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유동열
柳東說'''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9년 3월 26일
평안도 박천군 군내면 남부리 매화동#
(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매화동)
<color=#fff> '''사망'''
1950년 10월 18일
평안북도 희천군
<color=#fff> '''묘소'''
애국렬사릉
<color=#fff> '''본관'''
문화 류씨#
<color=#fff> '''호'''
춘교(春郊)
<color=#fff> '''이명'''
유동열(柳東烈), 유동열(柳東悅), 유청송(柳靑松)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실력양성운동
2.3.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2.3.1. 청도에서의 활동
2.3.2. 신한혁명당
2.3.3. 한인사회당
2.3.5. 고려공산당
2.3.6. 조선혁명당
2.4. 광복 후의 행적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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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대한제국 군인관료 출신으로 미군정기 군인관료까지 직무를 수행하였다.

2. 생애



2.1. 초년기


유동열은 1879년 3월 26일 평안도 박천군 군내면 남부리 매화동(현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매화동)에서 부친 유종정(柳淙楨)과 모친 최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가문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는 현존하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숙부는 정3품으로 박천부비대장을 역임했으며, 종형인 유동작(柳東作)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여 한성재판소 검사를 역임한 엘리트였다.
그는 어렸을 때는 집안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19세 되던 1898년에 2살 위인 사촌형 유동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898년 10월 3일 일본의 성성학교(成城學敎)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육군장교생도를 양성하는 사립예비학교였다. 그는 이 학교에서 3년간 교육받고 1901년 11월 1일에 졸업한 뒤 사관후보생으로서 도쿄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군대 업무를 익혔다.
1902년 12월 1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제15기생으로 기병과에 입학했다. 1903년 11월 30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으로서 도쿄 근위사단 예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근위사단이 대한제국으로 출병하게 되자 일본군 견습사관의 신분으로 따라갔다. 대한제국에 도착한 그는 대한제국 육군기병참위에 임관되었으며, 원수부 관전하장교라는 직함까지 맡아 자유로이 일본군을 시찰할 수 있었다.
만주까지 종군한 유동열은 1904년 8월 본국으로의 귀환을 명받고 귀국하여 8월 12일 무관학교 학도대로 보직되었다. 1905년 3월 육군기병부위로 승진했고, 10월에 육군기병정위로 승진하면서 대한제국 군부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군사교육기관에 한정된 직책에 불만을 품고 군정기관에 진출하고자 일본육사 동기생들과 함께 비밀결사 효충회(效忠會)를 결성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뒤, 효충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구국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퇴위당하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 이갑, 이동휘 등 일본 육사 출신의 고급무관들이 주축이 되어 무력항쟁과 친일파 대신 암살 등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실패했다.
1906년 7월 여단사령부 직할부대장에 봉직하고 1907년 군무국 마정과장을 지냈던 유동열은 이 사건에 연루되자 군부를 떠났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2.2. 실력양성운동


1906년, 유동열은 서우학회에 평의원으로 참석했다. 서우학회는 교육진흥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꾀했다. 그는 서우학회에 30여간의 가옥을 기증하여 서우학회 회원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고, 직접 <서우>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번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을 설명하면서, 우리 동포들이 현실을 인식하고 미국과 같이 근면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의 기상을 가지고 용감히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
1907년 4월, 그는 서우학회의 몇몇 주도회원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앙에 결의기관과 집행기관을 두고 총감독에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휘, 재무에 전덕기, 집행원에 안창호 등이 선임되었고, 유동열은 이갑, 김구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신민회 교육운동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입헌군주국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행해진 것으로 보이며, 유동열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동열은 서북학회에서도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서북학회 내에 실업부를 설치하기 위해 조직위원으로 참여하여 세부적인 규칙 운영 등을 제정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였고, 척식회사 성립에 반대하며 1,000만원의 국채를 탕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무렵 일제는 그를 배일사상의 고취에 힘쓰는 위험분자로 여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와 면담하여 70여 통의 익명투서를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의 평소 행동에 정도에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후에라도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이다."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역시 유동열을 회유했다.

"군의 행동에 있어 여러 풍설이 있어 주의를 끄니 한국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차라리 일본으로 가서 유학생의 감독을 겸하여 하숙업을 하면서 살다가 국내가 조금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 서북학회를 이끌며 한국의 발전에 진력하라."

유동열은 박천을 방문했을 때 숙부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이 매우 곤란하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1909년 3월 1일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4월 일본에 유학하는 한인 학생들의 단체인 대한흥학회 본회에 참석하여 학생운동을 격려했다. 그러다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급전을 받고 3개월만인 1909년 6월에 귀국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부친이 사망한 뒤였다. 1909년 8월 부친의 묘를 참배한 그는 경성으로 돌아간 뒤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1909년 10월 초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안창호, 이갑, 이강과 합류한 뒤 독일의 조차지인 청도를 근거지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2.3.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2.3.1. 청도에서의 활동


유동열은 이갑, 이강 등과 함께 텐진을 거쳐 독일기선 편으로 청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움이 될만한 인재들을 포섭하려 했다. 독일 선교사를 방문하여 청도에서의 활동에 대해 협조를 구했고, 독일 총독과의 면담을 주선받았다. 이때 유동열은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의 간행에 대해 협조를 구했지만, 총독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순순한 종교잡지가 아니면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그는 잡지를 출간할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1910년 4월,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향과 방략을 논의하기 위한 청도협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만주로 가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과 개전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 동포를 조직, 훈련하면서 신력을 기르면서 장래의 기회를 기다렸다. 유동령은 이 중 만주에서 광복군을 조직하는 것에 동조했다.
논의 결과, 이종호가 3천 달러의 자금을 내고 지린성 밀산현에 땅 10리 평방 가량을 사서 개간하며,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유동열은 이갑, 김희선과 함께 군대 교련을 맡기로 했고, 신채호가 일반 교양교수를 맡았고, 김지간을 토지경영을 책임지기로 했다. 유동열은 9월에 밀산현에 도착하여 계획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이종호가 자본금의 출자를 거부하면서 좌절되었다.
이갑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마련에 착수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치안방해죄를 적용받아 구류되었다가 1910년 12월 26일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고,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윤치호, 안태국,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방면된 뒤,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2.3.2. 신한혁명당


중국으로 망명한 유동열은 청도에서 성낙형과 함께 신문과 잡지 간행을 위해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청도로 진격하자, 그는 일단 베이징으로 피했다가 1915년 3월 상하이로 이동했다.
1915년 3월, 유동열은 상하이 영국 조계지에서 성낙형, 박은식, 신규식, 이상설, 이춘일, 유홍열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앞으로 독일과 일본이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를 조국 독립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고자 했다.
신한혁명당은 당수로 고종황제를 추대하려 했다.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중국과 독일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는데, 원조를 얻기 위해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을 표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동열 역시 제정파 인사로서 고종을 상하이로 망명시키기 위한 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신한혁명당 교통부장의 직책을 맡은 그는 1915년 5월 초 성낙형과 함께 봉천과 서간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들을 모았다. 그러나 1915년 7월 신한혁명당 외교부장 성낙형이 고종을 알현하여 중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아오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고종 망명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유동열은 신한혁명당 본부가 있는 베이징으로 귀환하여 차기 계획을 모색했다.

2.3.3. 한인사회당


1918년 3월,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가 열렸다. 대회에는 준비위원장인 이동휘김립, 유동열, 양기탁, 이동녕, 홍범도, 김성무, 박애, 안정근 등 연해주와 중국의 유력한 한인혁명가들이 참석했다. 이동휘는 이 회의에서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조선의 무산계급정당을 조직하여 조선민족해방운동을 볼세비즘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자고 제안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동휘의 제안을 둘러싸고 2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우파 그룹은 이동녕 등의 민주주의적, 또는 입헌군주제적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순수한 독립운동만을 위해 코민테른으로부터 후원만 얻자고 주장했다. 반면 좌파 그룹은 볼세비즘에 찬동하고 볼세비키 세력과의 밀접한 연대를 강조했다. 유동열은 개인적으로는 우파 그룹과 비슷한 정치 관념을 품었지만, 이 회의에서는 좌파 그룹의 주장을 찬성했다. 그는 볼세키비, 민주주의에 별 상관없이 한국 독립에 유리한 쪽이라면 그곳에 몸담기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이동휘를 도와 한인사회당의 창당에 협조했고, 1918년 6월 26일 정식창립을 위한 중앙위원회 확대총회에서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당의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을 맡은 유동열은 김립과 이한영이 설립한 진문사(晋文社)에서 한글번역 업무를 맡는 등 한인사회당의 출판활동에도 힘썼다.
한인사회당의 무장부대 편성사업은 조선인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동열은 우선 병력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극동소비에트 당국의 지원하에 하바로프스크에 설립했으며, 남만주 유하현에 설치된 소규모 독립군 사관학교에서 재학중이던 학생들을 이동시켜 이에 편입시킬 방침을 세웠다. 또한 홍범도가 이끌던 의병대도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기로 내정되었다.
1918년 10월 2일 일제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유동열은 홍범도, 이범윤, 전일 등과 서로 연계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울 동지들을 모집하기 위해 우수리스크 철도연선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모집 인원은 대략 150~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18년, 유동열과 전일은 하바로프스크에서 각 100여 명을 인솔하여 일본군, 러시아 백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약 30명이 전사했고, 하바로프스크는 러시아 백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유동열이 속한 한인사회당은 근거지를 잃었고, 유동열은 연해주를 탈출해 이동휘와 함께 만주로 피신하여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4월, 볼라디보스토크 교오의 삼림 속에서,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재기를 노리기 위해 한인사회당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1919년 3월 혼춘에서 창단된 신민단과의 통합을 이루었다. 1919년 11월 4일자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신민단은 김규면이 조직하고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두었는데, 약 8,000명에 이르는 단원 모두가 예수교이며 그 수령은 유동열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유동열은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 이후 신민단 고문의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1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밀양폭탄사건' 예심에서, 피고인 황상규는 "1919년 4월에 길림에 있는 유동열이 주재하는 조선독립군정사의 회계과장이 되어 독립운동에 진력했다."고 진술했다. 이로 볼 때, 유동열은 1919년 4월 길림군정사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3.4.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출현했다. 이때 유동열은 한성임시정부의 참모부장으로 추대되었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참모장,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참모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유동열은 이들 정부에 취임하지 않았다. 아마도 단일정부의 출현을 기다리며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동휘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그는 그곳과 연계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8월, 유동열은 부하 전삼덕(全三德)을 상하이 임시정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 군정사 상황을 보고하면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직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바로 상하이로 가지는 않았다. 그가 상하이로 간 것은 군정사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한 1919년 12월인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12월 13일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길림의 독립파는 독립단을 유지하기 곤란하여 염려하는바 유동열 일파는 근래에 해산하여 만주, 조선일대에서 의연금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1920년 1월, 유동열은 성명서를 발표해 일본의 비인간적이고 잔악한 행위와 동포의 비참한 현실을 언급하면서, "독립군들이 군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군사독판 겸 참모총장 유동열'이라는 서명을 했다.

2.3.5. 고려공산당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참모총장으로 활동하던 유동열은 1921년 4월 15일 사표를 제출하고 연해주로 향했다. 1921년 5월 4일에서 17일에 걸쳐 이르쿠츠크에서 제1차 고려공산당 대표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은 동양비서부와 협의하여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에 카란다시빌리, 군정위원에 유동열, 최고려를 선임했다.
유동열을 비롯한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6월 6일 자유시 근처의 스보브드니로 이동하여 상하이파의 사할린의용대와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사할린 의용대는 이에 불응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군정의회군과 마찰을 빛었다. 이에 고려군정의회군은 강압적으로 사할린 의용대를 해산시켰고, 이로 인해 자유시 참변이 벌어졌다. 흑룡주 지방의 한인들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졌다. 유동열은 이런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르쿠츠크에서 대다수의 한인군대를 양성하여 일본군 철군시 기회를 보아 한국으로 징공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하지만 흑룡주의 한인들은 고려군정의회는 러시아의 원조를 받고 있으며, 유동열 등은 단지 의회에 몸을 담을 뿐 군을 통솔할 실권이 없으므로 군대의 진퇴를 좌우할 수 없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유동열은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고려군정의회로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했으나, 목적에 치우친 나머지 앞으로 벌어진 일을 예상하지 못해 참극을 빛어내고 말았다.
이후 그는 무장투쟁을 위한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흑룡강성 연안의 흑하에 근거지를 두고 중국령과 연해주를 오가며 공산주의 선전에 열중했다. 1921년 9월 14일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유동열은 만주 지방에서 공산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할 계획을 가지고 8월 20일 부하 20명을 길림으로 데리고 와서 공산당 총부를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2년 5월 2일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흑하시에 거주하면서 4월 초순 길림성 액목현에서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는 선전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부터 인쇄기계를 구입하여 공산주의 서책 및 선전문건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또한 연해주 및 흑하 부근의 무장단체를 돕기 위해 동녕현의 중국 마적과 연계하여 대일투쟁을 벌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22년 5월 2일 일제 정보문서에 따르면, 그는 한인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조선독립선언 후 4년간이 흘렀다. 상해임시정부는 하등의 주의방침이 없고 오직 형식에 얽매여 서로 간에 정권을 다투고 있다. 나는 러시아 및 북만주 국경에 있는데, 동포들이 상해임시정부에 반대하여 러시아 공산당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자가 되면 노국공산당으로부터 선전비를 받아 공산주의의 확장에 힘쓸 수 있다.

(중략)

적어도 조선국이 중요한 위치에 있으려면 마땅히 공산주의를 주장하여야 한다. 장래 세계에는 한 나라가 있을 것이다. 인종차별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으며, 후세에도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1922년 10월 28일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유동열은 군자금을 모집한 뒤 그 자금으로 러시아에서 병기, 탄환을 구입하여 친일 조선인 및 조선독립운동에 방해되는 관리를 암살하려 계획했다고 한다. 또한 연해주에 기관총 5문, 소총 500정, 탄환 5만발, 기타 군수품을 다수 보관하다 만주로 옮겨서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점차 러시아 공산당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에게 원조를 얻는 만큼 심한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그에게 군무총장직을 제의했다. 유동열은 이를 수락하여 1922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취임했다. 그 직전인 1922년 8월에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이 통합된 대한통군부의 군정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통군부가 의군부, 참의부로 갈라섰을 때, 그는 임정 산하의 단체가 된 참의부와 행보를 같이 했다. 그는 1924년 4월까지 군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참의부의 조직 정비와 함께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24년 4월 군무총장직을 사임한 이후 1929년 조선혁명당에 가담했을 때까지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만주 일대에서 3부 통합운동이 일었을 때 어떠한 형식으로든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6. 조선혁명당


1929년 9월 국민회 제1회 중앙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세계 정세 및 조선정세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결집시켜 제국주의 박멸과 조선의 절대독립을 역설햇다. 특히 사회주의 이념을 어느정도 수용하여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정권을 건설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나아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때 유동열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조선혁명당은 더이상 만주에서 활동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조선혁명당은 유동열과 최동오를 중국 관내로 파견했다. 두 사람은 우선 관내 지역의 여러 민족운동 정당들과 협의하여 1932년 10월 25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통일동맹은 결성 선언문을 통해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을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펼치기 위한 방편으로 1932년 11월 14일 중한민중대동맹을 결성했다. 유동열은 중한민중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중국, 한국의 위원들과 함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의 압박과 고초를 겪고 있는 중국과 한국 양 민족은 동맹하여 일본의 극악무도한 신,구 군국주의자 및 정치인들을 절멸함으로써 중국과 한국 및 일본민족까지도 군국주의자들의 탄압적 질곡하에서 구출한다.

이후 중한민중대동맹의 총무 겸 군무부장으로 취임한 유동열은 1935년 7월 5일 여러 독립운동계열 정당들이 결집한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군사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에서 김원봉 등 의열단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그는 일본육사 후배이자 무력투쟁에 뜻을 함께 하는 지청천과 함께 김월봉 계열과 맞섰다.
1937년 1월, 지청천과 유동열 등은 전당비상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지청천은 소위 3두정치론을 제창해 김원봉의 독주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김원봉 등이 당의 실권을 장악하는 걸 막지 못하자, 지청천, 유동열 등은 김원봉 계열을 당에서 제명하고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이 통일정당임을 부정한 뒤 1937년 4월 조선혁명당으로 명칭을 개칭했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에 있던 조선혁명당과는 별개의 단체로, 민족혁명당에 반대하는 지청천과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현익철 등을 중심으로 관내에서 조직되었다. 이 정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된 지청천과 유동열 등은 "민족전선을 통일 강화함으로써 일제침탈세력을 박멸하고, 정치, 경제의 평등에 기초한 민족적 자주독립의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함을 절대적 임무로 할 것임"을 역설했다.
이후 조선혁명당은 임정계열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통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3당의 연합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단 조선혁명당의 일부 인사들은 당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지청천, 유동열, 현익철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38년 5월 7일 3당의 통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선혁명당 당부인 남목청(楠木廳)에 모여 회의 중일 때,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이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현익철은 현장에서 죽었고, 김구,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동열은 이 일을 겪은 뒤에도 3당 통합운동을 밀어붙였고,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의 통합을 달성했다.

2.3.7. 한국 광복군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7월 15일, 유동열은 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지청천, 현익철, 김학규, 안공근 등과 함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전시체제에 대비하기 위한 임정의 군사정책을 점담하여 독립정책을 수행하고자 했다. 제1 목표로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빠른 인원 확보를 위해 제1기에 초급장교 약 200명을 양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본 연대를 약 1개 연대로 편성했다.
1937년 제 3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예산을 편성하기로 결의하면서 군관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군 내부로 이동하자, 임정은 창사,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1939년 5월 사천성 기강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위해 책정된 약 37만원의 예산은 100여 명의 임정인원들의 여비로 사용되었고, 결국 편성된 예산은 집행되지 못했다. 아울러 군관학교 인원모집에도 차질이 생겨 군사계획은 추진되지 못했다.
1939년 10월 기강에서 열린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유동열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참모장의 직임을 맡았다. 이후 임시정부만의 군사조직을 조직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고,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 창설을 이뤄내면서 결실을 이루었다. 이후 1940년 11월 1일 통수부가 설치되었고, 그는 통수부의 막료 겸 참모총장으로 선임되어 광복군을 통솔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시안으로 이전하고 그 부대를 개편했다. 총사령부에는 4개 지단과 5개의 초모 기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1941년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 광복군을 통제하기 위한 '한국광복군행동 9개준승'을 제정해 한국 광복군을 중국의 관할에 들어가게 했다.
이에 1943년 1월, 국무회의에서는 9개 준승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국무위원인 유동열을 비롯해 조소앙, 김규식, 조성환, 박찬익 등이 소조회(小組會)를 결성했다. 소조회는 "광복군을 임정에 귀속토록 하고, 광복군 인원의 군사 및 정치훈련은 임정이 담당한다."는 초안을 마련했다. 이는 중국군사위원회가 요구한 9개 행동준승을 폐지하고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으로, 광복군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편, 유동열은 참모부 조직의 개편,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임시정부에 참모부를 참모본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참모본부로의 개정은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하고, 확대된 군사조직의 원활한 통솔을 위한 조직정비 차원이었다. 그러나 조직의 확대는 재정확보에 크나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1945년 3월 유동열이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예산이 너무 부족하여 병사 훈련 및 작전 수행에 차질을 빛었다고 한다.
유동열은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 전선 및 버마전선 등에 광복군 대원들을 파견하여 방첩 및 일본군 포로 귀순 활동을 수행하게 했으며, 국내로 진공하기 위한 연락 교통의 거점을 마련하고, 한인들을 모집해 대일전의 수행에 있어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다.

2.4. 광복 후의 행적


1945년 8.15 광복 후, 그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 20분 미국 수송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정치에 대한 것은 나는 모른다. (중략) 나는 근본에 있어서는 정치라는 것은 민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민중이 나쁘면 큰일이고, 또 지도자만 좋아도 안될 것이다. 좋은 민중과 좋은 지도자가 일체가 되어 옳은 정책을 써야 정치는 비로소 성공한다. 이 점을 민중과 정치가는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그는 자신을 정치가가 아닌 군인으로 자처했다. 1948년 6월 1일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군인이다. 정치에는 일체 불간섭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정치가 민중에 기반을 두고 민중을 위하는 것이야 한다고 밝힌 것을 볼 때, 그는 임정에 의한 과도정부의 수립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내에서는 국군 건설을 목적으로 오광선 등이 중심이 된 대한국군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총사령부를 조직했다. 국군준비위원회는 광보군의 조직 증편을 위한 확군 활동의 일환으로 국내에서 임정에 의해 결성된 단체였다. 유동열은 위원장을 맡아 광복군 본대가 환국한 후 국군으로 발족하는데 필요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미군정의 사설군사단체 불법화 정책에 따라 국군준비위원회는 해산되었고, 명칭은 광복청년회로 개칭되었다.
1946년 6월 12일, 유동열은 미 군정청의 통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 미군정은 초대 한국인 통위부장으로 이범석을 기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범석이 거절하자 다른 인물을 물색하던 중 경비대 고문을 맡고 있던 이응준의 추천을 받아 유동열을 임명했다.
이응준은 유동열을 추천한 이유에 대해 "조선경비대 장교는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 등으로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간부의 화목과 단결을 이룰 수 있는 분이어야 하고, 간부 뿐만 아니라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응준은 이갑의 사위로, 이갑과 절친했던 유동열과는 그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유동열은 통위부장의 직을 놓고 고심했다. 임정의 여러 인사들은 그의 통위부장 임명에 대해 미국의 용병대장 또는 앞잡이 될 거라며 격렬히 반발했다. 반면 여러 인사들은 지금이라도 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권을 이양받을 수 있는 터전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고 끝에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이제 우리는 명분론을 갖고 왈가왈부할 때는 지났다고 본다. 미군정하의 경비대에 이제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들어가 실질적인 광복군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내 인생을 바칠 사업은 이것뿐이다."

그는 통무부장을 맡은 뒤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경무부와 통위부 휘하의 국방경비대 및 해안경비대 간의 임무 한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당시엔 경무부와 통위부의 명확한 임무에 대한 규정이 애매모호해서 서로 대립하여 충돌을 벌이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는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의 행동범위를 규정한 뒤 조병옥 경무부장과 협상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첫쨰, 조선경비대는 경찰권의 행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둘째, 경비대원들이 만약 그들의 병영과 복무를 떠났을 시에는 각 관공서와 같이 법령을 준수한다.

셋째, 경비대원이 현행범일 때는 경찰이 이를 제지하고 구속하는 동시에 그의 소속부대나 경비대에 통보하여 경비대로 하여금 그것을 처리하게 한다.

넷째, 국가의 비상시에는 경비대는 경찰을 원조하여 치안을 지원한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1일자 기사.

이후 유동열은 국방군을 건설하기 위한 일에 착수했다. 그는 1948년 6월 1일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상비군 10만명을 목표로 삼았음을 밝혔다. 그는 국제정세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병력수를 예로 제시하며, 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훈련이 잘 된 상비군 10명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또, 세간에 북조선의 병력 수가 20만 이상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해, "북조선 정권의 재정이 그렇게 거대한 예산이 드는 다수한 군대를 양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경제력이 없는 곳에 충실한 군비가 있을 수 없다."며 10만 명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10만명의 국방군을 만들려면 3년 이상의 시일을 필요로 하고, 그 예산으로는 약 500억원의 재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당면한 문제로 항공대가 아직 없는 점을 들어 조속한 시일 내에 공군을 창설하고자 했다.
한편, 그는 친일잔재를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1948년 9월 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일제 치하의 굴욕을 잊고 사는 것에 강하게 비판하면서, 친일파를 철저히 처벌하고 올바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7월 국회가 수립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식이 개최되면서, 통위부는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이에 그는 8월 31일 통위부장 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수립과 아울러 국방부장관도 임명돼, 본 부장의 임무는 완료되었기에 나는 금 8월 31일부로 국방장관에게 일체를 완전히 이양하였다.(중략) 중언할 것도 없이, 군대는 국가 민족의 군대요 어느 당파나 개인의 군대가 아니니 장관의 교체는 다만 당국자의 경질에 불과하며, 충국애족의 지성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임에 관하여 다만 부탁하는 것은 전 민족이 일심, 일덕, 일체가 되어 조국의 재건과 방위에 총궐기하여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1948년 9월 4일자.

1946년 9월 15일, 유동열은 신한민주당, 재미한족연합회, 청우당,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삼우구락부, 무소속 의원들이 연합한 신진당(新進黨)에 가입해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통위부장을 수행하느라 별다른 정당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통위부장을 사임한 뒤 신진당 위원장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49년 7월 25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석해 김붕준, 최동오를 비롯한 25명의 각계 중요인사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의했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는 강령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공산진영은 배제하고 그들의 전향을 촉구할 것과, 정치적 종파 관념을 해소하고 민족진영의 총역량을 강화한다."고 선언했다. 의장에 김규식이 선임되었고, 유동열은 신진당의 대표로서 다른 23인의 정당 대표들과 함꼐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민족진영강화위원회는 일부 유력 정당, 단체의 이탈로 인해 계획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유동열은 북한의 이른바 '모시기 작전'에 의해 임정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이후 북으로 끌려가던 그는 1950년 10월 18일 평안북도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사후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유동열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3. 기타


이응준이 군사영어학교 개설 시 광복군에 대한 인원배분을 동일하게 하였고, 유동열을 설득하여 통위부장에 위촉함으로써 광복군 등 중국에서 활동한 군경력자들이 한국군에 입대할 수 있는 정치적, 실질적 배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덕분에 국군의 인적 구성이 일본군만주군 일색으로 채워지는 것을 막았다. 광복군, 국부군 출신들이 대부분 당시 기준으로 중장년층으로서 군사학교 교육을 대부분 1910-20년대 중국에서 수료한 관계로 일본군, 만주군 출신 인사들보다는 군사 교육의 체계, 실전 경험 등에서 다소 떨어진 면이 없지 않았으나 국군의 정통성 차원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1949년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을 맡았고 1981년까지 미 8군사령관 특별고문을 맡았던 짐 하우스만의 저작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유동열은 김종갑이 상놈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을 막았다고 한다.

춘천 8연대의 수석장교인 김종갑 중위가 대위로 진급할 때였다. 그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사단장까지 지냈고 나중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돼 국방차관까지 올라간 사람이다.그런데 이 사람의 진급 명령이 나오지 않았다. 통위부장 유동열 장군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다. 그는 조선경비대의 장교는 반드시 양반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능한 김종갑의 가문을 잘 알지는 못하나 어쨌든 유동열 장군이 보기에는 조선의 고급 장교가 될 만한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케이스로 진급이 유보돼 있는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어쩌겠단 말인가. 지금은 단 1명의 장교도 아쉬운 판인데 능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양반 논쟁으로 인사의 차질을 빚고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부족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현지 임관을 통해 장교 숫자를 늘리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개설을 돕고 있었다. 유장군은 계속 장교의 조건으로 “양반”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런 말이 새 경비대를 조직하는 마당에 통할 리가 없었다. 어느 미군 조직법에도 양반만이 장교가 돼야 한다는 근거가 없었다.

짐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p.127~128.

자매품으로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은 경비대 사관학교를 불시에 방문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이나 관상이 안좋다는 이유로 후보생 20여명을 그 자리에서 짤랐으며 자기 맘에 안드는 장교는 불문곡직 제주도 9연대에 처박았다. 이런 막가파 장군이 잘 나갈 수 있던 이유는 같은 중국군 출신인 통위부장 유동열이 밀어준 덕분이라고 한다.[2]
류미영(1921~2016)은 납북되지 않고 남한에 남았다가, 1986년에 남편 최덕신과 함께 월북했고, 2000년 이산가족 상봉때 북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했다.[3] 2016년에 사망했다.

4. 대중매체에서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창호가 연기했다.

[1] <서우> 제6호(1907년 5월 1일)>[2] 출처: 장창국, <육사졸업생>, p153[3] 월북한 류미영이 북측 이산가족 대표단에 포함되어 온것에 반공 성향의 일각에서는 "우리도 황장엽을 이산가족 대표단에 끼워서 북한에 파견하자"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