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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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영삼(申榮三)
이명
신용재(申用才)
본관
평산 신씨[1]
생몰
1896년 1월 27일 ~ 1946년 2월 4일
출생지
평안도 숙천군 우상방 도덕리[2]
(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3]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4]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영삼은 1896년 1월 27일 평안도 숙천군 우상방 도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3월 31일 경성부에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의학과를 졸업하고#, 1918년 만주 펑톈(奉天)으로 건너가 재중동포들을 상대로 하는 의료사업 및 민족사상 고취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상하이로 건너가 유동열·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중국항공창의 군의관으로서 대일항쟁에 참가하였다.
1932년 4월에는 윤기섭·신익희·최용덕(崔容德)·왕웅·민병길·김사집(金思潗)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난징에서 중국으로 복무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원봉·이집중(李集中)·김용재(金容宰)·권중환(權重煥)·김용기(金容基) 등과 중견 군사간부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936년에는 충칭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나창헌과 함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유자명·심광식·김현구(金玄九) 등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평안도 대표로 의정활동에 참여하여 8.15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3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2월 8일에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의 중앙집행위원에 취임하는 등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대조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에 거주하다가 1946년 2월 4일 별세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35세손 '''영(榮)''' 동(東) 상(相) 주(柱) 항렬.[2] 1896년 숙천군 우상면 도덕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원군 숙천면 도덕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숙천군 용덕리[3] 인근의 통덕리·백로리·미남리와 함께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악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또 다른 독립유공자 신숙과 동일인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고려공산당 당원으로도 여겨졌다.용의조선인명부