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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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진성은 1892년 7월 15일 평안도 덕천군 좌양면 좌양리(현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에서 아버지 김형률(金亨律)과 어머니 전주 김씨 김기정(金基鼎)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 초에 하얼빈의 러시아군 사령관 호리왓트 대장과 연락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동지 유동열·신영삼 등과 함께 한인 2세 8백여명을 모집하여 동청철도수비대(東淸鐵道守備隊)에 편입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하얼빈 러시아군의 용병으로서 오성만(吳成萬)·김창연(金昌連)·송일훈(宋一勳)·이승무(李昇武) 등과 함께 의용병(義勇兵)을 조직하여 실전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취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으나 유동열·양기탁 등의 석방운동으로 2개월만에 출옥하였다.
그후 전남 광양 지방의 지주들로부터 군자금 7천원을 모금하여 양기탁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에는 격문 천여매를 만들어 배포하고자 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교우(金敎雨)·김한규(金漢奎) 등과 함께 고산의 부호 고갑준을 설득하여 현금 9,600원을 받아 상경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고 하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8.15 광복 후 귀환하여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8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진성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수해공파 2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