별격관폐사'라는 데에서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87년, 야스쿠니 신사의 관할주체가 육해군성으로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육해군성뿐만이 아니라 내무성까지 3자가 공동으로 관할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1년이 지난 1946년 2월, 종교법인령이 공표되어 사격제도가 폐지되고 국가신토가 제도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9월 야스쿠니 신사는 민간종교법인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신사본청(神社本庁)의 관할을 받지 않는 특수한 신사로 남았다.[11] 1947년에 평화헌법이 공표되면서, 헌법의 종교자유 조항에 따라 일반 신사들은 압류된 재산 등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지방의 호국신사들은 제외되었다.
GHQ가 해산되고 일본이 다시 독립국이 된 1952년 10월에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 부부가 패전 이후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유족회는 패전 이전 야스쿠니 신사가 별격관폐사였을 때처럼 정부에게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12] 또한 일본 유족회는 오모토에서 갈라진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 신사본청 등 관련 종교단체는 물론 우익단체까지 끌어모아 야스쿠니 국영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GHQ 시절에 철거된 충혼비 등을 복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스쿠니 신사와 자위대가 서로 노골적으로 결탁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1967년 일본 자민당에선 야스쿠니 신사의 종교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유는 헌법이다. 일본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 때문에 종교단체 야스쿠니를 국영화할 수 없다면, 종교단체가 아니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본청이나 유족회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 또한 무산되었다.
자민당은 방책을 조금 바꾸어, 1968년부터 1973년까지 5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특수법인화하는 시도를 했다. 이는 평화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하기 때문에, 민간종교단체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화할 수 없다면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국영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반대세력,[13] 종교계에 의해 뜻을 접어야 했다.
4. 제신
4.1. 합사된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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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것은 '''전범''' 문서로 갈 것. 아래는 '''A급 전범'''만 나열.[15] 도쿄 전범 재판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사람들(평화에 대한 죄)이다.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며 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표시는 순국7사묘와 중복 합사된 전범이다.
- 도조 히데키⚠️(1884.12.30.~1948.12.23.) 제40대 일본 총리이자 결정적으로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주범.
- 기무라 헤이타로⚠️(1888.9.28.~1948.12.30.) : 왜 야스쿠니 신사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는 항목. 그나마 다른 전범들은 그래도 제노사이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이 자는 제노사이드를 직접 주도했다. 관동군 참모장(1940~1941), 육군대신(1941~1943), 육군최고고문(1943), 버마 파견군 사령관(1944~1945). 그냥 사람이 아니다. 이 놈이 저지른 학살은 난징대학살, 싱가포르 학살, 바탄의 행진, 산다칸 행진, 마닐라 대학살을 다 더해도 모자랄 지경. 오죽하면 같은 A급 전범들한테도 사람 취급을 못 받았을 정도다. 참고로 이 자의 별칭이 '버마의 도살자'다.
- 도이하라 겐지⚠️(1883.8.8.~1948.12.23.) : 관동군 사령관(1938~1940). 중국의 화북분리공작에 관여하였으며 포로 및 피억류자들에 대하여 야만적으로 대우하였다. 특히 삼광작전이라고도 불리는 신멸작전의 주동자로 악명이 높다.
- 이타가키 세이시로⚠️(1885.1.21.~1948.12.23.) : 만주사변을 기획하였으며, 일제의 중국 침략에 관여하였다.
- 마쓰이 이와네⚠️(1878.7.27.~1948.12.30.) : 1937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당시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16]
- 무토 아키라⚠️(1892.12.15.~1948.12.30.) : 중국파견군 참모장(1937), 육군성 국무국장(1939~1942),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단장(1942~1943), 필리핀 방면군 참모장(1944~1945). 광범위한 지역의 침략과 난징대학살을 포함한 중국의 일련 사건들까지 폭 넒은 책임을 물었다. 다만 침략전쟁에 앞장선 죄는 있으나 마쓰이 이와네와 마찬가지로 학살 혐의와는 관련이 없다.
- 우메즈 요시지로(1882.1.4.~1949.1.8.) : 관동군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냈고, 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 마츠오카 요스케(1880.3.3.~1946.6.26.) : 일본 제국의 전 외무대신(1940~1941). 국제연맹의 탈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1937년 남만주철도 총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와의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1941년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 소련 개전을 주장하였다. 대미정책에서도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 진행 중 병사하였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1867.9.28.~1952.8.22.) : 추밀원 의장(1936, 1945), 제35대 총리대신(1938.1~8), 내무대신(1940.12.~1941.7.)을 지내며 히로히토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신토를 장려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가주의 우익 단체 국본사를 조직하였다. 복역 중 1952년 초 석방되었으나 그 해 병사하였다.
- 나가노 오사미(1880.6.15. ~ 1947.1.5.) : 일본제국 38대 해군대신 당시에 진주만 공습을 승인한 사람으로, 체포는 되었지만 스가모 형무소에서 판결전에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으로 사망했다.
- 도고 시게노리(1882 ~ 1950)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이 인물은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라는 점 등 때문에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되려 명단에서 빼라고(...) 요구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5. 조직
야스쿠니 신사는 시립신사로 신사본청과 포괄적인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수호신사며, 언젠간은 국가에 반환될 것이며, 특정한 종교법인의 포괄적인 관리 하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야스쿠니 신사-신사본청 쌍방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한다.
5.1. 내부 조직
야스쿠니 신사에는 2005년 1월 기준으로 총 108명이 재직하고 있으며, 조직에는 부서도 있다.
- 제무부
- 제의과
- 조사과
- 총무부
- 총무과
- 인사과
- 관리과
- 광보과(흥보과)
- 선덕부
- 숭경봉찬과
- 선덕과
- 경리부
- 경리과
- 사업과
- 유슈칸부
- 사료과
- 전시과
- 문고실
- 사무실습생
6.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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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 쩌는 도쿄 중에서도 비싸디 비싼 치요다구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목적을 보면 왜 거기 있는지 이해가 간다. 황거(고쿄)[17] 도 코앞이고. 야스쿠니 신사 건너편에는 일본무도관이 있다. 또한 근처에는 꽤 유명한 가톨릭계 명문 여학교인 도쿄 시라유리 여학원이 있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본부와도 꽤 가깝다.
교통편으로는 쿠단시타역이 가장 편리하고, 이다바시역, 이치가야역에서 가까운 편이다. 사실 JR그룹노선 역에서 걸어가기엔 꽤나 멀어서[18] , 쿠단시타역을 이용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쿠단시타역에서 나와서 입구로 들어가면 길 가는 동안에 정말 커다란 토리이 몇 개가 서 있다. 길 가운데에는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인 쇼콘사의 제안자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을 지나면 횡단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는데 가끔씩 그곳에 우리가 아는 극우 트럭들이 줄줄히 선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극우라고 해서 개개인의 관광객에게 일일히 간섭하거나 터치하진 않는다. 작은 길을 건너면 본전 앞으로 갈 수 있는 토리이가 있다.
본전에서 오른쪽 방면으로 가면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전시관이 존재한다. 위 사진에서 본전이 있는 토리이 안쪽을 관람하는 게 꺼림칙하다면 유슈칸만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되도록이면 보고 가는 것을 추천하는데, 일본 근현대 전쟁 역사에서 실제 쓰였던 전쟁 물품[19] 이나 방대한 기록서적이 남겨져 있어 일본의 전쟁미화와 군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꽤 일으킬 수 있다. 카드 결제가 가능하며, 입장료는 1천 엔이다. 전시실 내부가 꽤나 방대하므로 분 단위로 코스가 나뉘는데, 슥 둘러만 봐도 최소 30분이며 꼼꼼하게 둘러본다면 최대 3시간 정도 관람시간이 소요된다. 다큐 영화까지 본다면 한나절은 걸린다.
위의 사진에도 잘 보면 참배하는 곳 바로 옆에 일본 경찰이 지키고 있다. 신사를 노린 일련의 범죄 행위를 막는 것이 목적이긴 하나, 실상은 참배하는 참배객들이나 관광객들의 야스쿠니 반달 행위를 제지하는 게 주 업무인 듯하다. 보통 신사 안쪽을 정면으로 사진 찍거나 도리이 안쪽에서 물 마시고 취식하는 행위를 제지한다. 특히 신사 주위에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는데 2인조 경찰이 항시 순찰한다. 일부 시간대를 제외하면 워낙 인적도 드물고 핵심 시설 주변이라 그런지 꽤나 보안에 신경 쓰는 듯한 인상을 받으니 참고하는 게 좋다.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다가는 괜히 불심검문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7. 외국인의 방문 및 참배
유럽의 극우파, 와패니즈 성향 서양인들이 간혹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오기도 한다.# 특히 서양 극우파들은 일본 극우파들과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는 관계이기때문에 야스쿠니 신사가 서양 극우 세력들의 일본 방문시 필수 코스가 된 상황. 장 마리 르펜등이 2010년 참배하러 온 후 외국인들이 종종 야스쿠니 신사에 온 후 참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도쿄 대공습으로 죄없는(?) 일본인들을 죽였다며 사과하러 왔다는 미국인 와패니즈도 있고 토니 마라노등 혐한 성향 서양인도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
위구르 족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독립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가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1980년대에 달라이 라마도 이곳을 참배한 전적이 있는 걸 보면, 단지 전몰자들이 모셔져 있다는 것 때문에 이곳의 진상을 모르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참배했을 가능성도 있다.[20]
2014년 캐나다의 가수 저스틴 비버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신사 앞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팬들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자 저스틴 비버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저스틴 비버는 "순전히 기도하는 장소로만 잘못 생각했고, 내가 마음의 상처를 준 모든 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입장을 밝혔다.#
참배 목적은 아니지만 관종짓을 하려는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들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는 이유로 신사에 방문하려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주변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를 노린 방화나 폭발 테러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이 근방 지역을 여행할 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날고 기는 극우 세력들이 종종 결집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인 데다가, 본 신사를 참배하는 극우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봉변당할 위험성도 커졌다. 특히 이 근처를 지나는 한국,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에게 별 이유없이 달려들어 시비를 거는 일도 종종 생겨, 관광시에도 웬만하면 이곳엔 접근하는 것을 삼가는 게 좋다. 외교부에서도 "일본 지역에 거주하시는 우리 국민들, 일본 지역을 방문할 예정인 우리 국민들께서는 야스쿠니 신사 및 일본 우익들의 시위 현장에의 접근 자제, 불필요한 대응 자제 등 신변 안전에 최대한 유의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라는 문구로 해당 신사에 접근하는 걸 자제토록 권고한다.
8. 논란
9. 사건사고
10. 기타
- 일본 극우하면 생각나는 검은 트럭에 '천황 폐하 만세' 문구를 새기고 욱일기를 꽂고 달리는 사람들이 입구에 많이 죽치고 있다. 하지만 극우들이 중요시하는 그 천황은 쇼와 덴노(히로히토)조차도 해당 신사에 전범 위패가 안치되는 순간부터 방문을 거부했다. 히로히토의 장남 아키히토 상황도 퇴위할 때까지 절대로 가지 않았으며, 아키히토의 장남 나루히토 덴노도 그러한 의지를 받아서 참배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다만 아키히토의 사촌동생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행사 참석 등의 우익적 행보를 보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아버지의 우익적 행보를 이어서 하고 있다.
- 2010년 12월 카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유물 특별 전시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1층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갑옷과 투구를 전시했다. 조선시대 갑옷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고 투구에는 군최고통수권자인 '元帥(원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 갑옷에는 용, 기린 등이 새겨져 있어 왕의 갑옷으로 추정된다.[21] 이들 옆에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글을 내걸고 있다. #
- 일본에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라는 명랑한 이름의 초정당 단체도 있다. #
- 서브컬쳐 관련해서는 소니애니가 이것과 관련된 요소를 넣어서 국내 방영사인 애니플러스가 방영중지를 하는 등 논란이 꽤 있었다.
- 포켓몬 GO가 일본에 출시되면서 중국인 트레이너가 이곳과 일본 국회의사당을 2200-2400대 망나뇽으로 점령했다가, 한국인 플레이어가 ABEISASSHOLE[23] 이란 이름의 망나뇽으로 탈환한 바 있다.
[1] 일부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를 '紳士(Gentleman)'로 오해하기도 한다. 2013년 SBS 8시 뉴스의 야스쿠니 신사 관련 보도에서 취재 도중 인터뷰에서 실제로 나온 발언이다. #[2] 이 사람은 걸판의 성지 오아라이 이소사키 신사 도리이에 있는 현판을 쓰기도 했다.[3] 이 포고령에 의하여 교토의 히가시야마산(東山)에 순난자들을 기리는 신사를 세웠는데, 오늘날 교토 료젠 호국신사(京都霊山護国神社)이다.[4] 흔히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고 하는데, 1871년까지 극심했고 1877년쯤 되어야 끝났다.[5] 寺宮嘉彰親王이라고 쓰기도 한다.[6] 국어에도 혼을 부른다는 의미로 똑같이 초혼(招魂)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김소월의 시 <초혼>이 잘 알려졌다. 비슷한 단어로 청신(請神) 등이 있다.[7] 원한을 품은 영혼이 세상에 재앙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군 전사자라도 원한을 품으면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당연히 같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8] 국폐소사 밑으로도 각 행정단위별로 해당지역을 대표하는 신사를 하나씩 지정했다. 지방의 작은 신사 중에는 아무 격도 받지 않은 곳도 있었는데, 이런 곳을 무격사(無格社)라고 하였다. 사실 일본 전체에 있는 신사들 중 숫자로는 무격사가 대부분이었다.[9] 이세신궁은 너무 존엄하다 하여 아예 이런 등급을 매기지 않았다.[10] 효고현 고베시에 있다.[11] 여타의 어지간한 신사들은 신사본청에 소속된다.[12]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일본 유족회이다. 당시에는 일본유족 후생연맹이라 하였다. 전몰자 군인을 기리고 유족의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13] 주로 좌익 세력으로 일본 공산당, 반 천황 연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피해자문제 대책위원회하고도 연계) 등이었다.[14] 일본에서는 귀신이나 신령을 세는 단위로 柱를 쓰지만, 한국에서는 위(位)를 쓰므로 '위'라고 하였다.[A] 단 막부군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군인은 제외.[B] 사이고 타카모리와 사쓰마군은 대상외.[15] 평화에 대한 죄. A급 전범이 B, C급 전범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분류 기준이다. 즉, 어쨌든 A급·B급·C급 모두 전범이고, 내용을 살펴보면 B급과 C급은 학살이나 살해에 관한 죄라서 죄질이 상대적으로 더 나쁘다.[16]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날 당시 결핵으로 병가 중이었기 때문에 학살을 주도하지 않았고, 학살이 일어나기 전 민간인은 절대 죽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실제로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사람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이 자는 메이지 덴노의 사위이기도 하다. [17] 고쿄가 지요다구 한가운데 있다. 위치상으로 보면 고쿄의 북서쪽으로 일본무도관이 있고 도로를 경계로 북서쪽에 야스쿠니가 위치해 있다.[18] 도보로는 대략 15~20분 정도.[19] 전쟁 후반부에 쓰인 자살특공병기의 실물 혹은 모형이 몇 점 있다.[20] 이 점은 사실 일본 우익인사들이 전반적으로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점도 한 몫했다.[21] 고려 갑옷으로 보는 것에 이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밑의 기사에 나온다.[22] 지금은 비공개 처리되었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방명록 노트 위에 야스쿠니 신사와 거대한 로봇을 합성한 일러스트를 그리고 NO!! WAR!!! NO!!! YASUKUNI!!!라고 그 아래에 크게 적어놨다.[23] 직역하면 아베는 똥구멍, 즉 '아베 개XX'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